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룡丁海龍(1913~1969) / 정해진 : 네이버 블로그
정해룡丁海龍(1913~1969) / 정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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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나라
2013. 1. 24. 17:57
봉강 정해룡 선생.
앞줄 가운데 봉강의 조부 珏壽 선생, 뒷줄 왼쪽 부 鍾翊 선생
중도 민족주의와 혁신계, 정해룡丁海龍(1913~1969)
해방 이후 우리 나라의 현실은 단지 통일을 주장하는 것조차도 용공분자로 낙인찍힐 정도로 중도세력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 왜곡된 현실에서 평생 중도 민족주의노선만을 추구하다가 한 번도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사라져 간 사람들이 있다. 그 중 전남 지역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봉강鳳崗 정해룡이다.
그는 1913년 7월 2일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정종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봉강리에서만 13대를 이어 내려온 영광 정씨 문중의 종가로, 할아버지대에 가산을 일으켜 1년에 3,000석을 수확했다는 천석지기 부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7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했다. 완고한 할아버지는 집에 독선생을 모셔 놓고 그에게 한학을 가르치면서, 신학문을 접할 기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당시 성행하기 시작한 서양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결국 1929년부터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통해 그것을 배우기 시작해 소정의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그의 동생인 정해진에게 신학문을 익히게 하여 경성제대를 거쳐 동경제대 대학원까지 수료하게 했다.
아마도 이렇게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그는 민족의 현실과 인간애에 눈을 뜬 것 같다. 그는 17세이던 1929년 대흉년이 들어 인근에 아사자가 속출하자 조부 명의로 곡식 수백 석을 면민에게 희사했다. 이와 같은 궁민에 대한 구휼활동은 이후 1943년의 대흉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1930년대 초반 인촌 김성수가 방문해 보성전문에 기부금을 부탁하자 조부 명의로 논 200두락을 희사하기도 했다.
정해룡이 본격적으로 현실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사회운동은 1938년 향리에 설립한 양정원(현 회천서교 전신)이었다. 평소 민족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그는 인근에 훌륭한 선생으로 칭송이 자자하던 윤승원과의 만남을 통해 그 꿈을 실현할 계기를 찾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유인 향리 어귀의 땅 2,000평에 사비를 들여 건물을 짓고, 학생들을 모집해 무상으로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양정원은 그가 원장을 맡아 운영을 전담했고, 학생들의 교육에 관련된 부분은 윤승원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또한 그는 1940년 무렵부터는 항일운동가들과 자주 회합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으며, 또한 동생을 통해 국제공산당에도 자금을 기부했다.
한편 그는 자신의 부를 배경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다. 그가 최초로 만든 사업체는 보성인쇄소이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 따르면 1934년 12월 28일에 설립된 보성인쇄소는 자본금이 25,000원으로 신문사를 제외하고는 전남에서 가장 큰 규모였는데 대표취체역이 정해룡이었다.
1940년대 초반 정해룡은 총독부 개척 단원으로 신분을 위장해 만주를 방문하고 그곳 활동가들과 연결을 시도했다고 한다. 또 그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 동안 서대문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동맹에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그의 지향점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45년 해방 직전에 그는 대지 일부와 전답 대부분을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했다. 또한 종문서를 태워 버리고, 그들에게 일정 정도의 농지를 나누어 주면서 나가 살게 했다. 당시만 해도 생경했던 이러한 일들은 인간평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정해룡의 주변에도 커다란 변화가 다가왔다. 그는 해방 직후 열린 면민대회에서 건준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상경해 여운형의 영향하에서 정계에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여운형이 근로인민당 결성을 준비하던 1947년 3월, 중앙준비위원회 38인 중 일원이 되었고, 1947년 5월 24일 근민당 창당대회가 열렸을 때 중앙위원으로 당의 재정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죽는 날까지 여운형노선을 고수하면서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날로 심각해지는 좌우익 간의 대립구도 속에서 여운형의 중도민족주의노선은 점차 설 땅을 잃어 가고 있었다. 결국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근민당의 정치적 지향도 좌절되었다. 이런 상황에 염증을 느낀 그는 여운형의 장례식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하지만 장건상, 김성숙을 중심으로 당이 재건되자, 그도 이에 참여하고 서울과 보성을 오가면서 당 업무에 몰두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없는 근민당은 계속되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결국 1949년 10월 19일 정부가 남로당 등 133개 정당과 사회 단체의 등록을 취소할 때, 그들과 운명을 함께 하고 말았다.
당시 정해룡은 분단의 상징인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그의 전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체포되어 두 세 달 동안을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또한 1950년 5ㆍ30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가 용공주의자로 규정한 경찰의 불법적인 방해공작으로 낙선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동안의 덕행에 힘입어선 지 한국전쟁 때의 학살극에서는 무사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폭압정치를 피해 은둔하던 그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1957년이었다. 그 해도 마무리되어가던 11월 16일 그는 장건상, 김성숙 등과 함께 근민당 재건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진보당사건과 마찬가지로 그 동안 암암리에 성장해 온 혁신계를 탄압하려는 정치적 성격이 강한 사건이었다. 당시 사형까지 당한 진보당과 달리 근민당 관련자들은 재판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4ㆍ19로 혁신계의 정치활동이 해빙기를 맞이했던 1960년이었다. 당시 중앙의 혁신계 정치인들은 사회대중당을 결성하였는데, 정해룡과 그의 동지들도 참여했다. 그는 1960년 7ㆍ29선거에서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원의 자격으로 보성에서 출마했다가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혁신계의 참패로 종결된 7ㆍ29선거 이후 사회대중당이 통일사회당과 사회당으로 분열된 후, 그는 김성숙과의 교분 때문에 통일사회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5ㆍ16쿠데타로 혁신계 인사들은 또다시 된서리를 맞아야만 했다. 그는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전국적으로 검거선풍이 몰아치던 5월 18일 보성 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죄목은 통일사회당 활동을 근거로 ‘특수반국가행위’라는 것이었는데, 이것 자체가 사후 입법이었기 때문에 그의 구속은 불법이었다. 그는 1962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집에서 은신하던 그는 생애 마지막으로 다시 정계에 뛰어들었다. 1967년도 대선을 앞두고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창당한 대중당에 전당대회 의장 겸 정치훈련장으로 참여한 것이다. 당시 보수파인 서민호 측에 가담한 이유를 묻는 한 후배에게 그는 “월파(서민호의 호)같은 골수 보수정객이 아니고서는 군사파쇼 치하에서 혁신정당의 기치를 내걸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서…”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혁신계 동지들은 1967년의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주장했고, 결국 서민호는 선거 직전에 후보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이후 향리를 떠나지 않았던 그는 1969년 9월 17일(음력) 세상을 하직했다. 2주기가 되던 1971년 뜻을 같이했던 장건상 등 동지들과 그를 존경하는 향리 유지들이 모여서 기념비를 건립하고자 했다. 기념비에는 ‘우국지사, 봉강 정해룡 선생’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그가 용공분자이기 때문에 우국지사라는 말을 삭제하라는 압력을 가해 왔다. 결국 그 기념비는 세워지지 못하다가 1990년대 중반 경에야 향리에 세워질 수 있었다(최정기).
鳳崗 丁海龍(제8회) 2012-11-12 19: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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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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