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5

‘골방서생’ 김훈, 왜 생명과 안전을 말하는지



‘골방서생’ 김훈, “사람들 몸 터지는 소리”에 마이크 잡다 - 경향신문




김훈 작가가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 최근 자신이 왜 생명과 안전을 말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생명안전 시민넷 제공
김지환 기자2019.10.03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훈 작가는 지난달 27일 “산업 재해로 현장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교육을 잘 못 받고, 말하자면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라며 “나는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반드시 불평등의 구조와 계급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이날 서울 중구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 열린 ‘생명안전 시민이야기 마당’에서 “가령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사람들이 이 나라의 돈이 많고 권세가 높은 집 도련님들이 그렇게 죽었다면 이 문제는 진즉 해결되었다. 절대 이렇게 방치가 안 된다”고 말했다.



생명안전 시민넷은 “문필가 김훈이 펜과 마이크로 생명과 안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무엇이 골방서생이라 자평하던 그이를 나서게 하는지 직접 들어보고 대화를 나눈다”며 이번 행사를 소개했다.


김 작가는 “왜냐면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식을 기르는지 우리가 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우리 다 안다”며 “자기 자식이 떨어져 죽었으면 이것을 당장 해결했을 것이다. 재벌을 압박하든지 정치권력을 동원하든지 행정능력을 동원하든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이런 문제는 해결 안 한다. 왜냐면 그것은 계급적인 억압적인 구조가 작용되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할 수가 없다. 내년에 2400명 죽고 후년에도 2400명 죽는다. 이런 구도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김 작가는 산재를 진보, 보수의 틀로 갈라서 얘기하는 것은 “정말 무지몽매”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산재 문제는 진보의 문제가 아니고 보수의 문제도 아니다”며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진보적인 사람이 아니다. 보수적인 사람도 아니다. 그건 한 인간일 뿐이다. 인간의 문제”라고 말했다.


김 작가는 “이것이 매우 시급한 일이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이것은 미뤄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내년에 해도 좋고 후년에 해도 좋은 일이 아니다. 매일 6명이 떨어져 죽어야 된다”고 호소했다. 이어 “퍽퍽퍽 몸통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집에 누워 있으면 사람들 몸 터지는 소리가 매일매일 들린다. 이렇게 시급한 일이 없다”고 했다. 아래는 김 작가의 이야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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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김훈입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해서 메모는 해왔는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생명안전 시민넷’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모임의 초창기(2017년 11월23일)부터 대표를 맡았습니다. 제가 앞장서서 선도적으로 이끌거나 끌고 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에요. 미는 대로 밀려가는 사람이고 앞서서 끌고 나가는 사람은 아니에요. 밀면 밀려가는 사람이라도 좀 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밀어도 안가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보다는 조금 낫겠구나 싶어서 오늘도 떠밀려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나는 왜 생명과 안전을 이야기하는가’라는 주제로 오늘 말할까 합니다.


아까 (송경용) 신부님이 말씀하셨듯이 우리나라는 1년에 2000명 이상이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잃어야 됩니다. 나는 전에 이런 문제가 굉장히 추상적이고 남의 얘기라 생각했어요. 나와 직접 관련 없는 남의 얘기라 생각했어요. 왜냐면 내가 그런 산업현장에서 죽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이 모임의 대표를 맡고 나서 보니까 이 문제는 정말 시급히 해결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될 이 나라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시급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하루에 6명 이상 떨어져 죽고 몸이 터져 죽잖아요. 그럼 우리가 무슨 도로를 만든다든지 남북통일을 한다든지 무슨 터널을 뚫는다는 것은 천천히 하면 돼요. 당장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러나 이 문제는 매일매일 6명 이상이 떨어져 죽는 거예요. 몸이 터져 죽고. 노동자들의 몸이 터지는 소리가 퍽퍽 들리는 거예요 매일매일. 그런데 이것을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지요. 내년에 해도 되고 후년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고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지요. 왜냐면 매일매일 죽어나가니까. 내년에 2000명 죽고 후년에 2000명 죽고 해마다 해마다 죽어야 그렇게 죽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정말로 시급한 문제이죠.


그런데 이런 시급성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거죠, 우리 사회에는. 2000명 이상이 해마다 죽으니까 이 숫자가 일상화되고 만성적인 생활이 되어 버린 거죠. 거기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한 것이죠. 제가 일산에 사는데 우리 동네에 러브호텔이 굉장히 많아요. 처음에는 신도시 초창기에는 많은 주민들이 러브호텔에 반대해서 시위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러브호텔이 더 많아졌어요. 왜 반대하지 않느냐면 이것이 일상화되어 버렸어요. 우리 동네는 본래 이러한 곳이다 라고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지금. 아무도 그것에 저항하지 않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2400명이라는 사망자의 숫자도 이제는 일상화되어가지고 사람들에게 아무런 두려움이나 무서움을 일으키지 않는 거예요. 우리 사회는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고 앞으로 계속 이렇겠다 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생활 정서가 되어 버린 것이에요. 아무도 거기에 대해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이죠. 늘 의례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둔감해지고 인간이 자기의 주변과 남의 고통이나 남의 슬픔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가지고 자기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죠. 그 감각이 마비되어 있어요. 생명, 타인과 세계에 대한 감수성과 감각이 마비되어 있는 것이죠. 아마 이런 문제가, 현 상황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더 어렵게 작용하는 것이죠. 사람이 감수성이 마비되는 것은 정말로 큰 인격적인 비극입니다. 어떤 감각이 없는 사람은 정의나 불의를 알 수 없어요. 정의나 불의라는 것이 어떤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추상적 관념이 아니에요. 인간의 감각으로 깨달아요. 감각. 딱 보면 ‘이것은 옳지 않은 거다’ 이런 감각이 없는 사람은 가령 정의나 불의를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은 결국 아무것도 모르게 되는 거죠.


우리가 컴퓨터를 쓰고 인터넷을 쓰고 그런 문명 밑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세계를 기호를 통해 받아들여요. 기호나 문자로 된 텍스트, 아니면 영상화된 텍스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세계와 인간을 직접 맞대면하는 느낌이 점점 쇠퇴되어 가요. 항상 세계로부터 차단되어 있거나 간접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죠. 이 세상을 자기가 직접 손으로 주무르거나 끌어않지 않는 거죠. 기호나 이미지, 남이 주는 메시지를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죠. 가령 노동을 하다가 몸이 터져 죽은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알 수 없는 것이죠. 그것을 자기의 감수성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이죠. 그런 것을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이런 안전, 생명의 문제가 다만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안전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그런 예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조적, 제도적인 문제입니다. 왜냐면 이 사회가 점점 양극화되고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기 때문에 이런 양극화의 구도, 결국 억압과 차별의 구도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죠. 이런 것이 사회현상, 사회 구조로서 정착되어 버린 것입니다.


산업 재해 현장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교육을 잘 못 받고, 말하자면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죠. 나는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반드시 불평등의 구조와 계급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가령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사람들이 이 나라의 돈이 많고 권세가 높은 집 도련님들이 그렇게 죽었다면 이 문제는 진즉 해결되었어요. 절대 이렇게 방치가 안됩니다. 왜냐면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식을 기르는지 우리가 알잖아요. 자기 자식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우리 다 알잖아요. 자기 자식이 떨어져 죽었으면 이것을 당장 해결했을 것이에요, 당장. 재벌을 압박하든지 정치권력을 동원하든지 행정능력을 동원하든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문제는 해결 안 해요. 왜냐면 그것은 계급적인 억압적인 구조가 작용되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앞으로도 할 수가 없어요. 내년에 2400명 죽고 후년에도 2400명 죽어요. 이런 구도가 되어 있는 것이죠.


매년 2400명 죽는다. 이런 구도가 되어 있다. 책임 있는 사람들은 다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고. 김용균은 개인의 과오, 개인의 잘못으로 죽은 것이다고 했어요. 구의역 사고도 처음에는 개인의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거다 이렇게 얘기를 했지요.


오늘 아침에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의 고독사, 노인이 혼자 죽은 것, 고독사가 세계 최고라고 합니다. 올해 고독사한 사람이 2400명이라고 해요. 노인이 혼자 죽은 사람이. 5년 전보다 2배 가까이 높아요. 한 해에 2400명이 혼자 죽는데 이 중에 70~80%가 기초생활수급자, 돈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죠. 이 중에서 30% 정도가 사인을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병으로 죽었는지 범죄의 피해자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죽어 나간다는 것이죠. 이런 고독사의 배후에도 역시 계급의 문제가 있는 것이죠. 불평등 구조에 의한 억압과 차별과 학대의 구조가 이렇게 고착화되는 것이죠.


이런 나라는 이 세상에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해요. 오직 대한민국뿐이에요, 오직 대한민국. 딴 나라는 이런 나라가 없어요. 밥을 잘 먹고 국민소득이 꽤 높은 나라에서 해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2400명이 고독사하고 2400명의 근로자들이 산업현장에서 죽는 것이죠. 아마 2400명이 훨씬 더 될 거 같아요. 왜냐면 정부의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고가 또 많이 있으니까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결국 불평등의 구조 속에서 벌어지는 참사라는 것을 저는 시민단체의 일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의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감각이 없는 것이죠. 구체적인 감각. 자기의 인간의 생의 체험으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마비되어 있는 것이죠.


제가 좋아하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있지요. 나는 그 말 한마디를 우리 같은 인간이 실천할 수 있으면 인류의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지경입니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은 나는 ‘사랑’이 아니고 ‘이웃’이라고 봅니다, 이웃. 바로 옆집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사랑을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보라는 것이죠. “나는 미국에 있는 학대 받는 흑인들을 사랑한다.” “시리아 난민을 난 사랑한다.”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흑인 어린이들을 나는 사랑한다.” 이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네 이웃의 네 옆집에 사는 한 구체적인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너의 이웃을 사랑하지 엉뚱한 소리하지 말고. 그런데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워요. 이웃은 항상 싸우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나 국가나. 나라가, 인접 국경을 마주 대고 있는 나라가 수천년 동안 싸워요. 한국 중국 일본 싸우는 것처럼. 싸움을 안 한다면 안 하는 것이 우선이고.


유럽에서는 작은 나라들이 국경을 마주 대고 있지요. 특히 동유럽 같은 데는. 수천년 동안 전쟁이 나고 그랬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약자들끼리도 조금 더 강하면 옆에 있는 더 약한 자들을 지배하는 것이죠. 그래서 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의 이웃의 사랑하라. ‘이웃’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죠.


내가 지난번에 테레사 수녀님이 쓰신 글을 봤더니 테레사 수녀님이 인도 콜카타에서 거리에서 버려진 애들을 데려다 키우잖아요. 인도는 가난하고 그러니까 애를 나으면 죽지 않으면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요. 수녀님이 데려다 씻기고 기르고 죽은 애들은 장사를 치르고 그렇게 살아오셨지요. 세계의 온갖 사람들이 수녀님을 인류의 어머니이고 우리는 말로 찬사를 하며 인도를 구원하신 인류애로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이시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 테레사 수녀님은 나는 인류애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얘기했어요. 나는 인류를 구원한 적도 없고 인류를 사랑한 적도 없다. 나는 쓰레기통에 버려져있는 ‘그 구체적인’ 아기를 데려다 기른 적은 있지만 너네들이 말하는 인류애라든지 인간애라는 이런 광범위한 개념은 모르겠다 이거죠. 그 글을 보니 이 분은 진짜 성인이구나 성인.


사랑의 구체성을 실천할 수 있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기의 고통을 자기가 한 인간으로서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감각을 통해서 개인의 체험을 넘어서는 것이, 남의 고통을 볼 줄 아는 것이, 자기 자식 자기 가족만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에는 부모들이 모성애, 부성애라는 것도 있어요. 이것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긴 하지만, 이 모성애와 부성애라는 것이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렇게 큰 장애물이 없어요. 모성애와 부성애가. 인간이 자기 자식을 그렇게 기르는 것은 개돼지랑 똑같은 거예요. 개도 자기 새끼를 핥아서 키웁니다. 돼지도 자기 새끼가 싼 똥을 먹어요. 자기 새끼를 깨끗하게 키운다고. 그런데 인간의 자식 사랑이 개돼지를 넘어서려면 이웃집 자식이 보여야 되는 거예요. 공동체 전체의 자식들을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식만 데리고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하고 있으면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금수의 사랑과 똑같은 것이죠. 이런 것들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회를 변혁시킬 수가 없고 또 이런 산업재해 문제도 해결하기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나는 원래 아무런 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는 그냥 상식적인 인간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런 단체에서 일하니까 내가 진보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진보주의자가 되었어요 갑자기.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진보고 관심을 안 가지면 보수가 아니에요. 그것은 정말 무지몽매한 짓거리를 하는 거죠 입으로 말로. 나는 진보나 보수라는 말이 하도 말 같지가 않고 그것이 인간의 생의 진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쓰레기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가지고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말을 하면서 그 쓰레기 같은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나. 오늘 처음,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사용한 거예요. 글에는 앞으로도 안 쓰려고 합니다. 그런 썩어빠진 단어를 나는 쓰지 않으렵니다.


나는 아무 주의자도 아니에요. 사람들은 나를 보수적인 사람으로 분류하더라고요. 난 그 분류에 저항하지 않아요. 왜냐면 내가 진보적인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보수적으로 분류되는 것에 저항감이 없고 내 스스로도 보수적인 측면이 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보수주의자는 아니에요. 그것만이 원칙이고 모든 세상의 표준을 거기다가 들이대고 이것이 잣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죠.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틀리지 않은 거예요.


그럼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냐면,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경험에 의해 판단하는 사람이에요. 지나간 경험에 의해서 앞날을 판단하는 것이 보수적인 사람들의 사고의 패턴입니다.


반면에 진보적인 사람들은 미래에 있을 가치, 미래에 있을 희망, 그런 것들 중심으로 판단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적대하는 이념의 개념으로 갈려 서서 서로 맞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산업재해)를 진보와 보수의 틀로 갈라서 얘기하는 것은 정말 무지몽매한 거예요. 무지몽매하고 그런 사람들을 내가 보면 목에 짧은 목줄로, 개를 줄로 묶잖아요. 짧은 목줄로 이념이라는 기둥에 묶여가지고 서로 마주 보면서 짖어대는 것 같아요. 짧은 끈에 묶여 있는 인간들 같아요. 이 문제는, 산업재해 문제는 진보의 문제가 아니고 보수의 문제도 아니에요.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진보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보수적인 사람도 아니에요. 그건 한 인간일 뿐이죠 인간의 문제예요.

그리고 가령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보수적일 사람일 뿐, 안정된 세상을 만들고, 불안하지 않은 세상, 흔들리지 않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게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는 내가 지나간 경험에 의존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그랬잖아요.


나는 이 산업재해 문제를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당장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 방법은 무엇이냐면 그 행위 주체가 되는 사업주들이 있잖아요 대기업, 대기업들이 마음먹으면 되는 거예요. 마음 딱 먹으면 돼요.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를 똑바로 만들자, 튼튼하게 만들고, 사고 나지 않게 하자 하면 되는 거예요. 비계를 허술하게 만들어요 다들. 고층건물 지을 때. 왜냐면 일회용 소모품, 한번 짓고 나면 걷어 내니까 다시 쓸 물건 아니니까 허술하게 하는 것이죠. 그것을 똑바로 튼튼하게 짓자고 마음을 먹으면 되는 것이죠. 그럼 그날 해결이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절대 그런 방식으로 해결을 안 해요. 내가 지나간 삶의 경험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죠.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 사업주들이, 인간이 도덕적으로 반성을 해서 크게 깨우쳐 가지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에요. 세상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지나간 70년의 경험으로 보니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기다린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에요. 되지도 않고.


우리는 항상 고통을 분담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고통을 분담한다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해결 방식입니다. 그 이상 아름다운 길이 없지요. 그런데 한국 역사는 고통을 분담해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거의 없거나 매우 빈약한 거죠. 그런 역사적 경험이 없는 사회가 갑자기 도덕적 각성을 이뤄가지고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안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자꾸 문제를 제기하고 들이박고 들이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몰아붙이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몰아붙이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것은 힘이 있는 것은 여론이죠. 여론을 일으키고 끝없이 주의를 환기시키고 문제를 제기하고, 그러고 또 그 문제를 정치적으로 가져가서 입법과 제도를 통해서 이것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압박을 하고 포위를 해 들어가지 않으면 이 문제는 해결할 길이 없는 것이죠. 이것이 매우 시급한 일이다 하는 것을, 인식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것은 미뤄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년에 해도 좋고 후년에 해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매일 6명이 떨어져 죽어야 됩니다.


퍽퍽퍽 몸통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나는 집에 누워 있으면 사람들 몸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매일매일 들리는 거예요.


이렇게 시급한 일이 없는 것이죠.


이것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다들 힘을 모아주시길 바라면서


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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