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3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2): 우리가 아는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2): 우리가 아는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1,400년 이슬람권의 역사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2): 우리가 아는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by 대체로 무해함 katib 2019.09.24
1. 꾸라이쉬 부족이 무역을 하긴 했을까?
지난 글에서는 이슬람의 사회경제적 기원 가설, 즉 무역 중심지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메카에서 이슬람이 일종의 사회 개혁 운동으로 등장했다는 통념의 문제점을 소개했다. 패트리샤 크론은 이 가설을 뒷받침할 사료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며 메카 무역에 대한 기존의 통념은 실제 역사적 증거보다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가 변화 없이 항상 같은 상태로 존재했다는 잘못된 가정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남부 아라비아의 예멘이 '행운의 아라비아'로 불리며 지중해 지역에 몰약과 유향 등 사치품을 활발히 교역했던 시절은 로마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서기 1세기 경, 즉 이슬람이 일어나가 약 500년 전이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연구자들은 서기 1세기 아라비아의 상황을 서기 6세기의 아라비아와 비슷하다고 가정함으로써 메카 무역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냈고, 이 신화는 여러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와트와 로댕송이 메카 무역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무로부터 지어낸 것일까? 그러나 무슬림들이 남긴 기록에는 이슬람 이전 꾸라이쉬 부족이 상업과 무역에 종사했다고 언급된다. 특히 무함마드의 증조부인 하쉼(Hashim)이 메카에 기근이 돌자 낙타 대상을 이끌고 시리아로 가 대량의 밀을 수입해와 메카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처럼 와트와 로댕송이 과장은 했을지언정 아예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이슬람 이전 꾸라이쉬 부족의 무역과 하쉼에 대한 무슬림들의 기록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면 어떨까? 크론의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기원』 은 바로 우리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와 무함마드의 생애, 초기 무슬림 공동체의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사료인 무슬림들의 기록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2. 무엇이 진짜인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와 무슬림 공동체의 초기 역사를 보여주는 사실상 유일한 동시대 사료는 바로 코란이다. 꾸라이쉬 부족의 상업 활동에 관한 최초의 언급 역시 코란 106장, "꾸라이쉬의 장(Surat Quraysh)"에 나타난다. 꾸라이쉬의 장은 총 4절로 구성된 매우 짧은 장이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한국어 번역은 최영길의 『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을 참고했다.
1. 꾸라이쉬 부족의 보호 (일라프, īlāf)를 위해
2. 하나님께서는 무역상으로 하여금 겨울과 여름에 안전하게 여행하도록 하였느니라
3.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집의 주님만을 경배해야 하느니라
4. 주님께서는 그들을 굶주림에서 배불려 주시고 공포로부터 안전케 하여 주시니라
이게 다다. 꾸라이쉬 상인들이 어디를 오가며 교역했는지, 무얼 사고 팔았는지, 얼마나 많은 이익을 거두었는지 위 4줄의 문장은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한국어 번역에 나타난 "무역상"은 그저 번역일 뿐, 코란 본문에는 그저 "꾸라이쉬 부족의 여행"이라고만 명시되어 있을 뿐 상행위나 무역, 대상을 의미하는 단어나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 꾸라이쉬 상인들의 무역 활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실은 코란 본문이 아니라 후대 무슬림들이 "꾸라이쉬의 장"을 해석하며 남긴 주석에 토대를 둔다.
문제는 후대 무슬림들이 이 구절에 대해 남긴 주석과 해석이 다양하며 때로는 서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꾸라이쉬 부족들은 겨울과 여름, 어디로 무엇을 위해 여행했을까? 어떤 학자들은 추운 겨울에는 해안을 따라 더운 여름에는 내륙을 따라 시리아로 갔다고 말한다. 최영길의 번역본에는 꾸라이쉬 부족이 여름에는 시리아로 겨울에는 예멘으로 갔다고 말한다. 또다른 사람들은 반대로 여름에 예멘으로 겨울에 시리아로 갔다고 말한다. 일부는 시리아와 예멘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 아나톨리아 반도, 이라크까지 갔다고들 한다. 이 모든 해석이 다 맞을 수는 없다. 고속도로와 자동차라도 있지 않는 한 계절에 시리아를 가는 동시에 예멘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주석가들마다 꾸라이쉬 부족이 언제 어디로 여행을 떠났는지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면, 대체 누구의 해석을 믿을 수 있을까?1
3절에서 코란은 여행과 신에 대한 경배를 연결하고 있다. 여행과 경배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도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어떤 학자들은 신의 가호 덕분에 꾸라이쉬 부족이 생필품과 식량을 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신의 은총 덕분에 다른 부족들과 외부 상인들이 메카로 찾아오게 만들어 꾸라이쉬 부족이 고되고 험한 여행을 하지 않아도 식량을 공급받고 메카에 머물면서 신을 경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꾸라이쉬 부족은 그렇다면 여행을 한 것인가, 하지 않은 것인가? 신이 꾸라이쉬 부족을 굶주림에서 구했다는 4절은 꾸라이쉬 상인들이 외부에서 식량을 수입해왔다는 말일까 아니면 외부 상인들이 메카로 찾아와 식량을 공급했다는 뜻일까?2
꾸라이쉬 부족의 "보호", 즉 "일라프"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다. 메카에서 시리아로 가는 길에 살던 부족과 꾸라이쉬 부족 사이의 안전 보장 협정이라는 해석, 또는 꾸라이쉬 부족의 보편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약속이라는 해석, 꾸라이쉬 부족이 메카에 머물 수 있도록 여행의 어려움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는 해석, 꾸라이쉬 부족이 살던 메카의 안전 보장이라는 해석, 꾸라이쉬 부족이 성지 카바의 주민이었기에 존경과 보호를 받았다는 해석 등등 이 "보호"가 무엇을 말하는 지도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심지어 이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3 만약 "일라프"라는 개념이 정말 아랍 무슬림들과 코란 주석가들에게 친숙한 개념이었다면 이 단어의 정확한 발음과 의미에 관한 다양하고 상반된 해석은 무엇 때문인가? 오히려 아랍 무슬림에게 꾸라이쉬의 "일라프"라는 개념은 들어보지 못한 낯선 무언가였기에 이러한 혼란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4
한 예로, 이븐 알 칼비(Ibn al-Kalbi, 819년 사망)는 무함마드의 조상인 하쉼이 시리아로 가 아랍 전통 요리를 바쳐 비잔틴 제국의 황제의 환심을 샀다고 말한다. 그 덕분에 하쉼과 꾸라이쉬 부족은 비잔틴령 시리아에 천과 가죽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으며, 시리아와 메카 사이 살던 부족들과 보호 조약("일라프")를 체결했다. 이후의 그의 세 형제들은 각각 페르시아, 예멘, 에티오피아로 가 같은 무역 허가를 얻어냈고, 이들 덕분에 메카는 부유해졌다.5
반면에 이븐 하빕(Ibn Habib)이 인용하는 기록은 완전히 반대 이야기를 전한다. 심지어 이븐 하빕이 전하는 이야기의 출처는 이븐 알 칼비의 아버지인 알 칼비다. 이븐 하빕, 즉 알 칼비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메카 꾸라이쉬 부족은 1년에 두 번 시리아 또는 시리아와 예멘을 오가며 교역했다. 그러나 오랜 여행으로 꾸라이쉬 부족이 신에게 예배할 시간과 여유를 내지 못하자 신은 그들에게 무역과 여행을 중단하고 메카에 머물러 신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그 대신 신은 아라비아의 다른 부족들이 메카로 찾아와 식량을 공급하게 만들었다. 이븐 알 칼비가 말하는 페르시아, 시리아, 예멘, 에티오피아를 아우르는 꾸라이쉬 부족의 거대한 교역망은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는 사라진다. 도대체 어떻게 부자(父子)가 같은 사건을 두고 이렇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6
이처럼 후대 무슬림들은 코란 106장을 서로 다르게 때로는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이 모든 해석들을 받아들인다면 꾸라이쉬 부족은 시리아로, 또는 시리아와 예멘으로, 또는 시리아와 에티오피아로, 또는 시리아와 에티오피아와 예멘으로, 또는 시리아와 에티오피아와 예멘과 이라크로 여행했다. 또한 여름에 시리아로 겨울에 예멘으로 간 동시에 여름에는 예멘으로 겨울에는 시리아로 갔다. 신은 꾸라이쉬 부족이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할 수 있도록 여행을 떠나게 만든 동시에 외부 상인들이 메카에 찾아오게 만들어 꾸라이쉬 부족이 여행의 짐을 덜고 오직 신만을 경배하는 데에 집중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꾸라이쉬 부족이 여행을 떠났다는 말인가 그러지 않았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 어디로 가서 거래했다는 말인가? 후대 무슬림들이 제시하는 수많은 상반된 해석은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할 뿐, 이슬람 이전 꾸라이쉬 부족의 무역 활동에 대해 그 어떤 분명하고 명확한 그림을 보여주지 못한다.
크론은 질문을 던진다. 무슬림들이 남긴 코란 해석과 주해가 혼란만을 준다면, 과연 이 기록들을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와 무슬림 공동체의 초기 상황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사적 자료라고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기록들을 통해 실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무슬림들의 기록을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와 초기 무슬림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서 신뢰할 수 있을까? 크론의 답은 "아니오"다.7 크론은 코란 구절을 둘러싼 자세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기록이 코란에 언급되지 않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사료가 아니라 코란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창작된 내용에 가깝다고 본다.8
꾸라이쉬 부족의 교역을 포함하여 무함마드의 생애, 초기 무슬림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함마드가 고아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코란에서는 무함마드가 고아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크론이 묻듯이 "무함마드는 (후대 무슬림들이) 코란을 부연 설명하는 과정에서 고아가 된 것은 아닐까?"9 바히라(Bahira)라는 기독교도 수도자가 어린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 역시 유명하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특별한 지위를 예언한 사람은 기록에 따라 다르다. 어떤 기록에서는 아라비아의 이교도 예언자가, 다른 기록에서는 에티오피아 기독교도가, 또다른 기록에서는 유대교 랍비가 예언했다고 나온다. 심지어 무함마드가 바히라 - 또는 이름 모를 기독교도 수도자 - 를 만난 장소도 기록에 따라 다르다. 무엇이 진짜인가?10 우리는 부족 사이의 상호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메디나 사람들이 끝없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이슬람으로 받아들였다고 알고 있다. 이는 이븐 이스하크(Ibn Ishaq, 767/768년 사망)가 남긴 무함마드의 전기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븐 이스하크는 동시에 무함마드의 헤지라 직전 메디나 사회가 이븐 우바이라는 인물의 강력한 권위 아래 복종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븐 이스하크는 헤지라 직전 메디나가 권력 공백에 따른 정치적 혼란 상황이라고 설명하는 동시에 메디나 사회가 한 명의 강력한 통치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말한다. 무엇이 진짜인가?11 우리에게는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전하는 사료들을 교차검증할 다른 자료가 없다.
정말 드물게도 무슬림들의 기록과 교차검증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 외에 존재하는 역사적 자료들은 오히려 무슬림들의 전통적 기록이 지닌 신뢰성을 더욱 의심하게 만든다. 1956년 팔레스타인의 키르바트 알 미르드라는 곳에서 7세기 중반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파피루스 조각이 하나 발견되었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 파피루스 조각에는 바드르 전투의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파피루스 기록은 무슬림들이 "무하람 달(즉 이슬람력 1년의 1월)로부터 14달이 지난 뒤" 바드르라는 곳으로 향했으며, "무하람으로부터 18달이 지난 뒤 바드르에서 만났다"라고 전한다. 무하람을 포함하여 계산하면 사파르(이슬람력 2월) 달에서 주마다 1월(이슬람력 5월) 사이, 무하람을 빼고 계산하면 라비 1월(이슬람력 3월)에서 라잡(이슬람력 7월)이라는 날짜가 나온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전통적 해석은 코란 2장 214절과 2장 181절이 바드르 전투를 의미하는 구절이며 따라서 전투는 라마단(이슬람력 9월)에 일어났다고 본다.12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에 살이 더 붙기도 한다. 이븐 이스하크는 카라르(Kharrar) 지역을 약탈한 무슬림 원정대를 다루면서 매우 단편적이고 간략한 정보만을 제공한다. 지휘자가 누구였고, 몇 사람이 참여했으며 적과 만나지 않고 돌아왔다라는 이야기가 다이다. 그러나 그보다 약 60년 뒤에 활동했던 알 와끼디(al-Waqidi, 823년 사망)는 더욱 자세한 정보를 전한다. 그는 카라르 약탈이 이루어진 날짜와 원정 목적과 방식, 전략 등 이븐 이스하크가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세부사항을 말해준다. 훨씬 더 앞선 시대에 활동하던 이븐 이스하크도 모르던 정보를 와끼디는 대체 어디서 얻어낸 것일까? 와끼디가 무언가 새로운 자료를 찾아낸 것일까? 이야기꾼들이 과거의 간략하고 단순한 이야기에 새로운 정보와 주제, 내용을 덧붙인 결과는 아니었을까?13 크론은 8세기와 9세기에 살았던 무슬림 학자들 또한 무함마드가 활동하던 시대에서 약 1,300년이 지난 21세기에 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함마드의 시대와 단절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14
무함마드의 생애와 초기 무슬림 공동체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료라고 우리가 믿고 있었던 무슬림들의 기록 - 코란 주석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기기록을 포함하여 - 은 이처럼 신뢰할 수 있는 사료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 크론의 결론은 분명하고 충격적이다. 크론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까지 1차 사료로 간주해온 무슬림들의 전통적 기록 모두는 사실 듣는 이들에게 특정한 감정적 효과를 불러 일으키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15따라서 기록이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후대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면 그 기록 위에 세워진 이스람의 기원과 형성 과정에 대한 기존의 통념 역시 역시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3. 그러면 이슬람의 등장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
크론이 보여준 대로 뚜렷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메카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이슬람의 기원을 설명하는 원인이 될 수 없다면 대체 이슬람의 등장 배경과 원인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아라비아 반도 전체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일까? 크론은 책의 마지막 장을 할애하여 그녀 나름의 가설을 제시한다.
이슬람은 경제적, 환경적 제약으로 인해 안정된 국가 체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여러 부족들이 끝없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며 대립하던 사회에서 나타났다. 따라서 이슬람의 기원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 특히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에 존재하던 종교관의 맥락 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크론의 논지이다.16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의 다신교 신앙은 내세의 구원이나 사회 정의 또는 피조물에 대한 신의 사랑과 같은 추상적 가치를 추구하던 종교가 아니었다. 아랍인들은 숭배의 대가로 신들이 물질적 풍요와 번영, 전쟁에서의 승리와 같은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혜택을 베풀기를 기대했다. 따라서 신이 자신들의 기원에 응답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원래 믿던 신을 버렸고, 더욱 발전된 의학을 지닌 기독교도 수도사들이 베푸는 의료 혜택을 누린 아랍인들은 조상의 신들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따라서 이슬람은 상당수 아랍인들에게 어떤 종교적인 충격이나 영적인 혼란 없이도 확산될 수 있었다.17
<아라비아 남부에서 발견된 아랍 다신교의 신상>
출처: http://wathanism.blogspot.com/2013/04/totemism-animism-and-spirits-in-pre.html
아랍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코란과 무함마드의 신은 아랍인들에게 정복과 군사적 승리를, 아랍인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국가를 약속했다. 무함마드의 활동은 이처럼 처음부터 정치적이었고, 무함마드의 계시를 받아들임은 곧 그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함을 의미했다. 크론은 무함마드가 "사회 개혁자도 영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인물도 아닌, (아랍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을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설명한다.18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은 서로를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같은 집단으로 보았지만 정치적으로는 하나로 응집되지 않은 채 다양한 부족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무함마드는 모든 아랍인의 조상이자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의 신이야말로 아랍인의 진정하고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하며 그리고 아랍인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국가라는 전망을 제시하여 아랍인을 하나로 결속하는 데 성공했다.
오랜 세월 갈등과 충돌이 끝없이 반복되던 역사 속에서 약탈과 정복, 군사적 승리는 아랍 부족들의 핵심 생존수단이자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았고, 이슬람의 신이 요구한 지하드의 개념은 기존에 존재하던 아랍 부족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에 단순한 약탈을 초월하는 강력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19 무함마드는 그가 새로 세운 공동체에 대한 정치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에게 물질적 혜택을 계속해서 제공해야 했고 따라서 정복은 필수였다. 그를 따르던 아랍 부족들 또한 정복과 승리와 약탈을, 전리품과 부를 원했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신은 그들에게 정복을 명령했다. 크론은 묻는다. "이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가?"20
그렇다면 왜 하필 7세기에 무함마드라는 지도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왜 하필 아랍 부족의 통일과 군사적 성공이 7세기에 일어나고 가능했던 것일까? 크론은 바로 6세기 말과 7세기 초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했던 외세의 영향과 침투, 개입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이르러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동부 아라비아 반도와 예멘 그리고 시리아 사막에서 헤자즈까지 이르렀으며, 비잔틴 제국 또한 시리아 사막을 통해 서부 아라비아에 손을 뻗치는 동시에 동맹인 에티오피아를 통해서는 예멘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론은 "근대에도 아라비아 반도가 이처럼 외세의 영향력에 잠식된 적은 없었다"21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슬람은 침투해오는 외세에 맞서 그들 고유의 가치와 정체성, 문화를 지켜내기 위한 아랍인들의 저항이었다.22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6세기 말과 7세기 초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전쟁이 가져온 여파는 아라비아에도 닿았고
페르시아는 특히 아라비아의 해안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ile:Pre_Islamic_Arabia.PNG
7세기 아라비아에서 나타난 예언자가 무함마드 혼자는 아니었다. 무함마드 외에도 아라비아 중부의 야마마(Yamama)에서는 무사일리마(Musaylima)가, 예멘에서는 아스와드(Aswad)가 나타났으며 북동부 아라비아의 바크르 븐 와일 부족 사이에서는 사자(Sajah)와 같은 '예언자'들이 나타났다. 크론은 이들이 모두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강력한 지역에서 활동했음에 주목한다. 이들 역시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의 지배에 맞서 아랍인의 '독립'을 추구한 지도자들이 아니었을까? 코란에 분명히 나타나는 유대교의 영향은 비잔틴 제국에 깊은 반감을 지니고 있던 유대인들이 무함마드의 '저항 운동'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는 근거는 아닐까? 또한 크론은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에 도전한 주요 적들이 무사일리마, 아스와드, 사자 등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신의 계시를 받았음을 주장하는 '대립 예언자'였음에 주목한다. 전통적 다신교 신앙을 따르던 사람들의 저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전통적 신앙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쇠퇴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아라비아의 '대립 예언자'들 또한 무함마드의 방식을 모방하여 지배하고자 한 정치 지도자들이 아니었을까?23
그러나 결국 최후의 승자는 무함마드였다. 그가 가져온 계시와 지도, 그리고 승리와 독립, 번영의 약속 아래 결집한 아랍인들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고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시리아와 이라크를 아우르는 거대한 아랍 제국을 세우게 된다. 아랍 정복자들의 확산과 함께 그들의 신앙 역시 중동 각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이슬람이 중동의 지배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슬람의 등장과 성공을 가져온 원인은 메카 무역이 아니라 바로 외세의 침투에 맞서 주체성과 독립을 지켜내고자 한 아랍인들의 민족적 각성이었다.
4. 반응, 비판과 영향
도발적인 주장에는 늘상 그러하듯이, 크론의 파격적인 주장은 학자들 사이에서 상반된 반응을 일으켰다. 일부는 강하게 비판한 반면 다른 학자들은 크론의 논리적 치밀함과 설득력 있는 사료비판의 손을 들어주었다.
크론의 저작을 평한 학자들 대부분은 메카 무역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큰 중요성을 지니지 않았다는 크론의 주장을 수용한다. 크론이 보여준 치밀한 사료 분석과 엄밀한 방법론, 명료한 논리는 쉽게 반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이클 보너(Michael Bonner)는 크론의 방법론이 이슬람의 기원에 대한 기존의 통념이 얼마나 취약한 역사적 기반 위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고 강조하며 크론의 연구가 "몽고메리 와트의 예언자 전기 이래로 이슬람의 기원에 대해 논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24 이프티카르 자만(Iftikhar Zaman) 또한 학계가 메카 무역에 대한 기존 관점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프레데릭 팍스톤(Frederick Paxton), 도날드 리틀(Donald Little), 칼 패트리(Carl Petry), 존 완스브로(John Wansbrough) 역시 비슷한 견해를 드러냈다.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 이후 제랄드 하우팅(Gerald Hawting), 조나선 버키(Jonathan Berkey), 다니엘 브라운(Daniel Brown)와 같은 현대 연구자들은 메카 무역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흔들어 놓은 크론의 연구를 거론하며 무역과 경제적 성장 그리고 메카 사회의 변화와 이슬람의 등장을 연결짓는 와트와 로댕송의 가설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25 여전히 전통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프레드 도너(Fred Donner) 역시 "1970년대 이후의 연구는 동물 가죽이나 식량과 같은 평범한 일상 용품이 주로 거래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서술을 덧붙이고26 추천 도서를 소개하는 책 말미의 부록에서도 "메카가 국제 사치품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와트의 가정은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의 결정적인 도전을 받았다"고 명시한다.27
크론이 비판을 받는 부분은 메카 무역에 관한 논의보다는 그녀가 제시한 이슬람의 기원에 대한 가설이다. 메카 무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크론의 결론에 동의하는 학자들도 이슬람이 "아랍인의 민족적 각성"이 가져온 결과라는 그녀의 가설에는 비판적이다. 특히 자만은 그녀가 택한 방법론 상의 모순을 지적한다. 크론은 무슬림들이 남긴 기존 기록의 신뢰성을 전적으로 의심하는 동시에 무함마드의 활동과 이슬람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다시 무슬림들의 기록에 의존한다.28 초기 무슬림들이 보여주는 호전성과 정복 전쟁과 승리, 전리품에 대한 열망 역시 크론이 그렇게 비판하던 무슬림들의 전통적 사료, 즉 후대 무슬림들의 시각과 그들이 살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기록에 나타나는 내용이 아니던가? 자만과 마찬가지로 프레데릭 팍스톤(Frederick Paxton) 또한 크론 역시 그녀가 그렇게 비판하던 무슬림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기록의 부재와 불분명함 속에서 설득력 있는 - 또는 있어 보이는 - 설명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29
20세기 아라비아 베두윈들의 모습을 통해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의 종교관을 설명하는등 아라비아 사회를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은 고정적 실체로 간주하는 크론의 관점 역시 자만의 비판 대상이다. 실제로 크론은 신앙을 물질적 혜택과 직접적 도움과 결부하는 20세기 아라비아 베두윈들의 종교관을 7세기 아랍인들의 신앙에 대한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용한다.30 패트리는 이슬람의 확산과 성공을 영적 각성이 주는 호소력과 영향력을 배제한 채 아랍인들의 물질주의적 종교관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한다.31
한편 도날드 리틀(Donald Little)의 비판 대상은 크론의 어조와 서술 방식이다. 크론의 연구가 초기 이슬람 역사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는 크론의 서술 방식에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엿보인다고 비판한다. "신은 아랍인에게 다른 이의 여인과 아이들, 그들의 땅을 약탈할 권리가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명령했다. 지하드는 복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무함마드의 신은 아라비아 부족의 호전성과 탐욕을 숭고한 종교적 덕성의 반열에 올려두었다."32같이 무분별하고 지나치게 공격적인 서술이 불필요한 자극이라고 평가한다. 리틀이 보기에 이런 서술 방식은 의도를 분명히 전달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자극하기보다는 감정적인 논쟁과 분란, 특히 무슬림 독자들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무분별한 서술이다.33
휴 케네디(Hugh Kennedy)는 더욱 비판적이다. 그는 메카와 시리아 사이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정황 증거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 비록 서평에서는 그 정황 증거가 무엇인지 말해주지는 않지만 - 메카-시리아 무역의 존재 가능성을 원천 부정하기보다는 어떻게 무역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경제사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무슬림 사료에 대한 크론의 회의적 입장을 "역사적 허무주의"라고 비판한다. 케네디가 보기에 무슬림들이 남긴 기록은 여전히 이슬람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사료다. 연구자에게 필요한 태도는 사료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치밀한 분석이지 사료를 완전히 내다버리는 극단적인 자세가 아니다.34 이슬람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론만큼이나 도발적인 주장으로 유명한 완스브로는 꾸라이쉬 상인들이 시리아까지 가서 식량과 가죽을 파는 장사가 과연 합리적으로 가능했겠느냐라는 크론의 주장에 대해 경제적 동기 외에도 외부 지역과의 접촉 유지 및 상인들의 대외적 위신 강화와 같은 문화적 동기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그는 메카가 종교 중심지도 상업 중심지도 아니었다는 크론에 대해 고대 중동에서 종교활동과 상업활동이 결합되는 사례가 존재함을 들어 메카에서도 종교활동와 상업이 공존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35
흥미롭게도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은 아랍어로도 번역, 출판되었다. 번역자인 아말 무함마드 알 루비(Amal Muhammad al-Rubi)는 당연히도 크론의 주장에 매우 비판적이다. 애시당초 그녀는 "어떻게 학문 연구라는 명목으로 서구의 왜곡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아랍 이슬람 정체성을 공격하는지" 아랍 독자들이 알아야 한다는 판단 하에 번역했다고 밝힌다.36 특히 루비는 이슬람 이전 메카가 성지도 순례지도 아니었다는 크론의 주장이 무슬림 사료를 오독하거나 오역한 결과라고 비판한다.37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 출판 이후 등장한 다양한 평가 가운데 크론은 로버트 버트램 세르진트(Robert Bertram Serjeant)의 서평에만 반응을 보였다. 이는 세르진트의 서평이 욕설만 겨우 쓰지 않았을 뿐 매우 감정적이고 격렬했기 때문에 그리고 크론이 스스로와 다른 학자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그의 서평에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루비와 마찬가지로 세르진트는 아랍어 사료를 오독 및 오역한 크론이 메카 꾸라이쉬 부족이 사치품을 교역하지 않았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고 비판하며 꾸라이쉬 부족이 실제로 비단을 교역했다고 추론한다.38 이 과정에서 세르진트는 크론이 고전 아랍어 문헌을 참고하면서 현대 아랍어 사전인 한스 베어(Hans Wehr)를 참고한 것 아니냐고 비난하기까지한다.39
세르진트의 서평에 대해 크론은 세르진트가 꾸라이쉬 상인들이 비단을 거래했다고 "추론"할 뿐 실제 비단을 거래했음을 보여주는 어떠한 사료적 증거도 없음을 지적하는 등 세르진트의 '오역' 지적에 대해 그녀가 제시한 해석의 타당성을 주장한다.40 (두 사람은 메카가 성지가 아니었으며 꾸라이쉬 부족은 성지를 지키는 신성한 보호자로서 여겨지지 않았다는 크론의 주장에 대해서도 길게 논의하나 그 내용을 여기에서 소개하기에는 너무 길고 복잡해지므로 생략한다.) 그러나 크론의 반박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역사가(historian)와 아랍학자(Arabist)의 구분이다. 크론은 세르진트와 같이 아랍어 독해능력을 바탕으로 아랍어로 된 사료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일부 사소한 실수나 오류는 충분히 교정될 수 있다고 믿는 아랍학자와 사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비판적 시각과 교차 분석을 통해 검증하고자 하는 역사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41 크론의 말을 옮기자면 "아랍학자는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역사가는 사료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기 전에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접근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42
크론이 보기에 세르진트와 같은 아랍학자들의 실수는 그녀와 동시대의 이슬람학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많은 이슬람학 연구자들은 무슬림들의 전통적 사료, 무슬림들의 시각과 기억을 벗어나 비판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그저 무슬림들의 시각과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고 개탄하는 크론은 아랍과 무슬림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고 그들의 가치를 대변하려는 시각이 사료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엄밀한 문헌 비평과 분석, 그리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통념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목적으로 하는 역사가들의 연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43
이처럼 오늘날 이슬람에 대한 논의는 특히 민감한 주제다. 크론의 연구를 "아랍 무슬림 정체성과 역사를 왜곡하려는 서구의 편향된 시각"로 비난한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의 아랍어판 역자의 언급이 보여주듯이, 이슬람 신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무함마드의 생애와 초기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항상 '반이슬람주의'나 '서구우월적인 오리엔탈리즘'과 결부될 위험이 존재한다. 특히 크론처럼 사료의 비판적 해석과 엄밀한 분석을 통해 이슬람 역사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집어버리는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는 '반이슬람주의'의 꼬리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세르진트에게 답하면서 크론이 말했듯이, 사료와 통념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역사 연구의 기본이다. 학문은 본질적으로 이슬람을 음해하고 비난하는 시각과 무관하다 - 물론,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악의적으로 이용될 수는 있다. 따라서 그러한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크론을 비롯하여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제기한 도발적인 해석을 간간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한 인간 공동체 사이 사이에서 탄생한 이슬람이라는 문화적 결실과 그 역사적 궤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1,400년간 이슬람과 무슬림이 거쳐온 모험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한 그들의 과거를, 그들이 거쳐온 길과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도전과 그들이 살아나가야 했던 상황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들의 현재 모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랍과 이슬람과 무슬림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그 어떤 변호보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무슬림 공동체가 거쳐온 역동적인 변화와 대응의 과정이야말로 내게는 더욱 장엄하고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참고문헌
Al-Rubi, Amal Muhamamd, "Muqaddimah al-Mutarjimah." In Tijarat Makkah wa Duhur al-Islam, written by Patricia Crone, 9-25. Cairo: Al-Majlis al-'Ala lil-Thaqafah,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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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xton, Frederick.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48, no. 3 (August 1989): 574-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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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jeant, Robert Bertram.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Misconceptions and Flawed Polemics,"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10, no. 3 (July - September 1990): 472-486.
Wansbrough, John.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52, no. 2 (1989): 339-340.
Zaman, Iftikhar.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Journal of Islamic Studies 6, no. 1 (January 1995): 92-95.
각주
Crone,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205-206. [본문으로]
위의 책, 206-208. [본문으로]
위의 책, 208. [본문으로]
위의 책, 212. [본문으로]
위의 책, 109-110. [본문으로]
위의 책, 110-111. [본문으로]
위의 책, 210-211. [본문으로]
위의 책, 213. [본문으로]
위의 책, 214. [본문으로]
위의 책, 219. [본문으로]
위의 책, 217. [본문으로]
위의 책, 226-227. [본문으로]
위의 책, 223-226. [본문으로]
위의 책, 226. [본문으로]
위의 책, 215-218 [본문으로]
위의 책, 237. [본문으로]
위의 책, 238-241. [본문으로]
위의 책, 237. [본문으로]
위의 책, 241-245. [본문으로]
위의 책, 244. [본문으로]
위의 책, 246. [본문으로]
위의 책, 247. [본문으로]
위의 책, 248-249. [본문으로]
Bonner, 339. [본문으로]
Hawting, 23; Berkey, 43; Brown 29. [본문으로]
Donner, 36-37. [본문으로]
위의 책, 241. [본문으로]
Zaman, 94. [본문으로]
Paxton, 575. [본문으로]
Crone, 앞의 책, 239; Zaman, 94. [본문으로]
Petry, 189. [본문으로]
Crone, 앞의 책, 245. [본문으로]
Little, 388. [본문으로]
Kennedy, 55. [본문으로]
Wansbrough, 340. [본문으로]
Amal Muhammad al-Rubi, 12. [본문으로]
위의 글, 15-24. [본문으로]
Serjeant, 473, 479. [본문으로]
위의 글, 478. [본문으로]
Crone, "Serjeant and Meccan Trade." 220. [본문으로]
위의 글, 237-238. [본문으로]
위의 글, 238. [본문으로]
위의 글, 239-2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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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hanuur 2019.10.23 14:27 신고더보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른 비판들도 나름대로 수긍이 가지만, 특히 자만의 비판이 제일 날카롭다는 생각이드네요. 차라리 ‘알 수 없다’는 결론에서 멈추고 위태로운 가설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책의 완성도가 오히려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글
비밀글
출처: https://harmlessmostly.tistory.com/33?fbclid=IwAR1sQdkQ7-rMrCKUii-eyFGvlqh7mfjZ9iyBIEPrR15ewqoTTX9QL7erkfw [대체로 무해함: 아랍, 중동,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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