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7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와 기업가의 탐욕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와 기업가의 탐욕: 국익과 사익의 경계에서
김 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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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학교 국제지역학부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활약했던 기업가 한상룡의 사례를 통
해 한국사회의 탐욕을 생각해 보았다.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
를 전제로 한 식민지 사회라는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경유착의 메커니즘은 기
본적으로 같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상룡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이라 불렸을 만큼 조선재
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1903년부터 1928년까지 한성은행을 경
영했던 은행가였다. 한상룡은 한성은행을 토대로 약 300여개
기업(은행 포함)의 설립과 경영에 참가하였고, 조선생명보험
회사나 조선신탁회사 등 새로운 분야의 회사를 한국 최초로 설
립하였으며,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기업가에게 기업활동과
관련하여 자문했다. 말하자면 한상룡은 조선재계의 코디네이터
였다. 일제강점기에 한상룡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명문가 출신
의 해외유학파였던 점,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사교술, 성실한 인간관계 등이 전제가 되었겠지만,
보다 중요한 배경으로는 일본의 조선지배에 협력하면서 “지배
세력과 피지배세력의 긴장관계”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탁월
한 정치감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상룡이 제3대(1919년
8월∼1927년 12월)와 제5대(1929년 8월∼1931년 6월) 조선
총독을 지냈고, 제30대(1932년 5월∼1934년 7월) 일본의 내각
총리를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보낸 편지는 이러한
그의 ‘탐욕’과 ‘성공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한상룡은
자신의 ‘탐욕’과 왜곡된 ‘성공방식’ 때문에 결국 오랫동안 자신
의 사교무대였던 집에서조차 쫓겨나야 하는 배신감을 맛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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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에서 언급하는 일제강점기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국익(國益)’은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여 전개된 민족국가로서의 독립을 지향하는, 무장투쟁과 비폭력저항운동 등 일체의 민족해방운동과 그에 수반한 지향성이다. 한상룡과 같은 직업적 친일분자에게 있어서 이 첫 번째 ‘국익’ 관념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민족적’ 자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둘째, 당시 식민지 권력에 의해 전개된 한국사회를 대상으로 한 일련의 정책과 그에 입각하여 공유되는 ‘공공적’ 이익을 의미한다. 한상룡은 당시 제국주의 일본을 ‘조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한상룡에게 있어서 국가권력이란 결국 조선총독부로 상징되는 식민지권력 그 자체였다. 두가지 모순되는 듯한 ‘국익’을 동시에 고려해야 했던 한상룡은 처음부터 식민지 기업가로서 한계를 내재하고 있었고, 따라서 모순된 ‘국익’ 사이의 긴장관계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익’에 이용할수 있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러한 그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1919년 3월 말 기자로부터 3⋅1독립운
동에 대한 소감을 질문 받고 대답한 내용이다. “……총독부나 내지인(日本人: 인용자)에게 듣기 좋은내용으로 말하면 조선인으로부터 ‘국적(國賊)’이라고 비난받을 것이고, 조선인에게 듣기 좋은 내용을 말하면 총독부나 내지인으로부터 독한 놈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시국의 향방을 관망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朝鮮掻擾事件と官
民の所感”, 뻕朝鮮及満洲뻖 第142号(京城 : 朝鮮及滿洲社、1919),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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