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2

영화 <조커> 리뷰

영화 <조커> 리뷰
: 히어로와 빌런의 경계에서 던지는 농담 한 마디
(히스 레저와 호아킨의 조커를 비교해보자)
(스포가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뭐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대단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라서 난 이 영화에 스포라고 할 만한 것도 딱히 없다고 생각한다.)

0. 이번에도 TMI를 쓰게 된 계기
페북? 어림도 없지! 바아아로 비활
...을 유지했던 내가 어제부로 그만두고 다시 활성화시켰다. 왜냐면 이 글을 너무나 쓰고 싶었거든ㅋ 영화를 본 건 월요일인데, 너무 인상 깊게 보아서 리뷰글을 뒤적거리면서 봤는데 딱히 내 맘에 드는 리뷰가 없는 것 같아서 답답한 마음에 내가 직접 글을 쓰게 되었다. 뭐 호아킨의 연기가 개쩐다느니 숨겨진 의미가 있네마네... 아 물론 이런 사소한 것도 중요한 거긴 한데 음, 난 이런 식으로 작은 것들에 주목하느라 영화 작품 전체에 대한 해석이 이뤄지지 않는 게 좀 안타까웠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뭐 제대로 해석을 할 만한 그런 수준의 인간은 아니지만, 나 같은 관점으로 쓴 리뷰를 본 적이 없기에 내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써본다. 아마 내 해석에 비판할 지점이 많을 거 같긴 하지만, 그냥 작품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편히 읽었으면 좋겠다.

1. <조커>는 상징이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DC의 세계관은 마블에 비해 선과 악이 매우 명확하다고 말이다. 예컨대 슈퍼맨은 짱짱 착하고 배트맨은 존나 정의롭고 조커는 아주아주 나쁜 싸이코빌런이고... 뭐,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해석이다. 누구든 조커가 빌런인지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빌런이라고 답할 테니. 놀란의 배트맨 3부작을 보면 배트맨에 대한 평가가 작품 내 대중들에게 단순한 무법자인가 히어로인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관객의 시선으로 작품 전체를 볼 때 누가 히어로고 누가 빌런인지 헷갈릴 정도의 모호함을 보여주진 않았다. 당연히 배트맨은 히어로고, 당연히 조커는 빌런이다.
그러나 나는 <조커>가 개인의 정신적 질환과 사회적 불운에서 태어난 희대의 기형적 범죄자 이야기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영웅의 탄생과정으로 보았다. 굳이 직접적인 비유를 하자면 일제에 떨어진 원자폭탄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조커가 저지른 잔혹한 범죄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원자폭탄의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그 누가 옹호를 하겠는가. 단지 그것이 지닌 상징과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다.
사실 난 DC시리즈는 배트맨 3부작 밖에 제대로 본 게 없지만(물론 배대슈나 저리도 보기는 했지만, 내 인생에 영화를 졸면서 보았던 유일한 영화일 정도로 레전드of레전드 망작이라ㅋㅋ) DC는 뭔가 '상징'에 대해서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 같았다. 배트맨 3부작에서 대사를 생각해보면 배트맨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박쥐를 범죄자들도 두려워하게 만들고자 박쥐를 상징으로 썼고, 하비 덴트의 추악한 변절에도 불구하고 고담시의 영원한 정의의 상징으로 남기고자 스스로 다크나이트가 될 것을 자처했다. 히스 레저의 조커도 단순히 배트맨과 치고 박고 싸우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가장 정의로운 인물을 자신의 논리에 동조하도록 타락시켜 고담 시민들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었다. 이렇듯 ‘상징’을 굉장히 중시하는 게 마블과는 다른 DC특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이번에 개봉한 영화 <조커>도 조커의 살인행위를 단순히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로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어떤 ‘상징’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또한 이 영화는 다큐가 아닐 뿐더러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을 더한 작품도 아니고, 대놓고 가상의 도시 고담에서 가상의 인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허구라는 점에서 살인행위가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마냥 과몰입해서 그 자체만 보고 살인은 잘못되었다! 고로 조커도 잘못되었다! 라고 단순히 선과 악을 판단할 게 아니라, 왜 조커는 살인하였으며 조커는 살인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인가, 더 나아가 조커란 어떤 존재인가 해석하여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나의 결론은, 조커는 빌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히어로에 가깝다고 보았다.

2. 왜 조커가 빌런이 아닌가?
조커를 단순한 빌런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첫 째, 조커가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둘 째, 조커는 묻지마 살인을 한 것이 아니다. 조커가 살해한 대상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셋 째, 조커가 등장하는 사회경제적 배경(고담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에서 히스 레저의 조커와 호아킨의 조커를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다크나이트>에서 히스레저 조커는 순수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조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경찰이나 하는 짓이며 자신은 계획 따위 세우지 않는다고 했다. 알프레드는 조커가 그저 세상이 불타는 것을 바라는 인간유형이라고 했으며, 사람들은 모두 다 조커를 싸이코패스로 취급했다. 빌런인 히스레저 조커는 빌런답게 사람들 내면의 악함을 믿었고, 히어로인 배트맨은 영웅답게 사람들 내면의 선함을 믿었다. 시민과 범죄자를 태운 2대의 선박에서 상대방 선박을 폭파시키는 기폭장치를 누르면 한 쪽은 살려주겠다는 사회실험(?)을 하면서 조커는 결국 두 선박은 폭파할 것에, 배트맨은 폭파하지 않을 것을 믿었다. 둘은 매우 대립적인 인물이었고 조커가 절대악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될수록 그 대척점에 있던 배트맨의 영웅됨이 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다크나이트>에서 히스 레저 조커는 영화에서 핵심적인 인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배트맨이다. 조커는 절대 주인공이 아니다. 배트맨을 부각시키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이기에 빌런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커>에서 호아킨의 경우, 조커 스스로가 주인공이다. 누군가를 돋보이게 할 필요도 없기에 보다 충실하게 본인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자유 속에서 조커는 그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호아킨의 조커는 결론적으로 빌런이기는 하지만 히스 레저만큼이나 단순히 절대악으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 오히려 영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스 레저가 순수악을 상징한다면 호아킨은 박탈당한 자들의 분노와 저항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질병을 가진 아서 플렉에게 보통의, 정상적인,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조차 인지하지도 못하는 아주 작은 위선적인 선의들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생각해보자. 옳은 일을 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분명 영웅이지만, 무언가 잘못되고 있을 때 그것이 잘못이라고 처절하게 소리치는 자 또한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 레저의 조커와 호아킨의 조커를 비교해보면 결코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다르다. 히스 레저의 조커는 그 누구도 조커의 광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일상이 온갖 범죄로 가득한 마피아조차 혀를 내두르며 저 싸이코랑 같이 있을 수가 없다며 치를 떨었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순수 절대악인 것이다. 하지만 호아킨의 조커는 생방송으로 송출된 살인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중들이 그의 분노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여 가면을 쓰고 조커를 자처하며 범죄를 자행했다. 이 같은 대중들의 지지가 단순히 대중들이 빌런의 추종자라서 지지했겠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둘 째, 히스 레저의 조커는 살인의 대상이 특정되어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순수악이자 광기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살인은 자기 마음대로 했다. 하다못해 1,3편의 빌런이었던 라스 알 굴이나 베인도 고담시를 무너뜨려야한다는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자기 뜻에 동조해줄 동료를 모았는데 히스 레저는 그딴 거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자신과 같이 작업한 은행털이범조차 정해진 임무를 다 하자 그 자리에서 필요가 없다며 다 죽여 버린다. 그런데 호아킨의 조커는 그렇지 않다. 죽일 사람과 죽이지 않을 사람의 경계가 분명하게 그어져 있다. 조커가 살해한 지하철의 취객, 직장 동료, TV쇼 진행자 머레이는 하나같이 조커를 비웃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왜소증을 가진 직장동료는 자신의 살인행위를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줬다. 심지어 살해현장에서 도망치려고 하자 자신의 키 때문에 문에 잠긴 잠금장치를 풀 수 없자 우습게도 살인자인 조커에게 말을 걸어 도움을 구하는데, 영화를 보는 관객조차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호아킨의 조커는 절대 그 직장동료를 비웃지도 않았고 오히려 고맙다며 키스한 후 밖으로 내보내 줬다. 호이킨의 조커가 분노하는 대상은 사회적 약자인 자신에게 따듯한 위로조차 건네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으로만 삼으려는 무례한 사람들이었다.
셋 째, 고담시라는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사되는 도시의 모습이 조금은 다르다. 다크나이트에서 보여주는 고담시는 하루가 멀다하고 범죄가 일어나는 범죄자들의 도시이자 부패한 관료들이 가득한 말그대로 최악의 막장 범죄도시였다. 당연히 조커같은 인물은 최악의 범죄도시에서 등장한 최악의 범죄자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호아킨의 조커에서 보여주는 고담시는 다크나이트의 고담시와 조금 다르다. 영화의 초반에 나오는 라디오 방송에서는 환경미화원의 파업으로 곳곳에 쓰레기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시작한다. 즉, 말하자면 범죄도 범죄이지만 범죄보다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빈부격차’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마스 웨인과 같은 최상류층은 시위하는 시민들을 노력하지 않는 자들이라며 경멸하였고, 유명 TV쇼의 진행자인 머레이는 그저 하류층의 삶을 한낱 개그소재로 이용해먹었으며, 대중들은 지하철에서 죽은 취객들이 그저 금융업 종사자라는 이유로 잘 죽었다며 환호한다. <조커>에서 고담시는 범죄보다는 사회경제적 갈등이 매우 첨예하게 극대화된 도시로 묘사되었기에 여기서 나타난 조커라는 인물은 범죄라는 측면보다 어느 한 쪽 계급의 대변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말하자면 조커가 히어로라면 히어로 조커가 처치한 빌런은 토마스 웨인, 머레이 프랭클린 등의 사회의 상류층 계급이 되는 것이다.

3. 조커의 양면성 : 누가 조커를 불렀는가?
영화의 한 장면에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호아킨은 어느 한 클럽의 스텐딩 코미디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 웃을 때는 전혀 웃지 못하고 사람들이 웃지 않을 때는 오히려 혼자 웃었다. 이 장면은 우선 1차적으로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호아킨의 기형적인 사고구조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나는 조금은 다르게 해석했는데, 이는 인생에 단 1분도 행복한 적 없다고 고백한 조커가 어떻게든 사람들의 웃음을 노트에 적어가는 노력으로라도 이해하고자 처절하게 발악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도 잘할 수 있다고, 나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말이다. 하나의 장면에서 완전히 상반된 해석이 가능한데, 나는 호아킨의 조커가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관점처럼 조커는 처음부터 내면 깊은 곳에 광기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직장에서 짤렸을 때 그는 남몰래 쓰레기 골목으로 들어가 쓰레기를 발로 짓밟으며 화풀이를 했었고, 그가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살인을 했을 때에도 우발적인 살인이기는 했으나 화장실에 도망쳤을 때 당황하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춤을 추며 안도감을 느낀다. 살인이 거듭될 때마다 마치 자신의 억눌렸던 자아를 되찾았다는 듯이 더욱 멋진 춤으로 변모하였고 마지막에 조커로서 완성될 때 쯔음에는 더 이상 망설이지도 않고 과감하게 악행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호아킨은 조커라는 내면의 악을 항상 지니고 있었고 살인이라는 계기로 각성하여 본래의 자아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두 번째 관점, 조커의 순수성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수 있다. 이 점은 배트맨과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배트맨은 어떤 인물인가? 배트맨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여의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성장해서 20대가 되어 어느 산속의 비밀조직에서 수련을 거쳐 배트맨이라는 영웅으로 태어났다. 그의 일생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큰 고난을 겪었고 그 때부터 영웅으로 거듭나는 일대기가 시작되었다. 반면 조커는 어떤가? 조커는 어린 아이도, 젊은 청년도 아니다. 조커는 제법 나이가 들어서 삶의 온갖 불행이 점철되어 그 극단까지 이를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자기 본성에 내재된 광기를 억누르고, 자기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웃음을 이해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가족인 어머니를 진심으로 매우 아꼈다. 그가 어느 클럽의 스탠딩 코미디 무대에서 어머니를 언급하는 조크를 날린 점이나 어머니의 정신질환을 언급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는 모습 등 영화 곳곳에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드러난다. 직장 동료가 조커에게 총을 건네줬을 때에도 자신은 이런 걸 쓸 수 없는 사람이라며 총기를 혐오하는 듯한 말을 했다. 또한 버스에 탄 아이에게, 어린 아이었던 브루스 웨인에게 순수한 웃음을 안겨주고 싶어 했고, 상담하는 관료나 아버지라 착각했던 토마스 웨인에게도 크게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자신에게 따듯한 말 한 마디만 건네주길 바랐다면서 슬퍼했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머레이에게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할 것이라며 인정과 위로를 받는 망상을 하며 어떻게든 버텨왔다. 그가 광기를 억누르고 왔다는 점도 맞지만, 그 엄청난 광기를 아주 오랜 세월동안 억눌러왔고 본인 스스로도 노력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무엇이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조커의 내재된 광기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아마 조커의 표현대로 ‘미쳐 돌아가는 사회’일 것이다.
조커에게 닥친 여러 가지 불우한 상황들은 이 사회가 미쳐 돌아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신들은 사회적 약자인 조커에게 가해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이 조커에게 상처주었던 행동들은 모두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 매우 일상적인 행위들이었다. 얼마나 일상적이냐면 그 누구도 뭐랄까, 히스 레저의 조커처럼 내면의 순수한 악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으로 조커에게 상처주지 않았다. 길거리의 아이들은 그저 재미로 광대를 괴롭혔을 뿐이고, 상담하는 관료는 그저 돈받고 일하는 지루한 업무를 하다가 시의 재정이 고갈되자 자연스레 자신의 업무를 정리한 것이었고, 총을 건네준 직장동료는 그저 동정하는 마음으로 총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자신의 숨겨진 아버지라 착각했던 토마스 웨인은 조금 모질게 말했을 지언정 사실대로 조커 어머니의 정신질환에 대해서 밝혔을 뿐이었고, TV쇼를 진행한 머레이는 그저 대중이 좋아할 만한 방송 컨텐츠를 프로페셔널하게 포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커는 상처받았다. 그리고 그 상처에 대해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이 잘못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소한 행위들이 모여 소위 ‘미쳐 돌아가는’ 사회를 만든 것이고, 그래서 조커는 여기에 분노했고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더 큰 광기로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조커는 가진 자들의, 무관심한 자들이 상처받은 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면서 만들어진,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라 볼 수 있다.
조커를 보면서 ‘저런 잔혹한 범죄자 녀석!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안 되지!’라고 말한다면,
그래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살인이 어떻게 정당화 되겠는가.
하지만 이 관점이
조커 본인의 사전 동의도 없이 방송에 내보내 그저 가진 자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시키고는 후에 조커가 살인을 밝히자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이 조커를 나무라는 위선적인 모습과 다를 게 무엇인가. 결국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만함이 아니던가.
만약 자기가 이 영화를 본 평범한 사람들에 속한다면
그저 한 사회적 약자가 받은 불우함과 상처에 연민과 동정을 보낼 게 아니라
한낱 범죄자에 불과한 조커를 괴변으로 옹호한다며 영화를 비판할 게 아니라
왜 이런 괴물이 만들어졌는지, 조커는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그 과정을 면밀히 관찰해봐야 한다. 조커는 처음부터 조커가 아니었다. 그러니 무관심에서 비롯된 아주 작고 순수한 악의가 일상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안 그러면 누구든 조커에게 죽임을, 단죄당하지 않겠는가? 조커는 범죄자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들의, 가지지 못한 자들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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