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기념 포스팅.
일제시대 조선 경성에서 태어나 만스물한살 (1924 - )까지 자란 한 청년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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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파국이 왔다. 8월16일. 패전 다음날이었다.
나는 경기도 인천 교외에 있는 송도에 있었다. 이곳엔 일찍이 해수욕장과 해조온천으로 알려진 휴양지가 있었고 전쟁때는 우리 전파무기 사관학교가 있었다.
나는 스무살. 곧 견습사관이 될 터였다. 명령 수령. 군용 고리짝과 머나먼 임지가 기다리고 있는 시점에서 패전을 맞았던 것이다.
그날, 나는 피복창고를 정리하느라 몸이 더러워졌었다. 그래서 혼자 목욕탕에 들어갔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졸기 시작했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이 전투의 나날의 피로도 이걸로 끝이다..
그대로 잠이 들듯한 상태로 욕조에 떠 있는데, 창 밖에서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래는 「반딧불의 빛」같았다. 멜로디는 「반딧불의 빛」같았지만, 가사는 조선어 같기도 했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이전부터, 「Should old aquaintance be forget and never of to mind」에 「반딧불의 빛, 창가의 흰 눈」이라는 가사를 붙여 불렀다. 늘 부르면서도 의미가 다르다는 걸 전혀 이상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가사가 어떤 의미로 다시 변해 조선어노래가 된 것일까.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국기게양탑에서 갑자기 일장기가 툭 떨어졌다. 무슨 일이지? 그 쪽을 집중해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 조선어 「반딧불의 빛」노래소리가 한층 더 커지더니, 노래 속에서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본 「태극기」가 소리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일거에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처음 본 태극기였다. 내가 소년 시절, 우리 가게에 고용되었던,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李씨가 몰래 알려준 깃발이다. 李씨가 공장 빈터에 못으로 태극기를 그리고는 나에게 알려주더니, 발이 아닌 손으로 가만히 지웠던 그 깃발.
「반딧불의 빛」의 조선어 가사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노래하는 의미가 있는 듯 하다, 아니, 그런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겨우 이해되기 시작했다.
깃발이 게양대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환성소리가 일었다.
나는 동시에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패전사실을 안 후, 사관학교 바깥쪽에 있는 마을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 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날 밤, 나에겐 동초(주:보초가 일정한 구역 내를 왔다갔다하며 경계에 임하는 일)임무가 맡겨졌다.
주막 한채가 있었다. 주의를 요하는 곳은 이곳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낮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밤에 불을 켜고 있는 집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등화는 아직 형식적으로나마 통제되고 있었는데도 마을에선 여기저기 불을 켜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건 불온징후다.
주막은, 내 예상대로 불을 켜고 있었다. 안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실탄은 이미 장전된 상태였다. 나는 문을 발로 걷어 찼다. 문은 곧바로 열렸다. 눈 앞에 남자들이 몇사람 서있었고, 한가운데에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일장기가 펼쳐져 있었고, 깃발의 붉은 원에 먹을 칠하는 중이었다.
놀라 소리를 낸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일장기를 어떻게 하려는 건가. 뭔가가 시커멓게 뒤덮여오는 느낌, 그 예감의 공포에 짓눌려 나는 도망쳤었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나는 부대 안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었다. 욕조에서 내가 본 건 그 깃발이었다. 어젯밤에 그들이 일장기를 태극기로 변신시켰다는 사실이 겨우 이해되었다. 그들의 환성을 들으면서, 깊은 감동에 휩싸였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무라마츠 다케시<조선식민자>(197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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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서 산 일본인들의 역사
[화제의 책] <식민지조선의 일본인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9387
채은하 기자 | 기사입력 2006.05.14.
일제 강점기 시대의 기억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지만, 이 시기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75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의 존재는 잊혀지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는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와 살던 일본인들이야말로 자신이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일상적인 억압과 차별, 착취의 주체가 아니었을까.
다카사키 소지는 책 <식민지조선의 일본인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군인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풀뿌리 침략', '풀뿌리 식민지 지배'를 통해 유지되고 지탱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식민지 지배는 정치가와 군인들에 의해 부추겨졌지만, 일본의 많은 서민이 조선으로 건너온 것은 일본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풀뿌리 침략'"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역사와 전체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역사서다. 이 책은 1876년부터 1945년까지 70년 동안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이 다양한 군상을 통해 일본 식민지배의 특색을 실증적으로 살피고 있다.
다카사키 소지는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조선식민자(朝鮮植民者)>를 서술한 시인 무라마쓰 다케시의 말을 빌어 이렇게 소개한다.
"근현대사에는 많은 식민 지배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들의 역사는 누락돼 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그들의 역사는 상실돼버릴 것이다. 단순히 식민자를 '대국주의적 침략자들'로 말해버리기는 쉽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자신, 나아가서는 일본 민중이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하는 부분은 허상으로 변해버린다."
다카사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이 책의 최종적인 목적은
식민지 조선에서 산 일본인들의 역사
[화제의 책] <식민지조선의 일본인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9387
채은하 기자 | 기사입력 2006.05.14.
일제 강점기 시대의 기억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지만, 이 시기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75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의 존재는 잊혀지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는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와 살던 일본인들이야말로 자신이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일상적인 억압과 차별, 착취의 주체가 아니었을까.
다카사키 소지는 책 <식민지조선의 일본인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군인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풀뿌리 침략', '풀뿌리 식민지 지배'를 통해 유지되고 지탱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식민지 지배는 정치가와 군인들에 의해 부추겨졌지만, 일본의 많은 서민이 조선으로 건너온 것은 일본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풀뿌리 침략'"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역사와 전체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역사서다. 이 책은 1876년부터 1945년까지 70년 동안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이 다양한 군상을 통해 일본 식민지배의 특색을 실증적으로 살피고 있다.
다카사키 소지는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조선식민자(朝鮮植民者)>를 서술한 시인 무라마쓰 다케시의 말을 빌어 이렇게 소개한다.
"근현대사에는 많은 식민 지배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들의 역사는 누락돼 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그들의 역사는 상실돼버릴 것이다. 단순히 식민자를 '대국주의적 침략자들'로 말해버리기는 쉽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자신, 나아가서는 일본 민중이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하는 부분은 허상으로 변해버린다."
다카사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이 책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가 조부모와 부모의 체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잘못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담보를 획득하는 것에 있다"며
"물론 지금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그 옛날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이러한 다카사키의 말은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형식적인 반성들과는 그 층위를 달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조선식민지 지배가 한두 명의 지배자가 아닌 다수의 일본 대중에 의해 견고히 이어져온 것이라면, 그 잔재 역시 일본사회 내에 넓고 견고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반성의 주체와 깊이가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식의 문제로 이어지기에 더욱 중요하다.
일제 말기 조선 내 일본인은 약 75만 명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외무성 등의 관변단체 사료, 일제시대 지방사 자료,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전기와 회고록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해 조선 내 일본인들의 성 · 직업 · 지역별 통계, 각 시기별 인구통계와 그 변화를 보여준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뒤 개항 당시에는 54명에 불과했던 조선 내 일본인이 1895년 말에는 1만 2303명으로 늘어났다. 1900년 전후로 일본에서는 조선 이민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황무지 개척과 이주 어촌 건설이 주창되었으며, 그로 인해 1905년 말에는 조선 내 일본인 수가 4만246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와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화한 일본 정부는 좀더 확실한 한국 지배를 위해 조선으로의 이민을 적극 장려했으며, 그 결과 1910년에는 조선 내 일본인 수가 12만1543명으로 급증했다. 이후 조선 내 일본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14년 말 29만1217명, 1919년 말 34만6619명, 1930년 말 53만 명에 이어 1942년 말에는 75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일본의 작은 부현 정도의 규모였다.
도시의 일본인, 농촌의 조선인
▲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다카사키 소지 지음, 이규수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 2006) ⓒ 프레시안
조선 내 일본인의 지역별 분포는 대단히 불균등해서 경기도와 경상남도에 거의 절반이 거주했다. 이는 서울과 부산 같은 대도시에 일본인이 집중됐음을 나타낸다. 일제 말기에는 만주침략정책과 군수공업화 정책과 연관되어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일본인 수가 급증했지만, 반대로 농촌 지역에서는 일본인의 비중이 별로 높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은 조선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세계에서 조선인을 착취함으로써 귀족생활을 영위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1908년 신마산에서 태어난 조선사 연구자 하타다 다카시는 '나는 조선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일본인 거리에서 살면서 일본인 소학교를 다녔고 일본풍 생활양식 안에서 생활했다. 따라서 조선인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는 없었다. 우리는 조선에 대해 무지했다. … 당시를 회상할 때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조선인의 궁핍한 생활이다. 의식주 그 무엇을 보더라도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훨씬 빈곤했다'라고 한다" (79~80쪽)
도시의 일본인은 풍부한 식량을 누리고 좋은 집에 살며 조선인을 집안 일꾼으로 부려가며 풍족한 삶을 살았다. 한편 농촌의 조선인은 각종 공출과 착취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대구에서 출생한 모라자키 가즈에는 1934년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쌀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했다. 주위에 농사를 짓던 일본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모라자키는 나중에 ' 그것은 무엇보다 식민지시대 일본인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썼다." (165쪽)
그리고 물론 일본인들은 그들에게 '미개인'인 조선인을 당연한 착취의 대상을 여겼을 뿐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구로의 연구에 따르면 집에 '어머니'라 불리던 조선인 하녀를 데리고 있던 사람은 35명 가운데 26명이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어머니'가 어떤 인물인지에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인격이 없는 도구, 로봇과 같은 존재'였다." (176쪽)
이 책을 번역한 이규수 교수는 역자후기에서 " 물론 일본인 내부에도 계층차이는 존재했다. 조선은 일본 자본주의 모순의 분출구이자 생명선이었다. 이 결과 식민지에 진출한 일본인은 군인과 관료를 비롯해 지주나 자본가는 물론 말단의 서민층까지 포함한 '단일형' 진출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식민지 지배구조는 지배계층의 비호 아래 이름 모를 수많은 민간인을 통해 유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식민지 사회는 총독부 관리와 군인 체계를 정점으로 해서 지주와 상인을 비롯한 각종 비생산 부문에 종사하는 다수 일본인이 지배하는 피라미드 구조 아래 대다수 조선인이 존재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 가지 유형의 조선 내 일본인
다카사키 소지는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제1유형은 자신들의 행동이 훌륭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부류, 제2유형은 순진하게 식민지 조선을 그리워하는 부류, 그리고 제3유형은 자기비판을 하는 부류다.
다카사키는 제1유형의 일본인으로 불이흥업주식회사 사장 후지이 간타로의 딸 이노하라 도시코를 든다. 제1유형의 일본인은 일제가 퍼트린 왜곡된 식민의식을 그대로 믿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식민의식을 실천하고 전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는) '불이흥업의 뛰어난 업적은 일본의 조선 통치사에서 일개 민간회사가 반도의 국리만복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영원히 이름을 남길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조선 실정에 정통하다고 자부한다. 그녀는 '조선에서는 잡곡의 조식화가 보통이다. 조선인은 오히려 쌀보다 잡곡을 좋아한다'며 '그런데도 일본이 조선에서 착취 정치를 시행한 것처럼 기록하는, 실정을 조금도 모르는 탁상공론의 무서움'을 개탄했다." (190쪽)
제2유형의 일본인은 대부분 정치적 의도와 상관없이 조선을 추억하는 이들로 조선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일본인이다. 이들에게 조선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지닌 한 공간일 따름이다.
"이들의 회고담을 보면 흔히 다음과 같은 그리움이 표출되어 있다. '내게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아카시아 꽃향기 나는 경성 거리에 살 것이다. 우거진 남산 기슭의 삼판소학교에서 그리운 선생님을 모시고, 옛 친구들과 함께 배우는 길을 주저없이 택할 것이다." (193쪽)
제3유형의 일본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한다. 이들은 다카사키 소지와 같이 일본의 식민 지배가 잘못된 일이며 이러한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에서 태어나 여학교를 다닌 모라자키 가즈에는 '총독부 자료를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의 생활이 바로 침략인 것이다. 조선에 있을 때는 만세사건도 몰랐다. 패전 이후 언젠가 한번은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다. 방문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일본인이 되어서 말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 (193~194쪽)
현재의 일본인은 어떤 유형인가?
다카사키는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 조선 내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일본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궁금해 하면서 '집필을 마치면서 새삼 떠오른 것은 조선 내의 일본인의 역사를 절대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글을 맺고 있다.
이규수 교수는 "나는 향후 일본 사회에 다카사키가 말한 제1유형의 일본인들이 급증하리라는 예감에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며 "일본인 그리고 동아시아인 모두가 자국의 과거와 현재 역사에 책임감을 지니고, 연대하는 아시아의 미래를 향해 대안을 마련해가는 제3유형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역사 연구자들의 더욱 실천적인 연구가 긴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각성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다카사키의 말은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형식적인 반성들과는 그 층위를 달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조선식민지 지배가 한두 명의 지배자가 아닌 다수의 일본 대중에 의해 견고히 이어져온 것이라면, 그 잔재 역시 일본사회 내에 넓고 견고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반성의 주체와 깊이가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식의 문제로 이어지기에 더욱 중요하다.
일제 말기 조선 내 일본인은 약 75만 명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외무성 등의 관변단체 사료, 일제시대 지방사 자료,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전기와 회고록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해 조선 내 일본인들의 성 · 직업 · 지역별 통계, 각 시기별 인구통계와 그 변화를 보여준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뒤 개항 당시에는 54명에 불과했던 조선 내 일본인이 1895년 말에는 1만 2303명으로 늘어났다. 1900년 전후로 일본에서는 조선 이민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황무지 개척과 이주 어촌 건설이 주창되었으며, 그로 인해 1905년 말에는 조선 내 일본인 수가 4만246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와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화한 일본 정부는 좀더 확실한 한국 지배를 위해 조선으로의 이민을 적극 장려했으며, 그 결과 1910년에는 조선 내 일본인 수가 12만1543명으로 급증했다. 이후 조선 내 일본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14년 말 29만1217명, 1919년 말 34만6619명, 1930년 말 53만 명에 이어 1942년 말에는 75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일본의 작은 부현 정도의 규모였다.
도시의 일본인, 농촌의 조선인
▲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다카사키 소지 지음, 이규수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 2006) ⓒ 프레시안
조선 내 일본인의 지역별 분포는 대단히 불균등해서 경기도와 경상남도에 거의 절반이 거주했다. 이는 서울과 부산 같은 대도시에 일본인이 집중됐음을 나타낸다. 일제 말기에는 만주침략정책과 군수공업화 정책과 연관되어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일본인 수가 급증했지만, 반대로 농촌 지역에서는 일본인의 비중이 별로 높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은 조선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세계에서 조선인을 착취함으로써 귀족생활을 영위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1908년 신마산에서 태어난 조선사 연구자 하타다 다카시는 '나는 조선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일본인 거리에서 살면서 일본인 소학교를 다녔고 일본풍 생활양식 안에서 생활했다. 따라서 조선인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는 없었다. 우리는 조선에 대해 무지했다. … 당시를 회상할 때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조선인의 궁핍한 생활이다. 의식주 그 무엇을 보더라도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훨씬 빈곤했다'라고 한다" (79~80쪽)
도시의 일본인은 풍부한 식량을 누리고 좋은 집에 살며 조선인을 집안 일꾼으로 부려가며 풍족한 삶을 살았다. 한편 농촌의 조선인은 각종 공출과 착취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대구에서 출생한 모라자키 가즈에는 1934년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쌀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했다. 주위에 농사를 짓던 일본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모라자키는 나중에 ' 그것은 무엇보다 식민지시대 일본인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썼다." (165쪽)
그리고 물론 일본인들은 그들에게 '미개인'인 조선인을 당연한 착취의 대상을 여겼을 뿐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구로의 연구에 따르면 집에 '어머니'라 불리던 조선인 하녀를 데리고 있던 사람은 35명 가운데 26명이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어머니'가 어떤 인물인지에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인격이 없는 도구, 로봇과 같은 존재'였다." (176쪽)
이 책을 번역한 이규수 교수는 역자후기에서 " 물론 일본인 내부에도 계층차이는 존재했다. 조선은 일본 자본주의 모순의 분출구이자 생명선이었다. 이 결과 식민지에 진출한 일본인은 군인과 관료를 비롯해 지주나 자본가는 물론 말단의 서민층까지 포함한 '단일형' 진출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식민지 지배구조는 지배계층의 비호 아래 이름 모를 수많은 민간인을 통해 유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식민지 사회는 총독부 관리와 군인 체계를 정점으로 해서 지주와 상인을 비롯한 각종 비생산 부문에 종사하는 다수 일본인이 지배하는 피라미드 구조 아래 대다수 조선인이 존재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 가지 유형의 조선 내 일본인
다카사키 소지는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제1유형은 자신들의 행동이 훌륭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부류, 제2유형은 순진하게 식민지 조선을 그리워하는 부류, 그리고 제3유형은 자기비판을 하는 부류다.
다카사키는 제1유형의 일본인으로 불이흥업주식회사 사장 후지이 간타로의 딸 이노하라 도시코를 든다. 제1유형의 일본인은 일제가 퍼트린 왜곡된 식민의식을 그대로 믿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식민의식을 실천하고 전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는) '불이흥업의 뛰어난 업적은 일본의 조선 통치사에서 일개 민간회사가 반도의 국리만복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영원히 이름을 남길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조선 실정에 정통하다고 자부한다. 그녀는 '조선에서는 잡곡의 조식화가 보통이다. 조선인은 오히려 쌀보다 잡곡을 좋아한다'며 '그런데도 일본이 조선에서 착취 정치를 시행한 것처럼 기록하는, 실정을 조금도 모르는 탁상공론의 무서움'을 개탄했다." (190쪽)
제2유형의 일본인은 대부분 정치적 의도와 상관없이 조선을 추억하는 이들로 조선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일본인이다. 이들에게 조선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지닌 한 공간일 따름이다.
"이들의 회고담을 보면 흔히 다음과 같은 그리움이 표출되어 있다. '내게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아카시아 꽃향기 나는 경성 거리에 살 것이다. 우거진 남산 기슭의 삼판소학교에서 그리운 선생님을 모시고, 옛 친구들과 함께 배우는 길을 주저없이 택할 것이다." (193쪽)
제3유형의 일본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한다. 이들은 다카사키 소지와 같이 일본의 식민 지배가 잘못된 일이며 이러한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에서 태어나 여학교를 다닌 모라자키 가즈에는 '총독부 자료를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의 생활이 바로 침략인 것이다. 조선에 있을 때는 만세사건도 몰랐다. 패전 이후 언젠가 한번은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다. 방문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일본인이 되어서 말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 (193~194쪽)
현재의 일본인은 어떤 유형인가?
다카사키는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 조선 내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일본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궁금해 하면서 '집필을 마치면서 새삼 떠오른 것은 조선 내의 일본인의 역사를 절대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글을 맺고 있다.
이규수 교수는 "나는 향후 일본 사회에 다카사키가 말한 제1유형의 일본인들이 급증하리라는 예감에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며 "일본인 그리고 동아시아인 모두가 자국의 과거와 현재 역사에 책임감을 지니고, 연대하는 아시아의 미래를 향해 대안을 마련해가는 제3유형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역사 연구자들의 더욱 실천적인 연구가 긴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각성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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