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1
연세대 물리학과 박홍이 교수 - 오피니언 - 미디어 - 대한민국 두뇌포털 브레인월드
연세대 물리학과 박홍이 교수 - 오피니언 - 미디어 - 대한민국 두뇌포털 브레인월드
연세대 물리학과 박홍이 교수브레인 Vol. 18
함께 나누는 삶,소셜 브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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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 기자 |입력 2013년 01월 14일 (월) 13:27
“나눔에도 연습이 필요해요”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이자 ‘연세자원봉사단’ 단장을 맡은 박홍이(65) 교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주신 가르침을 늘 잊지 않고 산다. 아버지는 항상 “나눔도 연습이다. 어릴 때부터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박 교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아낌없이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평생 나눔과 봉사의 삶을 실천해왔다.
선친은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이렇게 물었다. “박홍이, 너 이제 학교 들어가는데, 어떤 놈을 사귈 거야?”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아이들이 가슴에 무엇을 담고 사는가를 봐야 한다”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시더니 “너는 가슴에 나눔을 안고 살아가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박 교수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마당을 쓸라고 시키고 매달 용돈을 주셨는데, 그중의 10%는 어김없이 고아원에 기부를 하셨다. 박 교수의 나눔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아버지는 말씀에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셨다. 한겨울에 코트를 입고 나가면 그 다음날 새 코트를 짓는 날이 많을 정도로 입은 옷 벗어주고 가진 돈 나눠주는 것이 몸에 밴 분이었다. 반에서 수학여행을 못 가는 친구들이 생기면 여행 경비를 지원해주신 것도 아버지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배운 터라 나누는 삶은 박 교수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렸다. 1994년, 우연찮은 기회에 소외된 이웃을 도와주게 된 것을 계기로 그는 틈나는 대로 봉사와 나눔의 현장을 찾아다녔다. 교수라는 권위를 벗어버린 채 독거노인을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고 몸을 씻겨주는가 하면 소년 소녀 가장의 아빠 역을 자처하기도 하고 심지어 행려병자 염해줄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염하는 법까지 배웠을 정도다. 그는 자신의 전방위적 봉사활동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좋은 일은 빨리 해치워라
박 교수는 최다 논문 게재로 학교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수업 시간에 자료로 쓰기 위해 그렸던 만화를 묶어 책을 내기도 했다. 검도는 수준급이고 풍경화도 그린다. 보통 사람은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바쁜 일과 중에 거침없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법구경에 ‘좋은 일은 빨리 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생각하자마자 빨리 하지 않으면 마음이 생각을 앗아간다’는 영어 속담도 있죠. 하고 싶은 일을 미친 듯이 즐기면서 하면 자연스럽게 의식주가 해결되고 삶이 건강해집니다. 하고 싶거나 문득 떠오른 일이 있으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해요. 물론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에 실수도 많이 했는데, 집사람이 많이 봐줬어요.(웃음)”
그렇다고 그의 나눔이 늘 여유로운 삶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부산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아버지 공장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대학교 3학년 때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책임감 때문에 그는 막노동을 하며 가정을 챙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힘들다고 공부를 포기하면 영영 패배자로 남을 게 뻔했다. 그는 모진 결심을 하고 무일푼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낮에는 일하고 하루 2~3시간 자면서 이를 악물고 공부하기를 몇 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턱까지 차올랐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저 사진을 쳐다봤어요.”
박 교수는 연구실 책장 한쪽에 놓여 있는 빛바랜 흑백 사진을 가리켰다. 유학을 떠나기 전에 가르쳤던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1966년에 박 교수는 강원도 홍천 전방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가진 것은 뭐든지 나누기 좋아하는 그는 군 복무 중에도 야학 교사로 산골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아이들에게 1년 동안 영어를 가르치면서 목이 닳도록 복창하게 한 것이 ‘Never Ever Give up!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였다.
군 복무 중에도 야학교사로 산골 아이들을 가르쳤다.
“대학 3학년 때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어야지 생각했는데, 저 사진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저 아이들에게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틴 끝에 그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1년 귀국해 대학교수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도시 빈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섰다. 유학 시절 힘이 되었던 그 사진은 여전히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에게 위안과 힘을 준다.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봉사하고 나누는 데 도가 튼 박 교수지만 2년 전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로는 그 많던 봉사활동을 많이 접었다. 지금은 가양복지관에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어른들 식사 당번 해드리고, 학생들과 학기마다 몸으로 뛰는 사회봉사를 하는 것, 소아암 환자를 위한 쉼터인 한빛사랑나눔터를 운영하는 것 정도만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음악 멘토가 되고 싶어서 아코디언을 배우기 시작했다.
봉사활동을 줄인 대신 그는 요즘 배우는 데 재미를 붙였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 개발을 해야 한다고 믿는 그는 한번 하겠다고 결심한 건 멈추는 법이 없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강해야 약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선친의 권유로 시작한 검도는 벌써 52년째다.
9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한 영어로 얼마 전에는 물리학자가 쓴 영어 에세이집도 출간했다. 일본어를 공부한 지도 1년이 되었고, 3년 전부터 시작한 서예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선 긋기만 10년을 할 작정으로 덤볐다.
음악을 통해 아이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되어주고 싶어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4년째다. 아직 실력이 누굴 가르칠 정도로 능수능란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배움은 더딜지언정 멈추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쓰이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까닭이다.
“무엇이든 한번 배우면 평생 배운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죽기 전까지 자기 개발을 해야 즐겁게 살 수 있어요. 얼마 전 라는 책을 읽었는데,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뭘 외우거나 머리를 많이 쓰는 것보다 운동을 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 책 읽고 음악을 듣는 것도 좋지만 운동이나 악기 연주, 붓글씨, 그림 같이 몸의 일부분이라도 움직이는 걸 찾아서 하는 것이 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박 교수는 이제 정년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평생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살았던 사람답게 ‘희망의 속삭임’이라는 소박한 멘토 사업을 준비 중이다. 주변에 희망을 잃은 아이들을 발굴해 장기간 멘토링하면서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다양한 도움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정년퇴임을 앞둔 그의 연구실에는 책이 별로 없다. 필요한 전공 책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제자들에게 책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도 금방 산 책을 필요한 이가 있으면 그냥 선물로 주고 선물 받는 만년필도 선뜻 건네기 일쑤다.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는 염을 하면서 배웠다.
“경찰서에서 행려병자 염해줄 사람이 없다기에 불교식으로 한 달 동안 배웠는데, 염을 하면서 크게 깨우친 게 있어요. 염을 할 때 노자를 넣어주는데, 살아 있는 사람의 값어치는 얼마가 될지 몰라도 죽은 사람 값어치는 단돈 30원이야. 30원 가져가는 죽은 사람이 뭐가 그렇게 귀해. 살아 있는 사람이 귀한 거지.”
그가 매일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 계기다. 만남이 우리 인생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믿음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르침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건강을 다스리기 위해 시작한 검도는 벌써 52년째다.
“아버지는 항상 사람이 귀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내 옆의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나도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철학이었죠.”
물론 보통 사람들도 나누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마음이 반짝 들었다가도 먹고사는 데 치이다 보면 금세 잊어버릴 뿐. 그는 봉사란 특별한 게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일을 기꺼이 하는 것, 그게 바로 봉사고 나눔입니다.
자연주의자 스코트 니어링은 하루를 3등분해서 3분의 1은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고, 3분의 1은 자기 개발을 하고, 3분의 1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살았어요. 얼마나 멋있어요?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세상이 각박하고 불안해질수록 서로 따뜻하게 대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보듬어줘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는 박홍이 교수는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것을 믿고 실천하는, 참 못 말리는 사람이었다.
글·전채연 ccyy74@brainmedia.co.kr | 사진·김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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