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9
총칼로 빼앗는 게 아니면 '수탈'이 아닌가? - 오마이뉴스 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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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로 빼앗는 게 아니면 '수탈'이 아닌가?
[재반론] '반일종족주의' 저자 김낙년 교수의 <주간조선> 반론에 대해
전강수(gsjun)등록 20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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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조선> 9월 9일자에 김낙년 교수의 반론이 실려있다. ⓒ
1.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하는 이유
여러 명이 함께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필자 6명이 참여한 책 한 권이 출간되자마자 온 나라를 들썩이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대표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 이야기다. 제목부터가 무척 도발적인데, 책 내용 역시 충격적인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대한민국을 '거짓말의 나라'로 단정하고 정치인, 학자, 재판관 그리고 온 국민이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고 단죄하질 않나, 일제 강점기에 토지 수탈, 식량 수탈, 사람 수탈(노동자 강제노역과 위안부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단언하질 않나, 독도를 우리 영토라 주장할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질 않나, 노골적인 혐한(嫌韓) 입장을 드러내면서 그동안 한국 국민이 역사적 상식으로 여기던 것들을 모조리 뒤집어엎고 있으니 말이다.
책 출간 후 내용이 친일적이며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과 똑같다는 비판이 나오자, 이영훈 교수 등은 발끈하며 자신들이 오랫동안 학문적으로 탐구한 결과를 발표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우상숭배를 타파하기 위해 나선 선각자를 자임하는 듯하다.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온 국민을 샤머니즘에 사로잡힌 미개한 종족으로 취급하고 역사학계와 사회학계를 거짓말의 온상으로 매도했으니 사안이 간단치가 않다. 만일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 국민은 수십 년 동안 엄청난 '거짓말'에 속아 살아온 바보천치들이고, 그런 '거짓말'을 '지어낸' 한국 학자들은 몽땅 '사기꾼 중의 사기꾼'이라 해야 하니 큰일이 생긴 셈이다.
소수의 학자가 도를 넘는 이상한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여겨서 그냥 넘길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출간 즉시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어 버려서, 지금 학문적인 검토를 통해 사실관계를 정확히 해 두지 않으면 앞으로 큰 혼란이 초래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8월 14일과 19일 <오마이뉴스>에 <반일 종족주의>를 전면 비판하는 칼럼 두 편을 게재한 바 있다("'친일파' 비판이 억울? 자업자득이다" "당신들이 유포하는 건 '혐한 종족주의'다")
이에 대해 필자 중 한 명인 김낙년 교수가 경제 수탈 문제에 초점을 맞춘 반론을 <주간조선>에 게재했다("'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비판한다"). 여기서 나는 <반일 종족주의>의 기조에 대해 평가하면서 김 교수 반론에 대해 재반론을 펼치고자 한다. 부디 상호 유익한 결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사실 <반일 종족주의>는 일제의 경제 수탈, 노동자 강제징용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대일본 청구권 문제, 을사오적 평가 문제 등 중대한 내용을 광범위하게 다루기 때문에, 지면 관계상 여기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검토하기는 어렵다. 마침 김낙년 교수의 반론이 경제 수탈 문제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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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일 종족주의' 책표지. ⓒ 미래사
2. <반일 종족주의>에서 활용하는 연구 방법의 문제점
<반일 종족주의>에서는 일제의 경제 수탈과 관련하여 두 가지 커다란 거짓말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 농민의 토지를 강탈했다는 이야기이고, 둘째는 일제가 조선 농민의 쌀을 강제로 빼앗아 일본으로 대량 반출했다는 이야기다. 두 이야기 모두 오랫동안 교과서에 실려서 많은 국민의 역사 인식을 왜곡해 왔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지금까지의 일제 강점기 연구에 따르면, <반일 종족주의>에서 말하는 대로 대가 없이 총칼로 빼앗는 '토지 수탈'과 '쌀 수탈'은 없었다. 그렇다면 일제의 경제 수탈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여기서 나는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수탈의 개념을 '대가 없이 무력으로 빼앗아 가는 행위'(여기에 적합한 용어는 약탈 내지는 강탈이 아닐까?)로 좁혀 놓고는 그에 해당하는 증거가 보이지 않으니 일제 식민지 수탈은 없었다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것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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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일제 경제 수탈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틀. ⓒ 전강수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자. 보통의 역사 연구자라면, 사료를 검토한 결과 '대가 없이 빼앗는 수탈'(그림의 (A))의 증거가 보이지 않을 경우, 바로 제국주의의 경제 수탈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병탄한 이상 뭔가 다른 방법으로 식민지를 지배하고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그 경로를 탐구하기 마련이다. 이런 태도로 접근하면 그림의 (B), 즉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 농업사 연구는 대부분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고 상당한 성과를 축적했다.
일제 강점기에 관한 수많은 자료와 연구성과가 이런 성격임에도, <반일 종족주의>는 그에 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조야(粗野)한 수탈론을 담은 세 개의 문헌(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신용하 교수의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 토지 수탈과 쌀 수탈을 노골적으로 주장한 국사 교과서)을 내세워 그 허구성을 폭로하다가 슬쩍 식민지 경제 수탈이 없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비틀고 만다. 세 문헌의 오류를 지적하고 정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끝날 일을 사실상의 '수탈 부정론'으로까지 끌고 나갔으니 지나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위의 세 문헌은 지금까지 나온 일제 강점기 농업사 연구를 전혀 대표하지 못한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에 관한 기존 연구성과 중에서 그처럼 노골적인 수탈론을 펼친 연구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연구는 일제의 식민지적·지주적 농업정책이 어떻게 식민지지주제 발달과 농민 몰락, 그리고 농업구조의 왜곡을 초래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아울러 일본인 대지주의 토지 겸병, 소작료 수탈, 그리고 미곡 대량 이출의 과정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분석했다.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분석의 중심을 차지한 셈이다.
나는 <오마이뉴스> 칼럼에서 <반일 종족주의> 곳곳에 부조적(浮彫的) 수법이 드러난다고 비판했는데, 토지 수탈론 비판과 쌀 수탈론 비판이 전형적인 사례이다(부조적 수법이란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만 선택적으로 제시하거나 논파하기 용이한 견해만 검토하는 연구 방법을 가리킨다).
김낙년 교수는 내 칼럼에 대한 반론에서, 노골적인 약탈은 없었지만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있었다는 내 설명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내가 국사 교과서의 서술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변형된 수탈론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내 견해는 강제성의 개입을 입증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라고도 했다. 내게는 그 강제성을 입증할 책임이 주어진 셈인데, 사실 이는 너무 쉬운 일이어서 김 교수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전해야 할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농업정책에 관한 자료 중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대지주가 조선 농민들에게 얼마나 혹독한 강제를 가했는지 보여주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수와 조선총독부 도소작관(道小作官)을 지낸 히사마 겐이치(久間健一)의 진술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그는 일제 당시부터 조선 농업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던 관변 학자인데, 그런 그가 아래와 같은 진술을 했으니 당시 실상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농민에게는 … 가장 극단적인 권력적 지도(指導)가 가해졌다. 이러한 권력적 개발은 일본인의 성급함이 작용했기 때문에 농민의 이해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고려할 여유도 없었다. 농민은 오로지 관청의 지도가 명하는 대로, 배급받는 종자를, 지시받은 못자리에 뿌리고, 주어진 못줄로 정조식(正條植)을 행하고, 정해진 날에 비료를 주고, 제초를 행하고, 명령받은 날에 피를 뽑고, 예취(刈取)를 하고, 지시받은 방법에 따라 건조·조제를 행할 뿐이었다. 거기에는 오로지 감시와 명령만 있을 뿐이었다. 만일 다른 게 있다고 하더라도 농민의 창의와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久間健一, 1943, p.8)
히사마 겐이치의 책에는 일본인 대지주의 농민 지배가 어느 정도로 가혹했는지, 또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지주-소작 관계란 기본적으로 토지 임대차를 둘러싼 자유 계약 관계임을 감안할 때, 일본인 대지주들이 소작농의 경영상 자율성을 무시하고 물샐 틈 없는 강제 장치로 소작농을 통제하며 가능한 한 많은 소작료를 뽑아내려 한 것은 명백히 지주-소작 관계의 범위를 넘어서는 짓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작료 수탈이었다.
뉴라이트의 대부이자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의 정신적 지주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조차 "식민지기의 지주-소작관계는 법률적으로는 평등한 계약관계였습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소작농들에게 농노적 예속을 강요하는 불평등 관계였습니다."(안병직·이영훈, 2007, p.156)라고 했음에 비추어, 강제성의 개입을 애써 부정하려는 김 교수의 시도는 이장폐천(以掌蔽天: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다)의 느낌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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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미국 수탈기지 군산항에 쌀가마니가 수북히 쌓여있다. ⓒ
3. 제도와 정책을 통한 경제 수탈의 실상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가장 심하게 행해졌던 곳은 수리조합 지역이다. 일제는 쌀 증산을 위해 토지 소유자로 하여금 수리조합을 만들어 토지개량을 행하게 했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정책을 배경으로 강 주변 저습지나 상습 침수지를 대량 매입한 다음 주변 농지까지 편입시켜 수리조합을 설치하고는 수리시설 개선을 꾀했다. 그들 중에는 원래 자산가였던 사람은 많지 않았고 다수가 가난하거나 실업자였다.
수리조합의 사업비로는 총독부 보조금도 동원되었지만, 주로 식산은행이나 동양척식회사 등으로부터 차입한 자금이 활용되었다. 원리금의 상환은 조합원으로부터 수리조합비를 걷어서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인 지주들은 이 비용을 전가하기 위해 다수의 조선인 토지 소유자들을 조합원으로 강제 편입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을 관권으로 위협하며 동의서 날인을 강요하는 등 적극 개입했다. 조합 몽리구역에 포함된 토지 중에는 우량 전답과 수리 불가능 토지들이 다수 있었다. 수리시설이 필요 없었던 조선인 토지 소유자들이 대거 수리조합에 강제 편입되어 과다한 조합비를 부담하게 되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1920년대에는 조선 전역에서 수리조합 반대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수리조합 관련 기사는 1920년대 내내 신문 주요 면을 차지했다. 김낙년 교수가 당시 <동아일보> 등 언론에 게재된 수리조합 관련 일반 보도 기사와 특집 기사들을 봤더라면, "정책의 결과에 '일부' 부정적 효과가 있었다"는 식으로 가볍게 서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짧은 기간에 광대한 옥토를 가진 대지주로 변신했다. 1920년대에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 쌀을 대량 증산하여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할 때 그에 적극 부응한 것은 이들 일본인 대지주였다. 비슷한 행태를 보인 조선인 지주들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지면이 허락한다면, 나는 일제와 일본인 대지주들이 조선 농민들에게 가한 강제의 사례를 수없이 열거할 수 있다. 그 결과 조선인 토지 소유자들이 대거 몰락하고 소작농들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례도 수없이 제시할 수 있다. 그래 봤자 부질없는 짓이 될 것 같아서, 히사마 겐이치의 관련 진술 하나와 수리조합 지역 내 토지소유 상황을 보여주는 통계표 두 개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친다.
"이들 기업적 지주는 조선 각지에 광대한 근대적 지주경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주위를 점차 겸병하여 갔다. … 1920년 저 방대한 미곡증식계획(산미증식계획을 가리킨다: 인용자)의 실시는 이런 대토지사유제도를 한층 촉진시켰다. 국가자본에 의한 경지의 확대 개선은 주로 수리조합에 의해 연차적으로 강행되었는데, 지역 내 영세소유는 가차 없이 대지주에게 겸병되어 갔다."(久間健一, 1943,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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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은 일본인 지주가 밀집했던 전라북도 소재 5개 수리조합 지역에서 토지소유가 어떻게 변해 갔는지 보여준다. 1920년대 후반 조선인 토지 소유자들이 급격히 몰락하는 대신 농장형 대지주(회사·농장)가 급속도로 토지를 집중해갔음을 알 수 있다. 회사·농장의 형태를 취한 농장형 대지주는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a <표 2>는 50정보 이상 소유 대지주의 민족별 경지 소유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수리조합 지역 내에서 일본인 대지주로의 토지 집중이 특히 현저했음을 알 수 있다.
허수열 교수의 추정에 따르면, 1910년 당시 일본인들의 논 소유 면적은 42,585정보로 조선 전체 논의 2.8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랬던 것이 1935년에는 308,083정보, 18.3퍼센트로 급증했다(허수열, 2005, p.343).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인 대지주의 강제력이 강하게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이를 토지 수탈이라 하지 않고 뭐라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일본인 대지주들이 조선인 소작농을 들들 볶아서 수취한 쌀을 일본으로 대량 이출한 것을 쌀 수탈이라 하지 않고 뭐라 불러야 하는가?
4. 김낙년 교수의 이론 적용에 오류는 없는가?
나는 <오마이뉴스> 칼럼에서, 김낙년 교수가 일제 강점기 극심한 소득 불평등의 증거를 제시하고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제정책이 아니라 전통사회 이래의 함정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을 비판했다.
김낙년 교수는 반론에서 지난 100년간의 농가 인구의 연평균 변화율 통계를 제시하면서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농가 인구가 증가한 것이 지주제를 강고히 유지시키고 소작농을 빈곤에 빠뜨린 원인이라고 강변했다. 식민지지주제 확대와 소작농 빈곤의 원인으로는 식민지 경제정책이나 지주의 소작료 수탈 등 보다 분명한 사회적 원인이 존재함에도 그에 대해서는 전혀 검토하지 않고 농가인구 증가를 단일 원인으로 제시하다니, 그 무모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 교수가 경제학 개념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뭔가 대단한 경제이론에 기대고 있을 법한데, 그게 무슨 이론인지 정말 궁금하다. 좁은 소견으로는 맬서스의 인구론 아니면 한계생산력설 정도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만일 그렇다면 김 교수는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다. 우선, 맬서스 인구론은 헨리 조지 등의 강한 비판을 받고 경제학의 뒤안길로 사라진 엉터리 학설이므로 이에 의존했다면 더 논의할 가치가 없다.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을 오로지 인구증가라는 자연현상에서 찾는 걸 보면 맬서스주의의 냄새가 짙게 나는데 현재로서는 그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혹시 한계생산력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몇 가지 따져볼 사항이 있다. 김 교수는 "농촌에 경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경지는 상대적으로 더 귀해지고 사람의 값은 더 떨어지게 된다"며 조선시대부터 식민지기까지 지주제가 강고히 유지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소작농 빈곤의 원인도 거기서 찾는다.
한계생산력설로 해석하면 토지의 한계생산력은 상승하고 농업노동의 한계생산력은 떨어져서 지대는 증가하고 소작농이 가져가는 임금 부분이 줄어든다는 이야기가 되는데(한계생산력설에서는 어떤 생산요소의 가격은 그 생산요소의 마지막 단위가 만드는 생산량, 즉 한계생산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농가인구가 증가할 때 농업노동의 한계생산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한계생산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일단 맞다고 치더라도 그것과 지주제 확대와 무슨 논리적 연관이 있는가?
중소 지주와 자작농, 그리고 자소작농도 엄연히 토지 소유자였던 만큼 지대 상승의 혜택을 누렸을 텐데 일제 강점기에 그들 다수가 점점 토지를 상실하고 몰락했다. 심지어 경지 100정보 이상을 소유한 조선인 대지주도 1930년대 이후에는 크게 감소했다. 농가인구 증가라는 요인 하나로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게다가 김 교수도 인정하듯이, 산미증식계획 등으로 농업투자가 늘었다면 자본량도 증가했을 텐데 그렇다면 농가인구가 증가하더라도 농업노동의 한계생산력이 줄어든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이처럼 한계생산력설로 해석하더라도 김낙년 교수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이론에 기대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만일 그렇다면 무슨 이론인지 밝혀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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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 이승만TV의 '위기 한국의 근원 : 반일 종족주의(12)편'에 출연한 김낙년 교수. ⓒ 이승만 TV 유튜브 캡처
5. 마무리
제도와 정책이 경제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무척 강하다. 독립 국가에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식민지 사회에서랴! 김낙년 교수는 1970년대 이후 농가소득의 증가를 놓고도 농가인구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농지개혁의 효과는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20여 년 간 한국 경제의 장기통계를 구축한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그 통계를 김 교수처럼 활용한다면 오랫동안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기 십상이다.
장기 집계통계란 사물을 공중 높이 올라가서 보는 것과 유사해서 전체 그림을 크게 보는 데 유익하다. 그러나 김 교수는 공중으로 너무 높이 올라간 듯하다. 아예 일제 강점기 조선 사회의 실상이 흐릿해져 버렸으니 말이다. 그동안 장기 집계통계의 작성을 위해 노력했다면, 앞으로는 부디 당시 현실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허다한 자료들에 천착하기 바란다. 그래야 비로소 제도와 정책에 의한 수탈과 민족 간 차별·불평등이 눈에 들어올 테니 말이다.
통계와 사료를 중시한다고 자부하며 우상 파괴자로 나선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이 우상을 파괴하기는커녕 혹세무민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엉뚱한 길로 들어선 듯하여 심히 안타깝다. 부디 길을 돌이켜서 역사적 상식의 수호자 역할이라도 충실히 수행하기 바란다.
참고문헌
안병직·이영훈, 2007,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기파랑.
전강수, 1984, "일제하 수리조합 사업이 지주제 전개에 미친 영향", <경제사학> 8.
허수열, 2005,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久間健一, 1943, <朝鮮農政の課題>, 成美堂.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서울사회경제연구소의 < SIES 이슈와 정책> 제21호(2019. 10. 2)로 발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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