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e-You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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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유감...>
'서울의 봄'을 나도 봤다. 그냥 영화로 보면 되지 뭔 유감이냐고? 아래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아래는 내가 2021년 집필한 <5.18 광주항쟁과 미국책임론: Revisited>의 결론부분이다. 영화는 전두광과 이태신의 갈등선을 중심에 놓고 즉 전의 권력의지와 이의 '군인정신'사이에 반전에 반전이라는 영화적 창작을 통해 흥미를 고취시켰다. 하지만 창작과 사실을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소결:
- 요컨대 1979-80년 한국위기에서 카터이하 미행정부의 핵심엘리트의 인식체계는 미국익(안보 즉 현상유지) vs (현상변경을 함축한) 한국민주화라는 매우 경직되고 편협한 시각에 포획되어 있었음. 특히 민주화의 주체설정에 있어 이들에게 한국의 학생 및 시민운동은 급진혁명주의 좌파로 이해되고 있었고 3김을 비롯한 보수-자유주의 야권은 전혀 대안세력으로(“… 우리가 제거하려는 까마귀(전두환일파 – 역자)를 대체할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백로를 찾을 수 없을 것”(글라이스틴 1999, p.154) 자리매김 되지 않았음. 처음부터 배제대상이었던 것. 또 온건보수지만 무능했던 최규하대행 역시 마찬가지. 뿐만 아니라 당시 군부내 反전두환그룹의 ‘역쿠데타’나 미국주도의 전두환제거 움직임 모두가 한국군 간의 무력충돌 리스크때문에 사실상 배제 (“전두환의 군부내 지지세력으로 인해 그의 제거 자체가 힘들 뿐 아니라 그렇게 된다 해도 누가 그를 대신할 강자가 될 것인지도 문제다”, 글라이스틴 1999, P.143) 결국 완전히 맘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권력 탈취를 완료한, 그렇지만 미국의 승인과 지지에 목말라 했던 전두환일파야 말로 차선의 현실적 옵션.
- 全선택은 철저히 안보를 빌미삼은 미행정부 보수적 안보지상주의, 냉전주의 레알폴리틱의 결과물. 이 근저에는 신군부는 물론이고 한국인 전체와 한국사회의 ‘미성숙’을 전제, 이를 타자화시키는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이 깔려 있음. (“한국사회의 이질적 집단들에게 정도를 벗어나는 행동의 위험과 내부 결속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어른스런 잔소리꾼의 역할을 지속“, “양국관계 초기에 이룩된 습관에서 미국은 거리낌없이 한국을 ‘타이르고’ 국내문제에 개입“, 글라이스틴 1999, p.153, 60) 특히나 광주의 ‘비극성’은 카터의 도덕주의, 이상주의 외교를 안으로부터 비토했던 보수적, 권위주의적 외교 노멘클라투라 (예컨대 홀부룩-글라이스틴 라인) 혹은 외교안보귀족들이 ‘하필이면’ 실무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던 데에도 기인함.
- 덧붙여 당시 상황에서 글라이스틴이 위기관리를 총괄했다면, 군사쪽은 한미연합사=주한미군=UN사 사령관 존 위컴이 정보쪽은 브루스터 CIA 한국 지부장이 담당. 흥미로운 점은 위컴의 특별고문(special Advisor)이 저 전설의 도살자(?)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군 창군의 산파, 4.3 과 여순사건, 한강인도교 폭파 그리고 무엇보다 케네디행정부시절 5.16의 배후 설계자등 한국현대사의 굽이마다 그 음침한 음모의 촉수를 뻗치고 있었던 그 자, 하우스만이 12.12쿠데타 정보를 사전에 위컴과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 1981년 7월 하우스만이 35년동안 한국군부를 쥐락펴락하던 그가 한국을 떠날 때 수방사령관 노태우중장은 이 ‘영원한 친구'에게 감사패를 헌정함.
- 위컴은 당시 합참의장 이형근으로부터 12.12. 전인 11월말에서 12월초 사이 육사11.12기가 주축이 되어 군사적 소요와 반란을 조장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를 노재현국방장관과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에게 전달했다고 함. 그리고 이 정보를 하우스만과도 공유했다고 함. (박원곤 2010, “1979년 12.12 쿠데타와 카터 미 행정부의 대응 : 도덕외교의 타협”, [국제정치논총], 50(4), 2010.9, P. 85) 하지만 하우스만은 주한미군사령관 특별고문이라는 ‘화이트’ 직책으로 50년대부터 활동하던 사실상 미육군방첩대(CIC) 책임자로서 미 국방부과 직보라인을 갖고 있었던 한국군부에 가장 정통한 40년 ‘말뚝’이라고 알려져 있음. 아래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히듯 하우스만이 10.26이후 차기 파워그룹을 물색하고 있었다면 위컴의 정보소스에 대해선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임. 특히 위컴은 1980.8.27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10월 사태이후 미국이 한국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전두환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보람도 크다.”(김준형 2021, p.177 재인용)
- 조갑제와 하우스만의 인터뷰: “10·26사건 뒤 하우스맨 씨를 실장으로 하는 미8군 사령관 고문관실의 정보팀은 권력의 공백을 메울 세력이 누구인가를 탐색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리는 朴대통령의 죽음을 지배층의 붕괴라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한 지도자의 죽음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朴대통령을 지탱하여 온 여러 파워 그룹들이 朴대통령이 죽었다고 해서 권력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이제는 우리가 나설 때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여러 파워 그룹 중에서 군대와 경제계가 가장 발달해 있고 정당이 가장 낙후돼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당이 권력의 공백을 메워야 민주화가 되는데 그럴 힘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729&C_CC=AC)
글라이스틴이 회고록에 기술한 내용만을 놓고 본다면 全그룹은 탁월한 정치감각을 지닌 그래서 미국의 속내를 꿰뚫고 있는 인물임에 분명. 글라이스틴은 10.26 한 달전인 9.26에 김재규를, 12.12 이틀후엔 전두환을 만나고 특히 5.17 열흘전에는 다시 전두환을 면담. 그리고 그 사이엔 CIA한국 지부장 브루스터가 공식채널로 단독 혹은 글라이스틴 스스로 인정하듯 자신을 대신해 수시로 만남. 그럼에도 ‘교활한’ 전두환이 미국의 안보공약을 이용해 미국을 속이고 모든 잘못을 미국에 덮어 씌우려 했다고 비난. 그러나 5.16당시 김종필의 배후에 하우스만이 있었듯이 전그룹이 순수 자력으로 모든 판단을 내렸을 지는 의문임. 다소 음모론적으로 들리지만 하우스만과 신군부의 관계는 거의 해명이 안 된 상태. 미국책임론을 벗어나기 위한 글라이스틴의 논리 - 즉 ‘대규모 개입, 한정된 영향력(MASSIVE ENTAGLEMENT, MARGINAL INFLUENCE)’ – 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미대사관과 본국사이 공식기밀전문보다 더 수면아래의 비공식적 의사결정 –물론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 에 대한 상세검증이 필요. "
박성우
박스안의 인형에게
선택권이 있을까요?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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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Young Lee
박성우 ㅎㅎ 그러게요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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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형
엊그제 김진명 선생의 유튜브를 보니 하우스만의 참여(공작?)을 언급하고 있는듯 했습니다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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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Young Lee
서인형 김진명?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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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형
Hae-Young Lee https://m.youtube.com/watch?v=5fzokiG8MBg
"'이 인물'을 주목해야 합니다" '서울의 봄'이 오지 않았던 진짜 이유 | 소설가 김진명의 빅퀘스천(선공개) #대한민국 #근현대사
YOUTUBE.COM
"'이 인물'을 주목해야 합니다" '서울의 봄'이 오지 않았던 진짜 이유 | 소설가 김진명의 빅퀘스천(선공개) #대한민국 #근현대사
"'이 인물'을 주목해야 합니다" '서울의 봄'이 오지 않았던 진짜 이유 | 소설가 김진명의 빅퀘스천(선공개) #대한민국 #근현대사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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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형
Hae-Young Lee https://wisdom-life.tistory.com/.../%EA%B9%80%EC%A7%84%EB...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4> 박정희 죽음의 진실
WISDOM-LIFE.TISTORY.COM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4> 박정희 죽음의 진실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4> 박정희 죽음의 진실
22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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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표
한국현대사 중요 시점 곳곳에 미국이 개입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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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es Song
기독교 목사들 간에 공공연히 돌던 이야기 가운데 카터에게 전두환 장군의 애국심과 참군인다움 그리고 미국존중의 덕성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한국의 아버지 같은 지도격 목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경직, 김장환. 그리고 강원룡 등등
그래서 카터는 전두환을 인정하게 됐다는 이야기죠.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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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덕
Moses Song 강원용은 거기 들어갈 일이 없는데요. 마지못해 국정자문위원이 된 것은 전이 청와대 들어간 다음입니다.
21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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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당삼봉
한심한 나라.ㅠㅠ
10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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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 Gook Kim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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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유감...>
'서울의 봄'을 나도 봤다. 그냥 영화로 보면 되지 뭔 유감이냐고? 아래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아래는 내가 2021년 집필한 <5.18 광주항쟁과 미국책임론: Revisited>의 결론부분이다. 영화는 전두광과 이태신의 갈등선을 중심에 놓고 즉 전의 권력의지와 이의 '군인정신'사이에 반전에 반전이라는 영화적 창작을 통해 흥미를 고취시켰다. 하지만 창작과 사실을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소결:
- 요컨대 1979-80년 한국위기에서 카터이하 미행정부의 핵심엘리트의 인식체계는 미국익(안보 즉 현상유지) vs (현상변경을 함축한) 한국민주화라는 매우 경직되고 편협한 시각에 포획되어 있었음. 특히 민주화의 주체설정에 있어 이들에게 한국의 학생 및 시민운동은 급진혁명주의 좌파로 이해되고 있었고 3김을 비롯한 보수-자유주의 야권은 전혀 대안세력으로(“… 우리가 제거하려는 까마귀(전두환일파 – 역자)를 대체할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백로를 찾을 수 없을 것”(글라이스틴 1999, p.154) 자리매김 되지 않았음. 처음부터 배제대상이었던 것. 또 온건보수지만 무능했던 최규하대행 역시 마찬가지. 뿐만 아니라 당시 군부내 反전두환그룹의 ‘역쿠데타’나 미국주도의 전두환제거 움직임 모두가 한국군 간의 무력충돌 리스크때문에 사실상 배제 (“전두환의 군부내 지지세력으로 인해 그의 제거 자체가 힘들 뿐 아니라 그렇게 된다 해도 누가 그를 대신할 강자가 될 것인지도 문제다”, 글라이스틴 1999, P.143) 결국 완전히 맘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권력 탈취를 완료한, 그렇지만 미국의 승인과 지지에 목말라 했던 전두환일파야 말로 차선의 현실적 옵션.
- 全선택은 철저히 안보를 빌미삼은 미행정부 보수적 안보지상주의, 냉전주의 레알폴리틱의 결과물. 이 근저에는 신군부는 물론이고 한국인 전체와 한국사회의 ‘미성숙’을 전제, 이를 타자화시키는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이 깔려 있음. (“한국사회의 이질적 집단들에게 정도를 벗어나는 행동의 위험과 내부 결속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어른스런 잔소리꾼의 역할을 지속“, “양국관계 초기에 이룩된 습관에서 미국은 거리낌없이 한국을 ‘타이르고’ 국내문제에 개입“, 글라이스틴 1999, p.153, 60) 특히나 광주의 ‘비극성’은 카터의 도덕주의, 이상주의 외교를 안으로부터 비토했던 보수적, 권위주의적 외교 노멘클라투라 (예컨대 홀부룩-글라이스틴 라인) 혹은 외교안보귀족들이 ‘하필이면’ 실무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던 데에도 기인함.
- 덧붙여 당시 상황에서 글라이스틴이 위기관리를 총괄했다면, 군사쪽은 한미연합사=주한미군=UN사 사령관 존 위컴이 정보쪽은 브루스터 CIA 한국 지부장이 담당. 흥미로운 점은 위컴의 특별고문(special Advisor)이 저 전설의 도살자(?)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군 창군의 산파, 4.3 과 여순사건, 한강인도교 폭파 그리고 무엇보다 케네디행정부시절 5.16의 배후 설계자등 한국현대사의 굽이마다 그 음침한 음모의 촉수를 뻗치고 있었던 그 자, 하우스만이 12.12쿠데타 정보를 사전에 위컴과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 1981년 7월 하우스만이 35년동안 한국군부를 쥐락펴락하던 그가 한국을 떠날 때 수방사령관 노태우중장은 이 ‘영원한 친구'에게 감사패를 헌정함.
- 위컴은 당시 합참의장 이형근으로부터 12.12. 전인 11월말에서 12월초 사이 육사11.12기가 주축이 되어 군사적 소요와 반란을 조장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를 노재현국방장관과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에게 전달했다고 함. 그리고 이 정보를 하우스만과도 공유했다고 함. (박원곤 2010, “1979년 12.12 쿠데타와 카터 미 행정부의 대응 : 도덕외교의 타협”, [국제정치논총], 50(4), 2010.9, P. 85) 하지만 하우스만은 주한미군사령관 특별고문이라는 ‘화이트’ 직책으로 50년대부터 활동하던 사실상 미육군방첩대(CIC) 책임자로서 미 국방부과 직보라인을 갖고 있었던 한국군부에 가장 정통한 40년 ‘말뚝’이라고 알려져 있음. 아래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히듯 하우스만이 10.26이후 차기 파워그룹을 물색하고 있었다면 위컴의 정보소스에 대해선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임. 특히 위컴은 1980.8.27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10월 사태이후 미국이 한국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전두환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보람도 크다.”(김준형 2021, p.177 재인용)
- 조갑제와 하우스만의 인터뷰: “10·26사건 뒤 하우스맨 씨를 실장으로 하는 미8군 사령관 고문관실의 정보팀은 권력의 공백을 메울 세력이 누구인가를 탐색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리는 朴대통령의 죽음을 지배층의 붕괴라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한 지도자의 죽음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朴대통령을 지탱하여 온 여러 파워 그룹들이 朴대통령이 죽었다고 해서 권력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이제는 우리가 나설 때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여러 파워 그룹 중에서 군대와 경제계가 가장 발달해 있고 정당이 가장 낙후돼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당이 권력의 공백을 메워야 민주화가 되는데 그럴 힘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729&C_CC=AC)
글라이스틴이 회고록에 기술한 내용만을 놓고 본다면 全그룹은 탁월한 정치감각을 지닌 그래서 미국의 속내를 꿰뚫고 있는 인물임에 분명. 글라이스틴은 10.26 한 달전인 9.26에 김재규를, 12.12 이틀후엔 전두환을 만나고 특히 5.17 열흘전에는 다시 전두환을 면담. 그리고 그 사이엔 CIA한국 지부장 브루스터가 공식채널로 단독 혹은 글라이스틴 스스로 인정하듯 자신을 대신해 수시로 만남. 그럼에도 ‘교활한’ 전두환이 미국의 안보공약을 이용해 미국을 속이고 모든 잘못을 미국에 덮어 씌우려 했다고 비난. 그러나 5.16당시 김종필의 배후에 하우스만이 있었듯이 전그룹이 순수 자력으로 모든 판단을 내렸을 지는 의문임. 다소 음모론적으로 들리지만 하우스만과 신군부의 관계는 거의 해명이 안 된 상태. 미국책임론을 벗어나기 위한 글라이스틴의 논리 - 즉 ‘대규모 개입, 한정된 영향력(MASSIVE ENTAGLEMENT, MARGINAL INFLUENCE)’ – 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미대사관과 본국사이 공식기밀전문보다 더 수면아래의 비공식적 의사결정 –물론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 에 대한 상세검증이 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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