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6

[책과 삶]31년 차곡차곡…어느 시골 할머니의 소박한 일기 - 경향신문



[책과 삶]31년 차곡차곡…어느 시골 할머니의 소박한 일기 - 경향신문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입력 : 2018.08.24 20:51:01 수


ㆍ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ㆍ이옥남 지음
ㆍ양철북 | 224쪽 | 1만3000원




이옥남 할머니(왼쪽 사진)는 얼마 전 아흔일곱 살 생일을 맞이했다. 강원도 양양 송천 시골마을에 사는 할머니는 아직도 밭에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감자와 깨, 콩을 거둔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골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할머니가 3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일기를 읽다보면 머릿속 한편에 정물화처럼 우두커니 박제돼 있던 할머니가 살아 움직이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말년에 접어든 시골 할머니에게도 삶과 일상, 내면의 기쁨과 슬픔이 있다고. 이옥남 할머니가 하루하루를 정성껏 기록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할머니가 1987년부터 최근까지 쓴 일기 151편을 엮어낸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그래서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특별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귀한 책이다.

할머니가 책을 내면서 쓴 ‘작가의 말’에 해당하는 글부터 간단치가 않다.

“어려서는 그렇게 글씨가 쓰고 싶은 것을 아버지게서 못 배우게 해서 못 써보고 그것이 원이 돼서 부엌에 불 때면서 부주깽이로 재 글어내서 재 우에 가자 써보고 나자 써보고 이렇게 배워서 그저 그럭허니 하고 있었지 절대 글 안다는 표정을 안 했습니다……전에는 뻐꾸기 울기 전에 깨모를 부어야 기름이 잘 난다고 했는데 이제는 날씨가 바뀌어서 뻐구기가 울고도 한참 더 있다가 깨모를 붓는다고 합니다. 콩도 전에는 소만에 심었는데 지금은 하지가 다 되어서 심고, 모든 것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옥남 할머니는 부모님과 남편을 먼저 보내고 예순다섯 살이 되어서야 ‘글씨가 좀 늘까’ 하는 생각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31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일기가 책이 되었다. 양철북 제공

어떤 꾸밈도 없는 소박한 말투 속에 여자로 태어나 글을 배우지 못해 환갑이 넘어서야 펜을 손에 잡게 된 설움부터, 기후변화에 대한 통찰까지 함께 들어 있다. 할머니의 일기는 이런 식이다.


151편의 짧은 일기들을 계절별로 재편집해 실었다. 계절과 자연의 변화에 호흡을 맞춰 농사를 짓고 일상을 꾸리는 할머니의 삶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일기들의 대부분은 농사짓는 소소한 일상, 자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다. 더러 할머니는 비둘기나 뻐꾹새, 백합을 바라보며 삶의 희망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문득 지난 생을 반추하기도 하는데, 이 책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대목들이다. 뻐꾹새가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이고 짐승이고 사는 것이 다 저렇게 힘이 드는구나” 생각하고 하얀 백합꽃을 보며 “깨끗하고 즐거워서 사람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004년 6월20일 일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없는 집에 시집와서 굶는 것을 생활로 삼고 살면서 시부모님한테 학대 받고 살았지. 남편은…바람만 피고 집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다녔지…꿈같이 살아온 것이 벌써 나이가 팔십셋이 되었구나.” 짧게 쓴 할머니의 인생 서사이기도 하다. 글과 배움에 대한 할머니의 욕망은 부모님과 남편을 모두 떠나보낸 후 실현되었다. 권정생의 <몽실언니> 등을 좋아하는 할머니는 “얼마나 재미있고 배울 것이 많아서 자꾸 읽다보니 시간 가는 것을 몰랐다”며 책을 읽고 공부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할머니의 매력은 이것뿐이 아니다. 동갑내기 친구 할매를 떠나보내고 쓸쓸해하며 “낮에 일하다가 밤에 자다가 살무시 숨졌으면 그것이나 바란다”고 하지만, 만나기만 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싫어하는 동네 ‘세빠또 할매’도 있다. 나이 여든을 넘어 4만5000원을 주고 산 믹서를 보고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하고, 장에서 쓴 돈 천원, 백원까지 계산하는 알뜰한 분이 대구 지하철 참사를 당한 피해자들에겐 10만원의 성금을 선뜻 내놓는다. 할머니가 도토리를 까다가 “돌멩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데 자꾸 뛰나가서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터지는 웃음을 막기 힘들다.



지난달 열린 할머니 생신잔치에서 책 출간 축하도 함께했다. 욕을 잘하고 말이 많아 ‘세빠또’란 별명이 붙어 일기에도 종종 나오는 ‘세빠또 할매’도 와서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책의 마지막 장인 ‘겨울’에서 점점 노쇠해가는 할머니의 모습도 함께 느껴져 안타깝지만, 할머니가 오래오래 일기를 썼으면 좋겠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242051015&code=960205#csidx09806eb5403f99abba9c0ee3b677b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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