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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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길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배우기만 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어둡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면서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학(學)을 온고(溫故)로, 사(思)를 지신(知新)으로 읽으면 다가오는 말이다.
젊은 세대는 선배 세대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더 앞으로 나아간다.
세대 간의 관계는 이 이어짐 위에 서 있다.
그것이 정상(正常)이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후대에게 내리먹이는 방식이나 선배 세대의 경험이나 지식을 배척하고 배우려하지 않는 태도는 세대 간의 자연스러운 이어짐이나 소통을 어렵게 한다.
흔히 말하는 선배 세대의 ‘꼰대’(요즘은 ‘나때’라고 한다지만)문화는 온고지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된다.
트라우마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단정이나 고정에서 벗어날 때, 선배 세대의 경험과 지식은 새로운 세대의 지신(知新)의 바탕으로 역할 할 것이다.
새 세대 또한 선배 세대의 경험이나 지식 가운데 보편적인 요소들을 배우고 학습할 때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정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자연과학이나 기술 분야에서는 이것이 비교적 분명하게 보이는데, 인문이나 사회 분야에서는 여러 복잡한 관념이나 정서가 작용하다보니 잘 안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세대 간의 대화나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시대에나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의 폭과 깊이가 클수록 그 정도가 심한 것은 당연하다.
고전(古典)을 그 시대적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해방하여 보편의 지혜로 읽을 때, 온고지신의 정상적인 세대 간 이어짐을 가능하게 돕는 자산(資産)이 될 것이다.
요즘 세대 간 소통에 대해 생각해보고 참여도 해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논어 명언명구
온고지신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다
[ 溫故知新 ]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새것’ 타령을 한다. 회사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냐?”라고 다그치고, 방송에서도 “새 아이템이 없느냐?”라고 달달 볶는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새것을 바라고 찾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전근대에만 해도 “하늘 아래에 새것이 없다”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에 따라 새것은 기이하고 이상하여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다른 것을 찾는 호기심(好奇心)은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위험한 마음으로 간주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사람이 남과 다른 개성을 추구하면서 새것이 사람의 정체성이자 사물의 특성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새것이 화려하게 각광을 받게 되자, 지금까지 있었던 것은 금방 아무런 가치가 없고 낡은 헌것으로 여겨졌다. 이전에 있었던 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과연 새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공자는 몸을 앞으로 향하면서도 뒤를 둘러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과거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출발점이지만 송두리째 부정해야 할 허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논어 위정(爲政)편 11장
- 27번째 원문
• 溫 : 온(溫)은 데우다, 익히다, 따뜻하다, 원만하다의 뜻이다.
• 故 : 고(故)는 까닭, 이유, 옛, 옛날, 원래 등의 뜻으로 쓰인다. 고(古)가 단순히 시간상으로 오래된 것을 나타낸다면 고(故)는 까닭, 이유를 지닌 이야기를 나타낸다.
• 可以 : 가이(可以)는 능(能)과 함께 ~을 할 수 있다는 가능을 나타내는 보조동사이다. 영어의 can에 해당된다.
• 爲 : 위(爲)는 가장 일반적으로 하다의 뜻으로 돕다, 이루다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 되다의 뜻으로 쓰인다.
• 矣 : 의(矣)는 뜻이 없고 종결형 어미로 쓰인다. 보통 주관적 의사를 나타내는 평서문 등에 쓰인다.
과거의 두 얼굴
공자는 과거의 무게로부터 꽤나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과거의 무게에 눌려 한 번 정해진 예를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합리적 관점에 따라 과거의 기준을 바꾸고 있다.
사람은 자신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간다. 기존에 해오던 방식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과거는 현재를 낳은 어머니로서 현재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때 과거가 없다는 것은 현재가 그만큼 빈약하다는 뜻이 된다.
기존의 방식이 현실에 유효하지 않게 되면, 사람은 시간을 과거와 현재로 구분하게 된다. 과거에 통용되던 방식은 더 이상 현재로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과거는 현재의 문제를 푸는 자원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문제의 자원은 긍정의 대상이 되지만 그 원인은 부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공자와 유교가 과거의 가치를 무조건 현재와 미래에 되살리려고 하는 복고주의(復古主義)로 보는 경향이 많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공자가 과거를 현재와 미래를 여는 자원으로 본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가 그 자체로서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새것을 찾을 수 있는 자원의 보고로 간주되고 있다. 즉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실례로 ‘자한’편 3장을 찾을 수 있다.
삼베로 만든 관(모자)이 예에 맞다. 요즘 명주로 만든다. 요즘이 더 검소하므로 대중으로 따라가겠다. 당 아래에서 인사하는게 예에 맞다. 요즘 당 위에서 인사를 한다. 요즘이 거만하므로 대중과 다르더라도 나는 당 아래에서 인사하겠다.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공자 당시 관은 사람의 복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공자는 ‘검소하다’는 기준에서 관의 재료를 바꾸는 당시의 풍속에 동의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방문했을 때 인사하는 자리가 중요하다. 같은 인사라도 당 위에서 하느냐 당 아래에서 하느냐에 따라 호의를 나타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당 위에 인사했지만 공자는 당 아래에서 하는 인사법을 고수하려고 했다. 인사가 기본적으로 호의를 나타내는 절차인 만큼 상대방에게 ‘오만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보다 ‘반긴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공자는 과거의 무게로부터 꽤나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과거의 무게에 눌려 한 번 정해진 예를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합리적 관점에 따라 과거의 기준을 바꾸고 있다. 공자와 유교는 시간으로 보면 분명 과거의 것이다. 그것의 가치를 덮어놓고 긍정하거나 부정한다면, 그 자체는 결코 바림직한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현재와 미래를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가치와 이념에서 미래의 사상 자원을 길어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문제를 푸는 자원과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과거의 두 얼굴을 잘 갈라내려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모든 것은 유교 탓이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사진. 정도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선을 유교 국가로 만드는 기틀을 고안했다. 훗날 [경국대전]을 집필하는 밑그림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도전과 이성계는 조선을 유교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조선은 일본, 청과 잇달아 전쟁을 벌이며 망국의 위기에 이르렀지만 국가 개조를 통해 18세기에 영조와 정조의 치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과 대한제국이 서세동점의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다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은 망국의 원인을 유교에서 찾았다.
그 이후에도 한국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원인을 유교로 돌렸다. 예컨대 정경유착으로 인해 대형 부패와 비리 사건이 터질 때도 유교가 원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또 최근 세월호 참사에서 많은 사망자가 생긴 원인을 유교로 보는 주장이 있다.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현상의 원인을 유교로 돌리는 주장이 타당한 것일까? 한 사회의 부정적인 현상과 사건이 발생했었을 때 그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불행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엉뚱한 원인을 찾아놓고 실컷 분풀이를 한다면, 감정의 위로를 받을 수 있지만 앞으로도 이전의 실패가 반복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념과 가치는 사람이 판단, 선택 그리고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념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유교가 조선과 대한제국의 망국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기존 이념과 가치를 충실하게 지킬 수도 있지만 새로운 상황이 나타나면 그에 따라 새로운 이념과 가치를 세울 수 있다. 새로운 이념을 세우는 것은 전적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기존 이념의 노예가 되어 새로운 변화를 완강하게 거부할 수도 있지만 기존 가치를 부정하고 새 시대를 창조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유교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조선과 대한제국을 뛰어넘어 민주공화국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변화는 우리가 19세기의 역사적 경험을 살려서 20세기 중반에 선택한 결과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일어난 사회적 부정과 비리 그리고 중대한 사건 사고의 원인을 과거의 이념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정확한 원인과 결과의 규명이라고 할 수 없다. 과거의 이념, 즉 유교가 오늘날 문제의 원인이라면 우리는 모두 이념의 노예라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히려 정책적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의 잘잘못을 가리지 못한 구체적인 사람이야말로 불행한 사건과 정책적 파국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교가 모든 원인이라는 주장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실책의 원인을 정확하게 찾지 못하고 엉뚱한 대상으로 떠넘기는 ‘희생양(scapegoat)’ 찾기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희생양 놀이는 사건과 실책으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위안을 안겨줄 수 있겠지만, 원인을 잘 밝혀서 제대로 된 대책을 찾아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역사 허무주의를 피하자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온(溫)은 기존에 있는 것을 데우는 것이다. 찬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새 밥과 같이 먹기 좋은 밥이 되듯, 사고 활동에 견주면 온(溫)은 기존에 있던 생각을 화학적으로 재결합하여 달아오르게 만드는 작업이다. <출처: ⓒ gettyimages>
김경일 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1999)라는 책을 펴내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우리는 국가 부도 사태를 당해서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김경일 교수의 책이 나오자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통이 모두 유교에서 왔다는 주장이 널리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가부장 문화를 심화시켜서 여성을 억압하고 기성의 권위를 강조하여 자유로운 상상력을 죽이고 중화의식을 내면화시켜서 속국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공자와 유교에서 찾았다. 이를 ‘공자 바이러스’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판단에 따르니 공자는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모든 원인의 원인이니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경일 교수의 책은 부분적으로 신선한 제안을 담고 있지만 그 도발적인 주장으로 인해 제안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렸다. 특히 모든 부정적 현상의 원인을 공자에게 돌리는 단순한 환원론은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다. 일시적으로 거대한 공자를 공격하는 시원한 느낌을 느낄 수 있지만 금방 잘못된 공격으로 인해 치명적인 반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날 공자는 조선시대에 누렸던 ‘성인(聖人)’과 만인의 스승’이라는 절대적이며 독존적인 지위를 누릴 수 없다. 그의 말이 현대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자와 유교로 인해 일구어온 역사와 그 자취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허무주의자의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온(溫)은 기존에 있는 것을 데우는 것이다. 일상적인 예를 들자면 집에 돌아와 밥솥에는 밥이 없고 냉장고에 찬밥이 남아 있을 때가 있다. 찬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새 밥과 같이 먹기 좋은 밥이 된다. 사고 활동에 견주면 온(溫)은 기존에 있던 생각을 화학적으로 재결합하여 달아오르게 만드는 작업이다. 기존의 사고 패턴에 따르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들을 새롭게 조합하고 조작하는 과정을 통해 이전에 없던 아이디어가 툭 튀어나온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자신에게 있던 것을 전부 내다버리거나 쳐다보지 않고 남의 것을 기웃거리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사유의 조작을 통해 이미 나에게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하여 사고의 새 길을 여는 과정이다. 요컨대 온고지신은 나를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낯선 방식으로 만나는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발행일
발행일 : 2015. 06. 17.
출처
논어 명언명구
글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유학대학 학장을 맡으며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2011),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맹자와 장자, 희망을 세우고 변신을 꿈꾸다](2014),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뜨다](2014)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다수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온고지신 [溫故知新] -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다 (논어 명언명구,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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