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0
[북한 여행기]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2) - 뉴스페이퍼
[북한 여행기]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2) - 뉴스페이퍼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2)
이금주 매사추세츠 한국평화운동 공동의장
승인 2019.08.31 23:09
북에 다녀오고 어느새 이주가 흘렀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보스턴으로 돌아왔지만, 이주 전의 감동과 감흥은 여전히 가슴 속에 살아있다. 정말 꿈을 꾼 것 같다. 일주일의 꿈결 같은 추억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내년 여름 다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다시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제 가슴 속의 추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북에서의 첫날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나와 함께 평양으로 출발하자!
고려항공, 처음으로 북을 마주한 곳
보스턴에서 출발해, 서울과 심양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심양에서 만난 고려항공은 내가 처음 접한 북한이었다. 그 첫 만남은 호의, 낯섦, 궁금증, 그리고 편견의 파기라는 다양한 감정과 발견이 교차하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2019년 7월 31일 오전 9시, 대한항공 서울발 비행기로 심양에 도착했다. 미리 신청했던 북한 비자를 심양공항에서 받았다. 비자를 전달해 준 분의 안내를 따라 고려항공 카운터에 왔다. 고려항공은 E 카운터다. 바로 뒷줄 F 카운터에 대한항공 마크가 보였다. 남측과 북측의 항공사가 나란히 있다.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렇게 가까이 있다. 우리의 마음의 거리도 가까운가? 가깝고도 먼 남과 북의 현실을 보는 듯해서일까?
먼저 줄을 선 북한 탑승객들 뒤에 줄을 섰다. 처음 눈앞에서 보는 북한사람들.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휴전선 너머 우리의 동포. “이건 그게 아니란 말입네다.” 언뜻 대화가 들린다. 이북 사투리가 두드러진다. 어려서 연세 드신 어른들께 듣던 이북 특유의 억양이 그리 낯설지 않다. 실감 난다. “와, 이제 내가 진짜 북한에 가는구나.” 설렘이 가슴에 차오른다.
내 차례다. 고려항공 남자직원이 웃으며 나를 맞는다. “안녕하세요. 재미동포입니다. 처음으로 북에 갑니다.” 간단히 나를 소개하고 여권과 비자, 이티켓을 건넸다. 비자를 전달해 준 안내원이 “내가 재미동포 평화운동가”이며 “ 미국에서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애쓴다”라고 덧붙였다. 직원의 표정이 환해졌다. “ 내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애쓰니 애국자라며 좋은 좌석으로 배정해 준다”고 했다. 탑승권과 짐표를 받았다. 2C, 일등석이다. 일반석을 샀는데 일등석 자리를 받은 거다. 큰 호의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했다. 시작이 좋다. 예상치 못한 호의였다. 뜻밖의 호의에 가슴이 훈훈해진다.
심양공항 고려 항공 카운터
휴전선 너머 동포의 정이 중국 땅 심양에서 내게 닿았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잠깐 머물렀던 심양공항은 내게는 낯선 곳이었다. 가장 큰 불편함은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이다. 입국심사 때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나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었다. 영어가 전혀 안 통한다. 고려 항공 카운터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느라 잠깐 공항 안 찻집에 들렸다. 이때도 말이 안 통해 손짓발짓으로 간신히 차를 주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항공 카운터에서의 따뜻한 북한 동포와의 만남은 어느새 낯선 심양공항을 편안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주체사상 탑 위에서 본 창전거리 &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 개선문 전망대에서 본 여명거리
고려항공 기내, 또 다른 특별한 체험
탑승구 앞이다. 유리창 너머로 평양 행 고려항공 비행기가 보인다. 짐을 싣고 있었다. 처음 눈앞에서 본 고려항공 비행기. 그 비행기를 창 너머로 보는 것만으로 신기했다. “저게 나를 평양으로 싣고 갈 비행기다. 해외동포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간절함도 함께 싣고 갈 것이다” 흥분이 다시 밀려온다. 창 너머 고려항공 비행기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고려항공 직원이 보였다. 이제 탑승이다.
젊은 여성 승무원들이 나를 맞는다. 남남북녀라 하였든가. 정말 곱다. 하늘빛 아이섀도에 연분홍 립스틱을 바른 여승무원이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얼굴 표정에 반가움이 보인다. 세련된 화장에 파란색 유니폼이 경쾌하다. 건강미를 물씬 느끼게 하는 그들. 남측 항공기의 승무원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무엇일까? 저쪽에 남성 승무원도 보인다. 짧고 단정한 머리에 하늘색 유니폼을 입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목례를 한다. 따뜻하다.
비행기는 100석 정도의 규모다.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는 복도 측 좌석이다. 내 옆 좌석에 김일성 주석 배지를 단 40대 중반의 남성이 앉아 있다. 나의 옷차림이나 분위기로 봐서 내가 해외동포임을 알아차린 듯하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도 “안녕하십니까?” 로 되받는다. 재미동포라고 나를 소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먼저 반갑다며 선뜻 자신의 창 측 좌석을 내게 양보한다. 그 호의를 흔쾌히 받았다. 창 측에 앉았다. 북을 접하고 두 번째 받은 호의다. 호의의 연속이다. 이게 멀리서 온 동포에 대한 마음인가! 고맙고 또 고마웠다.
고려항공 비행기에서 나를 처음으로 맞이한, 하늘빛 아이섀도를 곱게 바른 여성 승무원이 어떤 음료를 마실 건지 물었다. 귤 단물을 택했다. 귤 향이 나는 탄산음료였다. 그리 달지 않았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마신 비슷한 종류의 탄산음료보다 자극이 덜한 은은한 맛이었다. 처음 맛보는 북한 음료. 이 역시 새로운 경험이다. 기내식을 제공하는 승무원의 모습을 찍고 싶었다. 당연히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승무원에게 물었다. 기내에서 음식을 제공하는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그 여승무원이 바로 “사진 촬영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좀 무안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기내식으로 햄버거가 나왔다. 승무원도 아니고 기내모습도 아니고 음식을 찍는데 무슨 문제랴. 그래도 사진을 찍기 전에 승무원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햄버거 사진 찍어도 되나요?” 다시 사진 촬영 금지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궁금했지만, 승무원의 말에 말없이 따랐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만고의 진리다.
햄버거는 고기패티가 도톰하고 고기 잡내가 나지 않았다. 평소 미국에서 풀 먹인 소고기를 즐겨 먹었던 나는 단번에 이게 풀 먹은 소고기임을 알아차렸다. 옥수수 먹인 소고기와는 다른 그 특유의 자연의 맛과 씹히는 식감이 있다. 싱싱한 토마토와 상추도 햄버거의 맛을 한층 더 돋웠다. 고기를 좋아하는 나. 평양에서 먹게 될 소고기에 대한 기대감도 살짝 생겼다.
옆에 앉은 남성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처음에는 왠지 용기가 안 났다. 다른 좌석 승객들도 모두 조용했고, 승무원에게 사진 촬영 금지라는 말을 들은지라 좀 의기소침해진 탓도 있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었다. 그 남성에게 “창 측 자리를 양보해 주어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재미동포며 이번이 처음 북한 방문이다”고 나를 소개했다. 그 남성은 “환영한다. 뜻깊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내게 답했다.
비행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였다. 곧 착륙 예정이라는 기내 안내방송이 나왔다. 내 옆 좌석에 앉은 남성이 읽고 있던 노동신문을 대충 둘둘 말아 앞 좌석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 장면은 내겐 작은 충격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디선가 노동신문을 아주 소중히 다루어야 하며 구기거나 함부로 접는 행위는 처벌받을 수 있다고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받은 노동신문을 반듯하게 접어 앞주머니에 조심스럽게 꽂았는데 이 남성은 아니었다. 이것 역시 보수언론이 만든 북에 대한 가짜 뉴스인가. 바로 내 눈앞에서, 기내라는 공공장소에서 북한 주민이 노동신문을 구겨 넣는 모습을 보았다. 승무원도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았는데,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도 그냥 신문이다. 노동신문을 구겨 넣는다고 처벌하는 북한은 없었다.
평양으로 오는 머나먼 길
이제 곧 이륙이다. 북녘땅을 밟고 북녘 동포들을 만난다. 곧 평양에 닿는다고 생각하니, 나를 엄습했던 불안과 우려가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안도감과 더불어 여기에 오기까지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오늘 아침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혹시 예기치 못 한 일이 있어 출국을 못 할까 봐, 나를 배웅나온 선배 부부에게 내가 심양행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까지 공항에서 기다려 달라고 당부했다. 같은 이유로,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도 내가 심양에서 평양 행 비행기를 탄 이후에 배포하도록 했다.
평양으로 오는 길은 멀고 멀게 느껴지는 여정이었다. “국가보안법”의 공포를 넘어선 길이었기에 더 멀게 느껴졌다. 이번 북한 방문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여행이 아니었다. 남과 북이, 북과 미국이 평화로 나아가는 길에 장애가 되는 북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였다. 나는 북의 모습을 남녘 동포, 해외 동포, 세계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남과 북의 하나 됨과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첫걸음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북한으로 가는 길은 나에게 심리적인 부담감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부담으로 다가온 것은 국가보안법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북에 간다”라고 말했을 때, 제일 먼저 그들은 내가 국가보안법과 종북몰이의 피해자가 될까 봐 염려했다. 우리는 과거 정권에서 방북을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되어 옥고를 치렀던 임수경 씨, 황선 씨, 황석영 씨를 보았다. 또한, 우리는 통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 여러 재외 동포 간첩단 사건 등을 통해 권력이 의도하면 무고한 시민도 간첩이나 체제전복 세력으로 둔갑 시켜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고문과 옥고를 치를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섬뜩하고 끔찍한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 남과 북의 평화와 화해를 말한 이석기 의원은 정보기관과 검찰에 의한 국가보안법 내란음모죄 프레임에 걸려 아직도 복역 중이다. 북한 여행 경험을 알린 재미동포 신은미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강제 추방되었고, IT 사업가 김호 씨는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정보기관과 검찰, 사법부에 의한 국가보안법 적용은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의 운이 나쁘면 걸리게 되는, 그러나 걸리면 너무도 치명적인 호환 마마와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공포는 2019년을 사는 나에게,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내 마음에 있는 심리적 장애를 먼저 뛰어넘어야 했다. 용기를 냈다. 모든 적법한 절차를 따르고자 최선을 다했다. 보스턴 한국총영사관에 연락해 방북계획을 알렸다. 영사의 안내에 따라 방북 신고서를 제출했다. 철저한 자기검열만이 “국가보안법”의 덫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덫에 걸린다면 그땐 싸우리라. 이런 각오로 방북을 결심했다.
처음 밟는 북한 땅, 평양 순안공항
멀리 구름 사이로 북녘의 산하가 보인다. 저 아래 논과 밭 그리고 농가인듯한 집들이 보인다. 이제 북녘땅을 밟는다. 평양이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묘한 감정이다. 가슴은 부푼 듯하고 어깨는 굳어있음이 느껴진다.
1회에서 소개한 일화처럼, 나를 북한에서 처음 맞은 북한사람, 입국심사관의 따뜻한 환대로 나의 긴장감은 뜨거운 태양 아래 눈송이가 녹듯이 바로 녹아 버렸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다. 정이 통하는 곳이다. 멀리서 온 동포라고 각별히 아껴주는 곳이다.
안내원이 반가이 나를 맞는다. 우렁찬 목소리와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한다. “리금주 선생님, 멀리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호탕하고 씩씩한 그의 성격이 인사말에서 드러난다. 씩씩한 북의 남성은 이런 모습일까?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안내원의 도움으로 세관 신고를 마치고 입국 수속을 다 완료했다. 이제 운전기사가 나를 반가이 맞는다. 훤칠한 키, 호리호리한 젊은 남성이 미소로 인사한다. “반갑습니다. 리금주 선생님. 환영합니다.” 과묵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운전기사. 다소 대비되는 첫인상의 두 남성과 함께 차에 올랐다. 자동차로 평양 순안공항을 빠져나와 평양 도심으로 달린다. 북녘 동포들의 환대로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나의 가슴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체험에 대한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자, 이제 평양으로 달린다.
평양 순안공항 & 순안공항 부근 평양 외곽의 주택가
여기 평양 맞아?
평양 순안공항을 벗어나 평양 도심으로 달린다. 아직 평양 외곽이다. 논과 밭,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계속 혁신, 계속 전진”, “인민 경제의 자립성”이라는 구호도 눈에 들어온다. 구호를 보자, 내가 북에 왔음이 실감이 난다. 북한당국이 경제개발과 성장에 주력한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는데, 구호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보인다. oo 국숫집, oo 상점… 순우리말 간판들이 정겹다.
경제강국건설을 고무하는 거리구호간판 & 평양의 거리 간판
수십층 고층 건물이 즐비한 거리에 들어섰다. 창전거리였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고층빌딩. 화려한 색감의 건물. 개성 있는 건축 양식. “와우! 여기 평양 맞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로만 듣던 창전거리를 직접 눈앞에서 보며 그 위를 차로 달린다. 여기가 평양인지 서울인지 보스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을 겪은 직후 방북했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평양은 회색 콘크리트의 침울한 도시였다고 했다. 그러나, 내 눈 앞에 펼쳐진 평양은 현대적이고 화려하고 역동적인 시가의 모습이다. 눈부신 발전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변화하고 있는 평양”의 실체를 눈앞에서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평양의 창전거리는 북한이 김일성 주석 100돌이 되는 2012년을 계기로 건설한 거리다. 20층에서 45층 높이의 고층 아파트와 원통형의 인민극장, 아동백화점과 학교 및 유치원, 탁아소, 각종 편의시설과 공원이 창전거리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평양 창전거리
화사한 색감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여명거리다. 퇴근길의 평양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양산을 받쳐 든 여인들. 삼삼오오 걷고 있는 여학생들.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현대적인 도시, 평양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층 건물이 즐비한 평양 도심에서 마주한 북한 동포들의 모습은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우리와 똑같이 생긴 동포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분주해 보이는 거리 풍경이다. 우리네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 역시 반공 반북 교육을 세게 받은 세대라, 북한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어둡고 활기 없는 회색빛의 도시다. 내가 알고 있던 평양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생동하는 도시, 평양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생동감이 넘친다.
대동강변의 평양시가 & 버드나무 늘어진 평양 려명거리
려명거리 부근 퇴근길 평양시민의 모습 & 평양 도심 양산들 받쳐든 여인들 & 차로 즐비한 퇴근길 평양
려명거리는 2017년 4월에 완공된 평양의 신도시다. 70층짜리 초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려명거리에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과 과학자, 그리고 려명거리 건설로 집이 철거당한 사람들이 먼저 입주했다고 한다.
류경, 버드나무가 아름답게 드리워진 평양. 그 거리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고려항공 비행기 안에서의 노동신문 일화는 그저 작은 놀라움에 불과했다. 내 앞에 펼쳐진 평양의 표정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퇴근길이어서인지 차도는 전차, 버스, 택시, 승용차 등이 뒤섞여 있다. 차도에 차가 꽤 빽빽하다. 인도에는 전차나 버스를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자연스러운 웨이브의 머리에 핀을 꽂은 여성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머리 스타일이 유행인가 보다.
평양의 오후는 뜨거웠다. 그래서인지 양산을 쓴 여인들이 유난히 많다. 맵시 나는 스커트에 멋스러운 샌들을 신고 있다. 우리네 여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하며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살아 숨 쉬는 평양의 거리다. 이 모든 것은 차로 이동하면서 차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다. 차 안에서 그들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우리 남녘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민족의 동질성은 너무도 쉽게 거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70년을 헤어져 살았던 우리 북녘 동포들의 삶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더 설레어 온다.
전차를 기다리는 퇴근길의 평양시민들
두 가지 첫인상 첫 느낌
로동 신문사 부근 해방산호텔에 도착했다. 여장을 풀고 안내원과 만나 일정을 조율했다. 일정을 조율하던 중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작동하던 에어컨이 멈췄다. 자체 발전기가 있는지 희미하게 전등은 다시 바로 들어왔다. 저녁 시간이라 몹시 덥지 않아 에어컨 없이 견딜 만 했다. 10분 정도 후에 다시 전기가 들어와 에어컨이 작동되었다.
재제로 인한 여파인가. 전력공급이 아주 원활하지는 않은 듯했다. 일주일 내내 거의 종일 밖에 나가 있었지만, 잠깐 호텔에 머무는 동안 정전이 된 적이 몇 번 있었다. 개성에 갔을 때도 식당에서 20분 정도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미국의 대북제재로 나사못 하나 못 들여오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이 정도의 전력 사정은 아주 양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부신 성장 뒤에 겪었을 어려움과 쏟았을 땀방울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변화된 평양의 모습을 보고 그 이면에 있었을 어려움과 고충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북한 동포들이 경제제재로 감내해야 하는 생활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상상하게 하는 또 다른 경험을 했다. 호텔 방에서 짐 정리를 하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자세한 계획을 점검하느라고 11시가 넘어 샤워를 시작했다. 더운물이 잘 나오다가 갑자기 찬물만 나왔다. 호텔 프런트에 전화했다. 11시 30분 이후에는 더운물이 안 나오니, 가급적 그 전에 샤워를 마치라고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특별히 보일러를 돌려 더운물이 나오게 해 준다고 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기름 절약을 위해 늦은 시각 이후에는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으려는 이유일 것으로 생각했다. 부리나케 샤워를 마치고 호텔 프런트에 알렸다. 이제 보일러 안 돌려도 된다고.
제제 속에서 이루어 놓은 엄청난 변화와 도약. 그 이면에 있었을 북녘 동포들의 어려움, 땀과 노력.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 북녘 동포들, 경제제재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만큼 이루어내려고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렸을까? 다시금 내가 북녘에 와서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깨닫게 했다. 평양의 놀라운 발전에 경탄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발전을 이루어낸 동포들의 삶의 모습을 이해하고 바로 볼 수 있기를 소망했다.
변화와 발전을 향해 도약하고 있는 평양의 모습을 거리에서 보았다.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면서 차 안에서 본 모습이지만 세계 수준의 현대화된 도시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경제 제재로 어렵다고 들었는데, 북한의 수도 평양의 첫인상은 경이로울 정도로 현대적이고 발전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와 똑같이 생긴 우리의 형제들. 퇴근길을 재촉하며 바삐 걷는 모습. 버스를 기다리며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분주히 움직이며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모습. 그들도 우리처럼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부대끼며 그렇게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평양이 얼마나 발전했는지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그 안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삶의 모습을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첫날의 강렬한 두 가지 대비되는 경험. 경이로운 발전을 보았고 그 뒤안길에 있었을 우리 동포들의 땀과 눈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못 살건 잘 살건 간에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다. 70년 고립과 제재 속에서 이만큼 버티고 경제를 발전시킨 우리 동포들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제 독자들은 나와 함께 나와 같은 시선으로 우리 북녘 동포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들의 생활 공간을 탐방하기를 바란다. 다음 연재는 나의 평양에서의 첫 식사, 보통문거리 고기 상점 숯불 구이집에서의 만찬으로 시작할 것이다. 기대하시라.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 평양거리를 걷고 있는 시민들
평양거리의 풍경-양산과 휴대전화 & 평양거리의 양산을 쓴 여성들 & 평양거리의 상점
매사추세츠 한국평화운동 공동의장
평화와 통일을 여는 보스턴 행동 대표
세월호를 잊지 않는 보스턴 사람들의 모임 대표
Public Schools of Brookline, MA ESL 교사
하버드대학교 응용언어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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