2017-10-22

한반도 중립화(통일) 주장 일지 -주종환 참여연대



한반도 중립화(통일) 주장 일지 -주종환 교수님 글 - 회원전용 활기차 - 참여연대



한반도 중립화(통일) 주장 일지 -주종환 교수님 글


안진걸
Jan 18, 2005 (14:00:55)
2263

안녕하세요. 안진걸입니다.

참여연대 산하에 참여사회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시고, 민족화합운동연합 대표로도 일하시는 주종환 교수님(경제학, 동국대 명예교수)께서 작성하신 글입니다.

참여연대의 의견은 아니지만, 민족의 화해와 통일 과정에서 검토해볼만한 의견이고 역사가 오래된 주장이기에 소개해드립니다. 아래 바로 붙였습니다.

[한반도 중립화 주장 일지]
- 주종환 강종일 공동 정리 ; 2005년 1월 6일

1. 구 한말시대 한반도 중립화 주장

1882년 2월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조선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조선과 중국의 전통적 유대관계를 단절하기 위하여 중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6개국이 조선의 중립화를 논의하자고 중국에 제의했다. 그러나 중국이 이를 거절했다 (진단학회 편, 『한국사 최근세 편』 서울: 진단학회 1961), pp. 697-698.

1884년 3월 서울주재 독일 부영사 허만 부들러(Hermann Budler)는 벨기에와 같은 조선의 영세중립 방안을 주장했다 (김갑철, 『강대국과 한반도: 4강 체제와 한국통일』 서울: 일신사 1979), p. 272.

1884년 12월 유길준(兪吉濬)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벨기에와 같은 조선의 영세중립 방안을 조선정부에 건의했다.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편, 『유길준전서』 제6권 서울: 일조각 1971), pp. 319-328.

1889년 8월 던켄(Chesney Duncan)은 그의 저서 Corea and the Power에서 조선의 엄정한 영세중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Shanghai: Mercury Office 1889), pp. iii-iv.

1891년 6월 고종(高宗)은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에 스위스와 같이 조선의 영세중립국 문제를 제의했으나, 중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Jongsuk Chay, Dplolmacy of Asymmetry: Korean-American Relations to 1910,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0), p. 89.

1900년 1월 샌드(William F. Sands)는 조선의 영세중립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강광식, 『중립화 정치론: 한반도 적용 가능성 탐색』서울: 인간사랑 1989), p. 147.

1900년 8월과 1903년 9월 고종은 일본이 조선을 대신해서 조선의 영세중립을 실현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일본은 내치는 조선이 맡고, 외치는 일본에 맡기라고 접수를 거절했다. (상계서)

1901년 1월 러시아는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 이스볼스키(Alexander P. Isvolski)를 통해 일본정부에 조선의 중립화방안을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상계서).

1902년 9월 러시아는 미국을 중재자로 하여 러시아, 미국, 일본의 3국의 보장 하에 한반도의 중립화방안을 일본에 다시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일동맹의 성공으로 이를 거절했다. (강광식 상계서), p. 149.

1904년 1월 고종은 일방적으로 조선의 영세중립을 선포했다. (홍현익, "통일한국과 한미동맹," 이태환 편, 『통일한국의 외교안보: 전망과 대책』 서울: 세종연구소 1999), p. 202.

1904년 9월 조선의 조병식 특사는 주일 미국공사 버크(Alfred E. Buck)에게 조선의 영세중립 방안을 제출하고 협조를 요구했으나, 버크는 사안의 중대함을 이유로, 조선이 워싱턴에 직접 제출하라고 접수를 거절했다. (Jongsuk Chay, op. cit.), p. 126.

2. 해방 후 한반도 중립화 주장

1952년 재미교포 김용중은 한반도의 영세중립통일방안을 발표했다. (김학준, "제2공화국 시대의 통일논의,"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제15호 서울: 한국국제정치학회 1975), p. 331.

1956년 7월 2일 납북인사들의 단체인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대표 조소앙)’는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시국선언대회를 갖고, 행동강령에서 남북한의 중립화통일과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할 것을 골자로 한 7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태호,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 『현대사 실록』서울: 다섯수레 1991), pp. 374-376.

1953년 이승만에 의해 일본으로 추방된 김삼규는 남북한의 영세중립통일을 주장했다. (김갑철, 전계서), pp. 275-280.

1960년 8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는 남북의 영세중립통일을 주장했다. (전계서), pp. 282-284.

1961년 2월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중통연)’은 남북한의 영세중립통일을 주장했다. (상계서).

1961년 4월 언론인 김석길은 한반도의 오스트리아 식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김석길, 『민주 중립화 통한의 신 방안』 서울 : 국제정경연구소 1961), pp. 137-204.

1971년 2월 김철은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한반도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과 국제적 조약을 통하여 한반도의 영세중립통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당산 김철전집간행위원회 편,『당산김철전집』서울: 해냄 2000), p. 101.

1980년 10월 김일성은 고려민주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남한에 중립통일을 제안했으며, 1985년 10월과 1993년 4월에도 중립통일을 제의했다. (노중선, 『연표: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50년』 서울: 사계절 1996), pp. 218 & 518; (최보식, “장세동 - 김일성 비밀회담의 생생한 대화록,” 『월간 조선』 제19권 9호, 1998), pp. 148-224.

1987년 황인관(In K. Hwang)은 그의 저서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ty: Peaceful Management of Korean Unification Cambridge, MA 1987)에서 한반도가 영세중립통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했다. (홍정표 역,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한 공영방안: 중립화통일론』서울: 신구문화사 1988).

1989년 6월 김대중은 광주(光州) 시국강연에서 “장차 한국은 오스트리아 식 영세중립국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나의 길 나의 사상』 서울: 한길사 1994), p. 362.

1990년 8월 권두영은 일본 오사카 국제학술회의에서 “여운형의 정치노선과 민족통일의 역사적 방향 - 미군철수문제해결과 한반도평화유지에 있어서 UN의 역할을 중심으로” 주제의 논문에서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강종일,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서울: 들녘 2001), pp. 32-63.

1999년 12월 강종일은 한국정치학회가 외교안보연구원에서 개최하는 학술회의에서 한반도 영세중립통일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강종일, “한반도영세중립통일방안 연구,”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 제41집 1호, 2001), pp. 93-116.

2001년 김명철은 미국 브라운 대학교 저널에, 북한의 김정일은 “한반도의 지정학, 남북의 냉전체제종식과 전쟁방지, 한민족의 평화애호 사상, 남북한의 군사잠재력 등을 고려하여 한반도의 ‘스위스 식 무장중립 (Swiss like armed neutrality)’ 통일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고했다. (Kim, Myong Chol, "Kim Jong Ils Perspectives on the Korean Question," The Brown Journal of World Affairs, Winter/Spring 2001 Vol. VIII, Issue 1), pp. 103-113.

2004년 6월 주종환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영세중립만이 진정한 안보와 자주국방의 길” 이라는 한반도 영세중립통일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www.hwahap.org 참조)

2004년 10월 주종환은 “한반도 자주적 무장 중립화 통일 방안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 했다. (www.hwahap.org 참조)

2004년 12월 국가원로회의 강영훈 공동의장은 “장차 한국의 외교정책은 영세중립을 희구해야 할 것”이라는 결의문을 대통령, 국회의장, 양당대표에게 전달했다. (동아일보 2004년 12월 9일).

3. 외국인의 한반도 중립화 주장

1947년 7월 미국의 웨드마이어(Albert Wedemyer) 장군은 “한반도에서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의 영세중립을 보장할 것”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투르만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In Kwan Hwang, “The 1953 U.S. Initiative for Korean Neutralization,” Korean and World Affairs: A Quarterly Review, vol. 10 no 4, Winter 1986), pp. 798-801.

1953년 6월 미국 국무성 덜레스(John F. Dulles) 장관은 7월 27일 한국전쟁의 휴전에 대비하여 한국의 중립화 정책방안에 서명했다. 그의 중립화 방안은 NSC에 회부했으나, 합동참모본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상계서)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은 “미국은 한국통일문제를 오스트리아 식의 중립화 조건으로 해결하는 가능성을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상계서).

1961년 3월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 교수는 "한반도에서 외국군대를 철수시키고 한반도의 중립화를 모색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상계서).

1972년 브레진스키(Zbigniew Brezinski) 교수는 주한 미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남북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로 지목되고 있는 만큼, 남북통일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4강이 한반도의 중립화 보장을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상계서).

1976년 카터(James E. Carter) 대통령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반도의 중립화가 필요할 지 모른다”고 언급하면서 정책검토를 지시했다. (상계서).

1976년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는 주한 미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으로부터 미군철수는 보다 더 긍정적이며 미국이 철수할 경우, 한국정부가 외부의 압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들의 통일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4강이 한국중립화에 대핸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계서)

1989년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한국은 4강과 협력하고, UN의 지원을 받아 중립화 통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Johan Galtung, "The Neutralization Approach to Korean Reunification,") in Michael Haas, ed. Korean Reunification. New York: Praeger 1989), pp. 14-15.

2003년 4월 해리슨(Selig S. Harrison)은 그의 저서 Korean Endgame: A Strategy for Reunification and U.S. Disengagement 에서 한반도의 영세중립통일을 건의했다. (이홍동 외 역, 『코리안 엔드게임』 서울: 삼인 2003), pp. 526-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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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환 : 동국대 명예교수, (사) 민족화합운동연합 이사장
강종일 : 영세중립통일협의회 상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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