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1

(3) 이만열 - [20191020 한국 교회와 성경기독교] 오늘 오후 1시부터 약 1시간 동안, 집 근처에 자리한...

(3) 이만열 - [20191020 한국 교회와 성경기독교] 오늘 오후 1시부터 약 1시간 동안, 집 근처에 자리한...


[20191020 한국 교회와 성경기독교] 오늘 오후 1시부터 약 1시간 동안, 집 근처에 자리한 산성교회에서 “초대교회 흥왕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약 1시간 동안 강론했다. 시국 문제로 들끓는 시점이어서 이런 내용이 흥미를 끌 수는 없지만, 한국 교회의 쇠락을 걱정하는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이기도 해서 이런 제목으로 강의를 한 셈이다.
신약성경 중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시작과 성장 발전을 기술한 일종의 역사책이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 책 속에 초대교회의 성장 발전을 설명하는 세 구절을 숨겨놓았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6:7)”고 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 흩어지게 되자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의 한계를 넘어 이방인에게도 전해져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때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12:24)”고 썼다.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 등지의 선교의 성과도 그는 주의 말씀의 흥왕이라고 썼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19:20)”고 한 말씀이다. 그는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하나님 말씀의 흥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성장 발전을 ‘하나님 말씀의 흥왕’이라고 한다면,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한 한국 교회도 그런 체험을 갖고 있다. 1872년에 만주에 도착한 스코틀란드 선교사 로스는 한국어를 익히고 성경번역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879년에 한국인 네사람이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다.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이, 그 해 5월에 요한복음이 한글로 출판되었다. 한글역 성경은 압록강 북쪽의 만주지역에 배포되어 1885년까지 백여명이 세례를 받았고 600여명이 세례 대기중에 있었다. 서울로 와서 성경을 배포하고 약 2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심양에 돌아온 서상륜은 서울에 70명을 포함하여 한국에 100명이 넘는 개종자가 있다고 보고했다. 로스는 서상륜의 구두보고를 1885년 3월 8일자로 영국성서공회에 알렸다. 이는 한국 개신교의 첫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도착하기 한 달 전이었다. 로스 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룩해낸 성과였다.
로스역 신약성경이 1887년에 출판되었지만,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독자적으로 성경을 번역했다. 대영성서공회(BFBS) 한국지부는 1896년경부터 한국 성서사업을 본격화했다. 1900년에 새로 신약성경을 번역 출판한 후 1911년에는 구약성경을 출판했고, 개역판 신구약성경전서는 1938년에 출판되었다. 한글맞춤법에 따라 성경이 출판된 것은 1952년 한국전쟁 중이었고, 그 뒤 1956년에 다시 부분개정이 이뤄졌다. 1977년에는 천주교와 공동으로 신구약 성경과 외경(外經)을 번역하여 ‘공동번역성경’을 간행했는데 북한에서는 이 공동번역성경을 저본으로 하여 성경을 출판했다. 그 뒤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은 1993년에 완성된 표준새번역이다. 그러나 각 교단에서 표준새번역 성경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용을 꺼리게 되자, 대한성서공회는 오랜 작업 끝에 2000년에 "개역개정판"을 내놓았고 한국 교회는 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초기에 출판된 성경은 권서(勸書)들에 의해 각 지역에 보급되었다. 권서는 성서공회 혹은 선교사들에 소속되어 성경의 보급에 매우 힘썼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구역을 거의 몇 주 동안에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보급했다. 그들 중에는 성경에 박식하여 초신자들의 질의에 응대하기도 하고, 밤에 유숙하는 곳에서는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는 작은 모임들이 뒷날 교회로 발전하였으니, 권서들이야말로 한국 교회 설립의 토대가 되었다. 한국의 초대교인들은 대부분 권서들로부터 복음을 들었다. 성경반포사업에 종사했던 베시 목사는 성경의 반포를 두고 “오늘날 한국에는 성경이 뚫고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성경은 교도소와 병원, 나환자 수용소, 매춘굴, 도박판, 아편소굴 그리고 궁궐과 가게를 통과했다. 성경은 추악한 거지소굴과 산중의 절간, 가난한 초가집, 어부의 거룻배와 뱃사공의 나룻배 그리고 학교와 대학에까지 들어갔다. 그리하여 성경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모든 곳에서부터 거듭난 사람(twice-born men)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권서사업은 가장 값비싼 사업이었지만 복음화에는 가장 값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결과 한국 신자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Bible lovers)이라고 불려졌고,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불려졌다.
성경이 보급되자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공부운동이 일어났고, 성경을 공부하기 위한 사경회(査經會)가 시작되었다. 1902년 미북장로회 선교부는 800여회의 사경회에 5만여명이 참서했고, 이 무렵에는 신자의 60%가 해마다 사경회에 참석했다. 사경회는 주로 농한기인 겨울에 열렸는데, 1901년 평양에서 개최된 여자사경회에는 압록강변의 삭주 창성 지방의 자매들이 3백리의 눈길을 헤집고 머리와 등에 짐을 가지고 참석했다. 1902년 평양의 ‘사나이’사경회에는 400여명이 참석했고 이 중에는 전라도의 목포 무안에서 참석한 이들도 있었다. 1909년 10일간의 성경공부를 위해, 머리에 쌀자루를 이고 300마일을 걸어온 이들이 있었고 어떤 이는 거기에다 아이들까지 업고 왔는데 그들의 손에는 손때묻고 닳은 성경책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한말, 일제 치하 신앙의 자유가 제약당하던 상황에서도 줄기차게 계속된 성경공부는, ‘사도행전’ 기자가 언급한 ’말씀의 흥왕‘(행 6;7, 12;24, 19;20)을 가져왔고 그것이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를 지켜본 선교사들은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성경기독교적‘인 성격에 있다고 보았다. 선교사들의 말이다. “한국의 성경은 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 온 것이 분명하다.…성경공부와 성경공부반은 한국 교회의 발전에서 가장 독특하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1916).” “성경공부반은 겨울에 열흘에서 2주일 동안 중심지에서 열린다. 겨울마다 족히 12만 5천명의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하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추정된다(1917).” “한국 교회의 주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때문이라는 것이 충분히 관찰한 사람들의 확신이다(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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