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조선의 경제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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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
식민지 근대화론은 해방 후 한국경제를 일제시대 개발과 연속적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제시대 조선이 고도로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한국은 왜 가장 가난한 농업국이 되었는가?
해방 후 조선에는 일본인들이 소유하던 각종 자산이 남겨졌다. 일본의 대외자산의 90%는 중국(만주와 대만)에 10%는 조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의 기업부분의 자산의 경우, 비교적 규모가 큰 1,500사의 경우 64.8%가 북한지역에 35.2%가 남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3, 800개의 소회사와 기타 기업의 자산은 남한지역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다시 말해 남한 지역은 중소기업과 소규모자영업을 영위하던 일본인이 많았고, 북한지역은 대기업이 많았다는 것이다. 업종별 자산액을 알 수 있는 1,500개의 회사 중 광(鑛)공업 부분만을 비교하면 북한지역은 70%인데 반해, 남한 지역의 비중은 28%에 불과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경제의 개발은 조선지역 전체에 걸쳐 골고루 개발된 것이 아니라 북한지역에 집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해방 후의 남한경제는 일제시대와 연속적 측면보다 단절적 측면이 더 강하게 작동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해방 후 남한이 가난한 농업국으로 전락한 것도 일본 전쟁경제의 붕괴, 해방과 분단, 6.25 사변이라는 세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인이 남긴 남한 지역의 자산은 약 22.8억 달러인데 그중 기업자산은 13억 달러였다. 이 물적 유산이 해방 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조선공업의 발전은 일제의 필요에서 출발해 일제공업의 연장으로 건설된 것으로 일제가 패퇴(敗退)한 뒤 공업의 상호 유기적 관련을 잃고 기형화된 결과였으며, 해방 직후 비축 원자재가 소진되면서 원료부족으로 조업단축이나 휴업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둘째, 전시체제였던 일제의 군수산업은 정책적 보호를 받아 비대해진 반면, 평화산업 부문은 통폐합되거나 축소되었다. 따라서 이 물적 유산은 군수산업부문에서 평화산업부문으로서 구조전환을 통해 남한경제의 부흥이나 성장에 기여할 수 있었지만, 전환에 필요한 기술이나 부품확보가 어려웠다. 셋째, 일제가 남긴 물적 유산은 조악(粗惡)한 상태이거나 노후(老朽)화되어 해방 시점에서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시설을 파괴하거나 관리부실, 부품부족으로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1946년 말부터 입하된 외국완성품(外製)이 남조선공업을 위축시키게 되었다. 더 나아가 6.25 전쟁 과정에서 다시 50.5%가 파괴되었다. 이 결과 일제시대의 물적 유산의 크기는 더욱 줄어들었으며, 해방 후 남한지역에 남겨진 일본인 공업자산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한국의 공업화에서 한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개발 곧 1930년대 이후 조선의 공업화는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었으며 남한지역에 남겨진 일본인 공업화 자산도 북한의 4분의 1정도였다.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일제시대의 물적 유산은 1950년대 초가 되면 그 의의가 크게 축소되었다.
일제시대는 전쟁과 대공황으로 성장률이 매우 낮은 시기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공업을 중심으로 매우 빠른 성장을 했다. 철도, 도로, 항만 통신 등의 각종 기반시설과 농업, 광업, 수산업 등 모든 산업생산시설도 급속히 확충되었다. 교육, 행정, 사법 제도와 시설도 근대화되었다. 이는 조선왕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괄목할만한 개발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개발의 결과물들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해답은 개발의 주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제시대의 개발은 한마디로 말해 일본인들의 일본들에 의해 일본인들 위한 개발이었다. 조선에서 이루어진 개발이지만 조선인은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예컨대 1인당 농업 수입의 경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보다 96배가 높았다. 조선의 공업개발과정 역시 일본인 대자본의 발전과정과 다름없었다. 예를 들면 조선의 광공업은 일본인 대공업이 74%, 일본인 중소기업이 21%, 조선인 중소기업이 5%에 불과했다. 이는 조선에서 공업개발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또 그 개발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조선의 광공업부문의 생산수단은 더욱 빠른 속도로 일본인들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체제는 조선의 인적 자본의 형성에 있어서도 조선인에 매우 불평등하게 작동되었다. 이공계대학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문학교도 조선인은 입학 궈터가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제시대 전 기간에 걸쳐 고급기술자-일본인, 하급노동자- 조선인이라는 고용구조가 변함없이 작동되었다. 소수의 일본인이 조선의 부의 차지하게 되자 민족별 경제적 격차는 더욱 커져갔다. 많은 조선인들은 경제적 궁핍을 견디지 못하고 도시빈민 혹은 만주나 시베리아로 유민(流民)화되어 떠났다. 조선인 유민과 일본인 이민(移民), 이것이 식민화(colonization) 과정이었다. 더구나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 이루어졌던 일제시대 개발의 유산도 해방 후의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대부분 사라져 버림으로써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경제개발의 시대에 그것이 한 역할은 매우 미미했다.
결국 일제시대의 개발의 유산 중 한국전쟁 이후까지 잔존한 것은 10분1에 불과했기에 개발의 유산은 제한적이었으며, 일제시대와 해방 후 한국 경제가 처해있던 상황 사이에는 상당한 단절적 측면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에는 개발이라는 현상이 존재했지만 조선인에게는 개발다운 개발이 없었고, 해방과 더불어 개발의 유산마저 현저히 축소되어 버림으로써,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이 일제 초기에 비해 오히려 더 낮아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개발 없는 개발’이다. 일제시대 활약했던 조선인 기업가들은 해방 후 친일파라는 멍에를 짊어져야 했으며, 최남선, 이광수 같은 문인들도 정당하게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의 민중들 역시 말과 글을 빼앗겼으며 때로는 사상전향을 강요당함으로써 역사의 죄인으로 만든 시대가 일제시대였던 것이다. 철도가 깔리고 도로가 뚫리고, 전화와 전기가 들어오고, 많은 공장과 저수지가 생겼으며 또 학교가 들어서고 도시가 발전한 것만 보고 일제시대를 문명화의 시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조선인 입장에서 일제시대는 ‘야만의 시대’였다.
* 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개정2판 2016. pp313-340
* 2016.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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