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이란 무엇인가
by윤여경Oct 11. 2019
어제 최봉영 선생의 '가운데 중' 이야기를 읽고 '중용'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중용에서 말하는 '중'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디자인에서 말하는 '적절성'이란 무엇일까?와 많은 관련이 있으며, 삶과 문화에서 예술과 디자인의 역할과 책임 문제와 맞물려 있다. 쉽게 말해 다양성(예술)과 적절성(디자인)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
자사의 <중용>에서 중용의 이미지는 '바퀴'이다. 이 바퀴는 바퀴살이 촘촘한 수레바퀴 이미지를 상상하면 좋다. 바퀴가 튼튼하게 잘 굴러가려면 바퀴살이 잘 버텨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바퀴살 가운데 있는 축이 중요하다. 축이 단단해야 살이 고정되고, 부드러워야 잘 굴러간다. 그런데 그 바퀴 축은 구멍인 '공'이다. 이게 중국 중용의 '중'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서 내가 떠올린 이미지는 삼각형이다. 그는 대표적인 중용으로 용기와 절제를 강조하는데 용기란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이고, 절제는 과도함과 모자람의 중용이다. 다시 말해 용기는 무모하지 않으면서 비겁하지도 않은 태도이고, 절제는 과도하지 않으면서 모자라지도 않은 태도다. 이게 도무지 무슨 말인가? 나는 이를 새로운 개념의 발명이라 보았다. 과도함, 모자람이 모두 적절치 않다면 이를 포괄하는 새로운 개념 '절제'를 발명해야 한다. 그래서 이도아니고 저도 아닌 둘을 모두 포괄한 상태가 삼각형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삼각형 이미지는 서양철학의 뿌리이다. 심지어 데카르트는 삼각형을 신 존재 증명에 증거로 삼았고, 비코는 아예 신을 삼각형으로 그렸다.
-
그럼 한국에서 중용은 무엇일까? 어리석게도 나는 이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최봉영 선생을 접하고 나서야 이 질문을 던진다. 그는 '가운데 중'에서 '중'이 아닌 가운데에 주목한다. 한자 '중'이 기표라면 '가운데'는 기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중용의 의미는 '가운데'에 있다는 말이다. 이런 간단한 사실을 간과했다니...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다시금 깨닫는다. 아무튼 최봉영은 가운데는 '가'들의 중간이라고 말한다. 이 중간은 바퀴의 중간이나 삼각형의 상위 꼭지점이 아니라 중간 전체를 아우른다. 점과 점이 모여 선을 만든다면 그 선 자체가 중간이고 중용이다. 왜냐면 양쪽 점이 움직이거나 소통할때 그 선 어딘가에서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가운데'는 굉장에 포괄적인 중용적 태도다. 마치 디자인 사유인 귀추(가설적 추론)을 상상케 하는.
-
나는 이를 어떤 이미지로 상상해야 하나 고심했다. 그러다 문득 번쩍 떠오른 이미지가 있다. 바로 '씨름'이다. 씨름 선수는 원의 가에 앉아 있다가 원의 중간에 와서 서로 샅바를 잡는다. 경기가 시작되면 서로 기술을 걸며 씨름판을 돌아다닌다. 씨름판을 벗어나면 경기를 멈추고 씨름판 안 어딘가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하나 넘어지면 경기가 끝난다.
-
이 중용은 정말 독특하다. 중국의 바퀴처럼 전체를 포괄해 굴려가는 축도 아니고, 유럽의 삼각형처럼 양쪽을 지양하는 추상적 개념 발명도 아니다. 포괄이 아닌 선택이랄까... 상호간 정당한 겨룸에 의한 한쪽의 선택이다. 즉 연역도 귀납도 아닌 다양한 가설을 놓고 견주어 가장 적합한 가설을 고르는 귀추에 가깝다. 정말 재밌는 것은 한국사람인 나는 귀추에 끌렸고, 중국과 유럽의 연역-귀납적 중용을 억지로 귀추적 중용으로 끌고와 해석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가운데' 개념을 올바르게 앎으로서 위 개념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바퀴와 삼각형, 씨름 다양한 중용들이 내 머리속에서 적절히 어울릴 수 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