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
이현주 (지은이)삼인2004-10-11
372쪽
152*223mm (A5신)
670g
[절판] 이현주의 동양 고전 읽기 세트 -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이아무개의 장자 산책,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책소개
1996년에 출간된 <장자 산책>을 다듬고 보완해 펴낸 개정판.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 총 33편으로 이루어진 <장자> 중에서 내편만을 다루었다. 기독교와 불교 등의 종교를 넘나들며 <장자>가 다양한 종교.사상 등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를 살폈다.
장자와 예수, 석가뿐만 아니라 책은 노자, 공자, 간디, 아퀴나스, 소크라테스의 텍스트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또한 지은이는 장자의 이야기가 무엇보다 인간 중심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며, 허위의식에 대한 저항, 평등 사상 등의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고 강조한다. 풍자와 비판, 역설과 우화로 이루어진 <장자>를 만날 수 있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소요유(逍遙遊)
1. 붕이 남으로 날아감
2. 요가 천하를 넘겨주고자 함
3. 혜자와 장자의 대화
제2장 제물론(齊物論)
1. 하늘 소리 이야기
2. 몇 가지 문답 이야기
3. 나비 꿈
제3장 양생주(養生主)
1. 중정을 따름
2. 포정의 소 잡기
3. 공문헌과 우사의 문답
4. 노담의 죽음에 문상함
제4장 인간세(人間世)
1. 안회와 중니의 문답
2. 섭공과 중니의 문답
3. 안합과 거백옥의 문답
4. 장석과 역사의 문답
5. 남백자기와 큰 나무
6. 꼽추 지리소
7. 접여의 노래
제5장 덕충부(德充符)
1. 상계와 중니의 문답
2. 신도가와 자산의 대화
3. 중니와 숙산무지의 대화
4. 애공과 중니의 문답
5. 사람한테 본디 정이 없는가?
제6장 대종사(大宗師)
1. 진인론
2. 남백자규와 여우의 문답
3. 자사와 그의 벗들
4. 틀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
5. 맹손재가 초상을 치름
6. 의이자와 허유의 문답
7. 좌망에 들다
8. 자상의 명
제7장 응제왕(應帝王)
1. 설결과 포의자의 문답 외
2. 열자와 호자의 문답
3. 마음 쓰기를 거울같이
4. 혼돈의 죽음
접기
책속에서
혜자가 다시 묻는다.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그 몸뚱이는 유지하고 있는가?
장자가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한다.
"도가 그에게 인간의 얼굴을 주었고 하늘이 그에게 인간의 꼴을 주었다!"
그런데 어찌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돌은 ...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현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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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옥(觀玉)이라고도 부르며, ‘이 아무개’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목사이자 동화작가이자 번역가이며, 교회와 대학 등에서 말씀도 나눈다.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드는 글들을 쓰고 있으며,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과 함께 《노자 이야기》를 펴냈다.
최근작 : <대한민국 청소년에게>,<아가씨 피리를 부셔요>,<We Want to Be Real Christians 2> … 총 277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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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등 총 246종
대표분야 : 한국시 23위 (브랜드 지수 18,617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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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 한잔 걸치고 싶은 친구, 장자와의 산책...
다시 장자를 읽는다. 이현주 목사의 장자 산책을 옛날 책으로 읽을 때는 좀 짜증났더랬는데(너무 구판이어서) 이번 책은 산뜻하게 예쁘다. 요즘 책들이 쓸데없이 두껍고 종이 질이 좋으며 비싸다는 비판적 기사가 엊그제 난 적도 있지만, 이런 고전들은 좀 두툼한 종이로 만들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고전이니까...
이번 읽기에서는 <장>별로 생각을 모아 가며 읽으려고 노력했다.
1장. 소요유. 소요한다는 말은 마음을 편하게 먹고 빈둥거리며 느릿느릿 다닌다는 말이고, '놀 유游'자도 특정한 목적없이 즐기며 마음 편하게 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생 짧은 데 그리 아둥바둥 살 필요 있나, 젊어 노세... 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을 <옳음>에 얽매고 사는 것만이 잘 사는 건 아닐세~하는 장자 영감의 눙치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은 '이용 가치'가 아닌 '존재 가치'로 봐야 한다. 교육을 '인적 자원' 관리라고 보는 정부는 나쁜 정부다. 나를 버리고, 공을 버리고 이름을 버려라. 이런 말은 금강경에서도 숱하게 만난 말이 아닌가.
우리의 성모님, 어디에서 죽어가는 당신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 아, 이런 말들이 이아무개 님의 글로 읽는 고전의 맛이다. 무하유의 고향을 말하면서, 피폐해지는 인간 존재를 사랑하는 하나님, 성모님, 하눌님, 그리스도를 읽을 수 있는 기쁨. 나는 행복하다.
2장. 양생주. 양생은 말 그대로, 웰빙이다. 그런데, 우린 너무 육체의 웰빙에 얽매인다. 텔레비전에 무슨 비타민 어쩌고 하는 것들은 몽땅 육신의 양생만을 추구한다. 물질의 양생은 결국 웰빙보다는 부유함을 추구하게 된다. 지나쳐도, 결핍되어도 병이 되는 것이 바로 비타민이다. 중도, 중정, 중용을 지키는 것, 그것이 양생이다. 웰빙은 결코 돈이 많아 '잘사는 rich' 경지가 아닌 것이다.
야생의 새는 아무리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도 새장에 갇히려 하지 않는다. 인간도 야생의 새가 되어 '육신의 웰빙', '물질의 웰빙'이란 감옥에 갇히지 말고 먼 하늘을 날아야 할 거다.
3장. 제물론. 온 세상이 잡다구레한 물질로 가득하다. 일 주일도 되기 전에 재활용되지 않는 재활용 쓰레기들은 가득 생산된다. 부끄럽다. 사물을 가지런히 하라... 세상을 가지런히 하라... 그 근본과 가지끝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물과 자신을 떼어 놓지 않을 수 있으련만...
자기를 잃는 일, 그것을 상아 喪我, 또는 좌망 坐忘이라 한다. 물에 사로잡히지 않는 경지. 곧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얽매이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
근본을 알고 끝을 아는 사람은 '덕'이 뿌리요, '다스림'은 가지 끝임을 안다.
흐르는 물에 있으면서 젖지 않는 달의 경지, 빛을 옴기면서 빛에 물들지 않는 허공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초연한 참여를 읽는다. '物'에 젖지 않는 경지를 만난다. 모든 '물'은 저를 있게 한 <하나>를 모신다. 하나님, 한울님, 예수그리스도...
4. 인간세. 엊그제 한 수학자가 법관을 석궁으로 쏘아 죽이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법관이 대학측의 손을 두 번이나 들어줘서 한 수학자의 생을 망쳐놓았다.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법관을 수학자가 처벌해 버렸다. 마치 일본의 추리소설 줄거리 같다. 인간에게 '지식'과 '이름'은 흉기다.
우리의 교묘한 언술과 몸짓, 그 깊은 곳에 숨어있는 명예와 이익을 향한 탐심,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마음을 닦고, 텅 비게 하기 위해 <장자는 유가를 비판>한다.
수학자처럼 석궁을 쏘고 싶은 일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독재자나 살인마, 사소하게는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주는 이들에게도 석궁의 욕망은 들끓지 않는가. 그렇지만, 장자는 툭 던지는 말로 마음의 팽팽한 줄을 툭, 끊는다. 물론 석궁은 발사되지 않겠지.
서로 해치고, 당하는 세상을 사는 법 : 거울의 마음, 배웅도 마중도 하지 앟으며, 응하되 간직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사물을 이기면서 상하지 않는다. 아상을 버리고, 공명심을 버리라... 무아, 무공, 무명... 결국 마음을 다스시는(심재 心齋) 길. 뜻을 한 곳에 모으고,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감각에 얽매이지 말고 氣로 들어라.
세속을 떠날 것 아니고, 세속 한가운데서 하늘나라 백성으로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삶. 아멘, 소리가 나게 만드는 아무개님의 글. 연못의 더러움에 뿌리내리되, 오히려 아름다운 연못으로 피어야 하는 인간 세상.
사마귀는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호랑이 조련사는 상대에 맞는 수단을 쓰지 못했고, 마부는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다가 망신하고 몸을 버린다. 하, 살기 어렵다. 인간 세상은...
다른 누구에게 "쓸모"가 되려고 안달하지 말고, 하늘이 준 생존의 길을 좇는 참사람이 <신인의 나무>가 되어 오래 견딜 수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비정한 세상. 그 신인은 천수를 누려 가늘고 길게 삶을 다하는 것에 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한 삶을 논한다. 지리소는 병신이다. 그렇지만 그는 전쟁에 끌려나가 죽지도 않았고, 그의 열 식구를 너끈히 먹여 살렸다. 인간들아, 인간아, 글샘아, 누가 병신이냐?
5. 덕충부. 덕이 가득하면, 덕이 가득 차야 겉으로 드러난다. 덕은 껍데기에 있지 않다.
장자는 <공부>를 감각과 인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세속의 굴레를 벗은 자유인으로 세속 한복판을 당당하고 의연하게 걷는 길을 찾는 것, 으로 본다.
무위당 선생님 꿈을 꾼 이아무개 씨. 곧장 들어가... 문자로는 안 돼... 문자에 빠지지 말어... 마음을 잡어... 마음을 항복시키라고...
못생겼는데, 왜 사람이 끓느냐... 애태타를 바라 보라.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남들을 제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 꾀하지 않고, 깎아내리지 않고, 잃지 않고, 사고 팔지 않는 하늘처럼 사는 사람에겐 주변이 끓는다.
6. 대종사. 큰 꼭대기가 되는 스승님. 그를 지인, 신인, 성인이라 한다. 거울처럼, 하늘처럼... 물처럼...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도에 더 가까운 이가 마땅히 스승이어야 하거늘, 나로 하여금 바라건대 자네 뒤를 따르게 하라...(이 책은 가끔 이런 말들과 게송, 싯구들로 가슴을 따스하게 한다.)
7. 응제왕. 제왕에게 응답함. 어떤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인가. 다시 소요유를 반복한다. 무기, 무공, 무명...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공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 그 이름, 하느님 아버지일 따름.
마지막의 혼돈의 죽음은 인간의 '함 爲'이 얼마나 작은지 본다.
장자를 읽는 일은, 장기판에서 움직이는 말을 <훈수두는 눈>으로 보는 일이요,
싸움판에서 흥분한 두 사람에게 <심판>을 서는 일이며,
야단치는 시에미와 당하는 며느리 사이에서 말리는 <시누>의 눈을 갖는 일이다.
얄밉게도 세상에서 조금 비스듬하게 서 있으면서도, 그 자리가 세상 바라보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란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너 죽을래?'하면서 쫓아오며 시비거는 사람에게 아큐정전의 '아큐'는 <정신적 승리법>으로 대응한다.
실컷 밟힌 후에 '난 똥이야, 넌 똥을 밟은 거야. 재수 없게도...'하는.
아큐는 어리석지만, 장자의 이야기도 시비에 맞대응하지 않고, <정신적 승리>를 바라본다.
장자더러 아큐라고 하면, 글쎄, 꿈속에서 나비였더랬는데, 이제 그 나비가 나냐, 아큐냐?하고 웃으려나?
장자같은 남자라면, 이런 허풍쟁이라면, 같이 대폿집에서 푸지게 막걸리 한잔 걸쳐야 제맛이다.
- 접기
글샘 2007-01-17 공감(3)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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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다. 좋은 의미 일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명예라는 인간 탐욕의 한 방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옛 사람들 중이 백성의 피를 빨아 먹었던 자들이 임지를 떠나면서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비(碑)'를 세웠던 일들을 있었다. 백성을 착취한 자들이 이름까지 착취하는 탐욕이 나은 결과다.
좋은 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을 탓할 필요가 없지만 좋은 책을 내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가 있으니 '이 아무개'다. 그가 쓴 <이 아무개의 장자산책>(삼인 펴냄)을 손에 드는 순간 멈칫한다. '이 아무개?' 아무개라는 이름이 있나 의문이 들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 아무개는 목사, 동화 작가, 번역가이면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들과 따끔하고도 넉넉한 말씀으로 많은 이들을 품어주는 이현주 목사임을 알게 된다.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1996년에 나온 <장자 산책>을 새로 다듬고 보완한 개정판이다. <장자>는 장주의 저술로 내편 7, 외편 15, 잡편 11편인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장자 사상의 정수이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내편>을 다루고 있다.
사실 <장자> <도덕경> <사서오경>을 접할 때마다 지식 정보화 시대에 2500여 년 전 중국 철학가와 사상가들이 남긴 글들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할 것 같은 <장자>를 읽는 것은 시간이 낭비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젖은 이들에게 아무개 목사는 말한다.
"연이 바람 타고 하늘 높이 오르는 것은 그 줄이 땅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줄이 풀어지거나 끊어지면 연은 곧장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장자의 생각이 수천 년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은 까닭은 그 뿌리가 대지에 든든히 박혀 있기 때문이요, 근본을 붙잡은 그의 생각을 울가 잃은다면 21세기 눈부신 컴퓨터 문명도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라고."(10쪽)
사실 <사서삼경>과는 달리 노자와 장자는 1명이 읽었다면 얼굴이 하나이고, 100명이면 100개, 100만명이면 100만개의 얼굴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얼굴로 다가온다. 우리는 여기서 <장자>라는 텍스트가 절대 진리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자신의 삶의 정황에서 치열하게 벼려진 거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실용주의가 나은 병폐는 심각하다. 이익만 되면 무조건 좋다는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가 우리 시대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존중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자본이 낳은 탐욕에 팔아버렸다. 이럴 때 2500여 년 전 <장자>를 통하여 오늘 우리 자신들이 빠져 버린 탐욕과 존엄성 훼손을 극복하는 일이 필요한 시대임을 분명하다.
이아무개 목사는 <장자>를 통하여 기독교와 불교 등을 오고간다. 장자가 어떻게 세상의 종교와 사상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장자와 기독교, 불교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텍스트에서는 서로가 다른 진리가 아니라 소통하고 있음을 말한다.
"'나'라고 하는 물건 하나 없애버리면 너 있는 자리가 곧 새 하늘 새 땅이요 네가 곧 곤이요 붕이요 남명이요 북명이요 9만 리 창공이요 회오리바람이라는 얘기다."(17쪽)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곤과 붕은 부처, 남명과 북명은 장자다. 이아무개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나’라는 관념에 예속된 사람과 그것을 벗어난 사람의 모습을 더욱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우리는 공(功) 다툼 때문에, 자기 이름 내기에 바쁘다. 이런 때에 '나'를 버리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부질 없는 것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길이다. 이아무개 목사는 이렇게 장자와 예수, 석가뿐만 아니라 노자, 공자, 간디, 아퀴나스, 소크라테스를 서로 불러모아 대화한다.
<공자> <맹자> <논어> <대학> <중용> <금강경> <산해경>, 조선의 선시, 수사(修士)의 글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진리와 인간 자신, 자연을 알기 위하여 끊임없이 내 놓았던 텍스트를 통하여 그들이 무엇을 뚫고 나아가려 했는지, 무엇이 같고, 다른 지를 <장자>를 통하여 말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시대는 죽은 시대다. 자연을 이해하지 않는 시대는 죽은 시대. 실용을 통한 이익 창출이 지배하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말하고, 학문을 말하고, 문학을 말하는 철학, 어문학, 인문학, 기초학문은 이미 대학에서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 이웃이 강도를 만나도, 도와주지 않는다.
자연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이익의 도구인 이용가치로 평가하면서 결국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파멸로 가고 있다고 이아무개 목사는 말한다. 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미명 아래 힘을 통하여 지배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음을 말한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파멸을 향한 지구의 운명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자연에서 '힘'만을 볼 게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보아야 한다. 예술과 종교가 새로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나무 한 그루를, 자르고 켜서 침대로 만들 재목으로만 볼 게 아니라 더불어 노닐며 생사를 함께 할 '이웃'으로, '어미'로 보아야 한다."(51쪽)
자신을 장사 지내는 것, 버림, 완전히 여읜 상태를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 에크하르트(M. Eckhart, 1260~1328)는 '무심'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어디에도 연루되어 있지 않음'으로 '초탈'이라고 이 아무개 목사는 말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로부터의 초탈이야 말로 사랑, 겸손, 자비보다 고귀한 최선, 최상의 덕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최상의 덕이지만 가지는 것에 매어 달리니 사랑과 겸손, 자비는 찾아 볼 수 없다.
초나라 때 미치광이 접여(接與)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시들어가는 덕을 어찌하겠느냐? 앞날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난날은 돌이킬 수 없도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이 그것을 우리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성인은 자기 목숨 살아갈 따름이니 시방은 겨우 형벌이나 면하는 게 고작인 세상. 위태롭구나, 위태롭구나. 땅에 금 긋고 그 안에서 허둥대는 짓거리.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서 잘리우고 옻나무는 쓸 데가 있어서 베어지네. 사람이 저마다 쓸로 있음의 쓸모는 알면서 쓸모없음의 쓸모는 모르는구가."(200쪽)
모든 것이 썩어 무너진 세상이라는 말이다. 입신양명과 출세, 탐욕만을 위하여 나무를 베어내고, 자연을 버리고, 생명을 버리는 세상을 향한 장자의 일침이다. 가난하고, 비천한 곳에 머물기를 원하는 장자 사상의 핵심을 볼 수 있다.
이름이 나면 높아지고, 높아지만 탐욕이 생기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마는데 우리는 이를 위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렇다. 광우병을 보라, 대운하를 보라. 영어몰입교육을 보라. 파멸에 이르는 길이지만 그것이 살 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책 읽는 것조차 대학입시와 연관시키는 우리 시대에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분명 돈 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실용과 탐욕에 찌든 우리가 <장자>를 통하여 무심과 비움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땅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인간과 함께 만물이 죽는다."
- 접기
탐독 2014-11-3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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