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6

후진적 한국 노동 정책, 결국 무역분쟁까지 일으키다

후진적 한국 노동 정책, 결국 무역분쟁까지 일으키다


후진적 한국 노동 정책, 결국 무역분쟁까지 일으키다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ILO 협약 비준 EU 요구 어깃장 놓은 정부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2019.10.15 10:27:48

후진적 한국 노동 정책, 결국 무역분쟁까지 일으키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일 전인 7월 4일, 눈에 띄는 고용노동부 보도자료 하나가 나왔다. '유럽연합, 우리 정부에 전문가 패널 소집 공식 요청' - EU(유럽연합)과 한국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에 명시된 후속 조치들에 대한 논의가 난항에 빠지자, EU 측이 협정에 명시된 분쟁해결절차 중 더 높은 수준에 해당하는 ‘전문가 패널’ 소집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무역 분쟁 이야기 아닌가. 무역 문제에 왜 외교통상부가 아니라 고용노동부가 정부를 대표해 입장을 낸 것일까. 그건 EU가 문제삼고 있는 부분이 한국-유럽연합 FTA의 제13장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章)', 그 중에서도 ILO 핵심협약 비준과 협약 원리를 노동법에 반영할 것을 규정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FTA에 ILO 협약 비준 약속을?

요즘 웬만한 자유무역협정에는 모두 노동기본권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테면 기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체한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에서 미국은 멕시코 노동자 단체교섭권 보장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위 협정이 발효되기 전까지 멕시코는 ILO 협약 원리에 따라 헌법과 노동관계법을 개정하기로 약속해야 했다.

자유무역협정에 노동기본권 항목이 포함되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가 바로 한국-유럽연합 FTA 체결이었다. 2011년에 체결되어 올해로 꼭 8년이 된 이 무역협정에 노동기본권 보장 관련 내용이 들어간 이후 세계 각국의 자유무역협정에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국-유럽연합 FTA는 매우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 정부와 유럽연합은 FTA 체결 당시 "1998년 국제노동기구 기본권 선언상의 노동기본권 원칙"을 자국의 법‧관행에서 실현할 것을 명시했다. 이 원칙이 바로 ILO 핵심협약 8개를 의미하며, 이들 협약 원리를 노동법에 반영하기로 한 것이다. 아울러 ILO 핵심협약 8개는 물론이고 최신 협약 77개 비준을 위한 노력도 명시했다.

이런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될까? 각 나라간 조약과 협정에는 이럴 때를 대비한 '분쟁해결절차’를 정해놓고 있다. 한국-유럽연합 FTA의 경우 평상시에는 정부 간 협의를 진행하다가 추가논의가 필요할 경우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소집하게 된다.

전문가 패널 소집과 분쟁해결절차

그러나 정부 간 협의와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논의로도 충분치 않다고 판단될 경우, 쌍방 중 어느 한쪽이 '전문가 패널' 소집을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양 당사국과 제3국이 각각 6명씩 제시한 전문가 후보 명단에서 3명의 패널을 2개월 내에 확정한 뒤, 90일 동안 사안에 대한 조사를 벌인 뒤 권고·조언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아래 그림)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전문가 패널 소집 요청은, 다툼(분쟁)의 수준이 꽤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고용노동부는 간단한 보도자료 하나 내어놓았을 뿐이지만, 유럽연합 홈페이지에는 한국-유럽연합 FTA 내용, 효과, 그간 논의과정 전체와 함께 전문가 패널 소집 요청의 의미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래 그림)









▴위 페이지의 URL 주소 : http://trade.ec.europa.eu/doclib/press/index.cfm?id=2044




전문가 패널 소집 요청이 있었던 7월 4일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일 전이다. 분쟁해결절차에 따르면 2개월 내, 그러니까 9월 초에는 전문가들 선정이 완료되었을 것이다. 전문가 패널들의 보고서는 구성 후 90일 뒤인 12월 초·중순에는 완료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사안에 대해 바로 지금 한창 전문가들의 조사·검토가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떤 인물이 전문가 패널로 선정되었는지, 그리고 유럽연합의 요구가 무엇이고 어떤 의제가 주로 논의되는지에 대해 한국 정부로부터 들을 수 있는 얘기가 거의 없다.

쟁점과 요구 분명히 밝힌 유럽연합

그런데 유럽연합은 자신들의 요구를 이미 7월 4일에 모두 공개했다. 유럽연합 홈페이지 기사에 들어가면 'Republic of Korea – compliance with obligations under Chapter 13 of the EU–Korea Free Trade Agreement'라는 7월 4일자 문서를 PDF 파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바로가기 : 유렵연합 홈페이지)

이 문서가 바로 유럽연합의 전문가 패널 소집 요청서에 해당한다. EU는 이 문서에서 그동안 정부 간 협의를 통해 노동기본권 보장 문제를 논의했으나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이에 전문가 패널 소집을 요청하면서 문제가 되는 한국의 노동관계법 4가지를 적시하고 있다. (아래 그림. 붉은 밑줄은 필자가 그은 것)


내용을 읽어보면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다. 첫 번째 문단은 한국의 노동조합법 제2조 1호의 ‘근로자(worker)‘ 개념이 너무 협소하다는 문제제기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는 결사의 자유 범주에 화물운송 노동자 등 자영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해고자와 실업자들도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게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년 넘게 외쳐온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 요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를 치유하기 위한 방법도 똑같다. 노동조합법 제2조 1호의 ‘근로자’ 개념을 조금만 확장하면 된다. 실업자·해고자들의 결사의 자유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

두 번째 문단은 더 놀랍다. 노동조합법 제2조 4호의 라)목을 지적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건 영어로 ‘가나다라’를 열거할 수 없으니 라)목을 알파벳의 네 번째 문자인 d)로 표현한 점이다. 이 조항은 ‘근로자가 아닌 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노조 아님 통보를 할 수 있도록 한 조항, 그렇다. 박근혜 정권이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들었던 바로 그 조항이다.

세 번째 문단은 노조법 제23조 1항으로 노동조합 임원을 ‘조합원’ 중에서 뽑아야 한다고 명시된 조항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문단 모두 ‘근로자’ 개념이 너무 협소하니까 ‘근로자가 아닌 자’가 너무 넓어지게 되고, 그러다보니 ‘조합원’ 범위가 너무 좁혀진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만악의 근원인 노조법 제2조 1호 ‘근로자’ 개념을 확장하라는 요구로 모아진다.

마지막 문단은 노조법 제12조의 1항 내지 3항, 노조법 2조와 10조 등을 모두 묶은 내용으로,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는 노동조합 설립신고 제도를 문제삼고 있다. ILO 결사의 자유 취지에 맞게 ‘신고제’로 바꾸라는 것. 모든 내용이 그동안 ILO가 한국 정부에 권고해온 내용과 일치한다.

유럽연합과 ILO 요구 완전히 무시한 노동개악안

그럼 유럽연합 요구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태도는 무엇일까? 그 단면이 지난 3월 18일, 경사노위 공익위원 기자회견 자리에서 드러났다. ILO 협약 관련 경사노위 논의를 진행하던 당시 공익위원 대표(간사) 역할의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런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조 결성권을 보장하라는 ILO 권고도 있었지만 경영계 요구로 공익위원안에 반영되지 않고 장기 과제가 됐다."

이게 무슨 얘길까? ILO가 수차례 특수고용 노동기본권 보장을 권고했지만, 자본가들이 반대하니 논의내용에서 빼줬다는 얘기다. 노동조합법 제2조 1호를 개정해 화물운송기사를 비롯한 특수고용 노동자들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 유럽연합 요구의 핵심인데 자본가들을 위해 이 요구를 일찌감치 무시하기로 했다는 얘기이다.

그뿐이 아니다. 지난 9월말 국무회의에서 ILO 협약 비준동의안과 함께 의결해 국회로 보낸 노동조합법 개정안은 더 심각하다. 노조법 2조 1호 ‘근로자’ 개념을 확대하는 개정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노조법 제2조 4호 라목의 경우 폐지하지 않고 단서조항만 삭제했다. 해고자·실업자의 경우 노조 가입은 가능하지만 각종 노조활동에 황당한 제한을 뒀다.

노조법 제23조 1항에 노조 임원 출마자격을 조합원으로만 제한한 것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실업자·해고자의 경우 사업장 단위로 조직된 노동조합의 경우 아예 임원으로 출마조차 하지 못하도록 금지해 버렸다. 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노조법 제17조까지 개악시켜 임원은 물론이고 대의원으로 출마조차 못하는 안을 제출해 버렸다.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는 노동조합 설립신고 제도 개선 역시 문재인 정부는 완전히 무시했다. 입법안 어디를 뜯어봐도 이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EU가 공개한 법·제도 개선 요구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반응한 입법안을 비교해보면 위 표와 같다. 시쳇말로 EU 요구를 ‘개무시’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EU 의도에 맞서는 길 : 조건 없는 ILO 협약 비준

그럼 한국 정부에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는 유럽연합은 노동자들 편인 걸까? 그건 도널드 트럼프가 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 멕시코 노동자를 위해서 단체교섭권 보장을 요구한 게 아닐까라는 착각이나 다름없다. 유럽연합이 원하는 것은 한국 노동자들 권리보장이 아니다. 한국 노동자들 권리 박탈을 근거로 무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와의 논의를 이끌고 있는 유럽연합의 통상 담당 집행위원 세실리아 말스트롬. 그녀가 2017년 9월에 서울에서 열린 한국-유럽연합 비즈니스 포럼에서 한 연설문 제목은 'Open trade is key to progress(개방 무역정책이야말로 진보를 향한 열쇠)'였다. 즉, ILO 협약 비준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한국 정부를 몰아붙여 ‘더 많은 무역 개방’을 끌어내려는 것이다.

그런 시점에 문재인 정부는 또다른 무역 분쟁을 끌어올 수도 있는 일을 벌이고 있다. 유럽연합이 요구하는 노동법 개정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의 입법안을 내놓았다. ILO가 권고해온 내용은 쏙 뺀 채, 오히려 ILO 협약과 충돌하는 노동개악안을 밀어붙인다.

이걸 국회에서 통과시킨다 한들 유럽연합이 “잘했다”고 칭찬해줄까? 절대 아니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자신의 요구와 정반대 내용을 입법했기 때문에 물 밑으로는 ‘더 많은 개방’을 요구하면서 겉으로는 ILO 협약 원리에 맞게 법을 다시 고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협약과 충돌하는 입법을 밀어붙일 경우 유럽연합과의 무역 분쟁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9월말에 의결한 노동개악 입법안을 전면 철회하고, ILO 핵심협약을 조건 없이 비준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법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ILO 협약 비준조차 하지 않은 ‘노동후진국’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했다. 수차례 협약 비준을 약속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뤄온 ‘양치기 소년’이 되어 있다. 이번 기회가 그 오명을 벗어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더 많은 개방’이라는 유럽연합 물밑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훌륭한 명분도 되어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재벌의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노조법 2조 개정과 특수고용 노동기본권을 외면하고, 자본가들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해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을 강행한다면? 문재인 정부는 재벌과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존중은 ‘씹어’먹고 국익과 국격은 내다버린 정권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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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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