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칼럼]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 조선닷컴 - 오피니언
[윤평중 칼럼]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조선일보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음성으로 읽기기사 스크랩 이메일로 기사공유 기사 인쇄 글꼴 설정
100자평14
좋아요80
페이스북 공유17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네이버블로그 공유
기사 URL공유
입력 2020.05.01 03:20
정치의 본질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 성과를 내는 데 있어
문 정부 약점은 대북 정책처럼 통치자 주관적 소망을 엄혹한 현실에 앞세우는 것
한국 보수의 침몰도 변한 현실을 외면했기 때문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21대 총선으로 문재인 정부가 거대 단일 권력을 완성했다. 행정·사법·입법 3부를 한 정파가 장악한 건 '87년 체제' 초유의 일이다. 코로나 재앙으로 백척간두에 선 민생과 국가 경제를 살리라는 총선 민심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와중에 남북 평화경제론을 다시 들고나왔다. 관념적 이상론이다. 대북 국제 제재와 코로나 사태에 김정은 권력의 불확실성까지 겹친 지금은 전면적 남북 교류의 적기(適期)가 아니다. 한반도 평화의 꿈으로 추진한 세 번의 남북 정상회담과 두 번의 북·미 정상회담도 이상주의의 거품이 끼었다.
핵을 가진 북한 유일체제와 국제정치의 장벽을 한국 대통령의 주관적 의지로 넘어서는 데는 근본 한계가 있다. 북한을 예의 주시하면서 자체 변화를 기다리는 게 맞는다. '김정은 유고설(有故說)' 이전에도 북한이 퍼붓던 대남(對南) 비난과 조롱이 입증하는 그대로다. 북한 반응에 집착하는 것보다 우리 경제를 살리는 게 먼저다. 대북 정책이 입증하듯 통치자의 주관적 소망을 엄혹한 현실보다 앞세우는 게 문재인 정부의 약점이다. 소득 주도 성장과 탈원전 정책은 국민경제의 객관적 현실을 경시한 관념적 이상주의의 폐해(弊害)를 웅변한다.
이솝 우화의 '허풍쟁이 여행자'가 정곡을 찌른다. 고대 그리스에서 한 육상 선수가 흰소리를 일삼았다. 왕년에 자신이 로도스섬에서 열린 5종 경기에 참가해 뜀뛰기 신기록을 세웠다는 자랑이다. 그러자 동네 사람이 '여기를 로도스로 상정하고 여기서 뛰어보라'고 꼬집는다. 진짜 능력은 지금 현장에서 입증되어야 한다는 일침이다. 특히 정치의 본질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 성과를 내는 데 있다.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를 통합적 국가 철학으로 승화시킨다. 아무리 숭고한 이념일지언정 그 정당성은 피 튀기는 현실 안에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입론이다.
정치의 핵심인 현실은 항상 복합적이고 입체적이다. 코로나 사태 초기 문재인 정부가 외국인 입국을 열어놓은 건 실책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질병관리본부와 의료계를 비롯한 현장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경청한 게 반전(反轉)의 계기가 되었다. 그게 시민사회의 자발성과 융합하면서 세계를 찬탄케 한 'K방역'으로 승화되었다. 의미심장한 교훈이다. 경제 운용과 외교 안보, 원전 정책도 코로나 대응 못지않은 고도의 전문 영역이다. 위정자의 이상론은 현실 속에서 엄격하게 검증되어야 한다.
한국 보수의 침몰도 현실을 외면한 데서 왔다. 세상은 변했는데 냉전반공주의와 천민자본주의 패러다임에 집착했다. 정의와 공정, 연대와 공존의 21세기 시대정신을 거스른 채 산업화 시대의 박정희 신화에 매몰되었다. 옛것은 사라졌는데 새 가치엔 무관심했다. 보수 일각의 총선 개표 부정(不正) 의혹 제기는 보수의 자폐적 극단화를 가리키는 징후다. 이들은 개표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통계 전문가들의 합리적 반론에 대해서조차 격노한다. 환골탈태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배신자로 매도한다. 보수가 현실감을 잃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현실을 부정(否定)하는 분노만으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보수 정치의 앞날에도 실마리는 있다. 승자 독식 소선거구제에 따른 2배 가까운 의석수 차이와는 달리 전국 253개 지역구 정당 득표율은 민주당 49.9%, 통합당 41.5%로 8.4%포인트 격차다. 득표 수는 243만표 차이다. 비례대표 득표율은 오히려 앞섰다. 보수가 정의와 공정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공감과 연대의 시민적 덕목을 육화해 헤쳐 모이면 차기 대선에서 건곤일척의 승부가 가능하다는 물증이다. 지금 통합당 상태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게 된다'는 것도 한국 정치의 교훈이다.
일본 자민당처럼 정치 지형 변화가 민주당 우위의 1.5당 체제를 공고하게 한다는 가설도 시류에 편승한 담론이다. 노무현 정권이 폐족(廢族)을 자인하고 보수 장기 집권론이 대세였던 게 불과 10년 전 일이다. 1당 장기 집권론은 역동적 한국 민주주의와 정면에서 충돌한다. 현대 정치사가 웅변한다. 앞으로 2년간 한국을 강타할 총체적 경제 위기는 우리 사회 특유의 정치적 가변성을 극대화한다. 차기 대선은 공정과 정의에 굶주린 민심이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역사의 시간이 될 것이다. 바로 여기가 로도스다. 한국 정치의 기호지세(騎虎之勢)는 긴박한 시대정신에 담대히 뛰어오르는 자의 몫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30/2020043002007.html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