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1

조용헌의 주유천하 (144)전남 보성의 정해룡 고택 (중) - 농민신문

조용헌의 주유천하 (144)전남 보성의 정해룡 고택 (중) - 농민신문

조용헌의 주유천하 (144)전남 보성의 정해룡 고택 (중)
입력 : 2019-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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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택 지키는 정길상의 14대 현조(顯祖)인 반곡 정경달

선산부사 지내며 임진왜란 맞아 금오산 전투 큰 승리로 이끌어

그후 이순신 종사관으로 활약 둔전 경영하고 조정과 교량 역할



어떤 집안이 명문가인가? 기준은 첫째, 고택이 남아 있어야 하고 둘째, 뚜렷한 업적이나 명성을 남긴 조상이 있어야 한다. 셋째는 주변 공동체에 대한 그 집안의 공헌이나 기여가 있어야 한다. 넷째는 그 집안 후손들의 행실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손가락질받을 행동을 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정해룡 고택은 뚜렷한 업적을 남긴 현조(顯祖)가 있다.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 1542~1602년)이다. 그는 대과 급제를 하고 선산부사를 지내면서 임진왜란을 맞았다. 금오산 아래에서 왜적과 싸워 적을 대파한 공을 세웠다. 이 승리는 임진왜란사에서 상당히 기념비적인 전투로 꼽힌다. 그리고는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활약한다. 이순신은 정경달을 문무를 겸비한 출중한 인물로 평가했고, 그를 자신의 부관으로 데려오기 위해 임금에게 통사정하는 편지를 쓴다. 그 내용은 수군에도 문과 급제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호남과 충청의 해안가 고을 사또들은 모두 문과 급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과 출신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명령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현지 목민관들과 협조가 되지 않으면 전쟁은 어렵다. 명령이 바로바로 하달되려면 고을 사또들과 같은 문과 출신이 필요했다. 그다음에는 군량확보가 중요했는데, 이 군량확보 업무를 해낼 사람을 정경달로 본 것이다.

둔전(屯田) 경영도 그렇다. 전쟁비용을 대는 둔전을 비리 없이 효율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적임자로 정경달을 꼽았다. 아울러 조정과 교량 역할을 해줄 인물이 필요했고, 이 교량으로 이순신은 정경달을 지목한 것이다. 선산부사로 있으면서 육상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한 공이 있는 정경달을 이순신은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이순신이 해상전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뒤에서 병참과 정보,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전담한 인물이 바로 반곡 정경달이었다. 반곡이 남긴 <반곡난중일기>는 이순신의 ‘해상 난중일기’와 더불어 임진왜란 상황을 잘 기록한 ‘육상 난중일기’로 꼽힌다. <반곡난중일기>가 있어야만 임진왜란사의 전체적인 면모가 파악된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그러나 이 집안이 해방 이후로 좌익을 하면서 쇠락해 이런 반곡의 역사적 업적이 조명받지 못했다. 현재 정해룡 고택을 지키고 있는 후손은 반곡의 14대손에 해당하는 정길상(丁吉相, 1946~)이다. 반곡이 전남 장흥으로 입향했고, 반곡의 동생 손자인 정손일이 장흥에서 보성으로 터를 옮겨 영구하해(靈龜下海) 터에 저택을 지었던 것이다. 정길상의 아버지가 정해룡이고, 정손일부터 계산하면 정길상이 12대 주손에 해당한다. 이 집은 3000석의 부잣집이었다. 거북 터에 집을 지었다고 해서 택호를 거북정(亭)으로 부르기도 한다. 정길상의 아버지인 정해룡은 신학문을 하지 않고 전통 한학을 공부했다. 주손이라 집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밖에 나가 신학문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당시 서울에서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안창남을 집으로 초청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정해룡의 동생인 정해진은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와 동경제국대학 대학원 철학과를 나왔다. 형님과 달리 동생은 철저히 신학문을 익힌 셈이다.

해방 정국에서 형제간의 행보도 약간 차이가 있다. 형인 정해룡은 여운형을 지원했다. 여운형의 재정부장을 맡아서 자금 지원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운형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동생인 정해진은 월북하여 이북에서 고위직을 지내기도 했다. 대남사업 본부장도 지냈다. 현재 주손인 정길상은 삼촌 정해진의 위치 때문에 보성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1980년 11월에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1988년 1월까지 광주교도소에 있었으니, 8년을 징역 살았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광주교도소에 들어와 징역 살고 있던 박석무와 감옥에서 서로 만나기도 했다. 아무튼 주손이 간첩 혐의로 8년 동안 징역살이를 하니까 고택은 폐허로 변했다. 그러나 고택 천장의 빈 공간에 보관돼 있었던 이 집안의 고문서는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다. ‘간첩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일반 도둑들이 얼씬을 못했던 것이다. 얼씬했다가는 간첩으로 몰렸을 것이다. 그 덕택에 반곡의 문집을 비롯한 여러 고문서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집안이 일제강점기 때 흉년이 들면 보성·장흥에 있던 쌀창고를 열어 구휼미를 대규모로 방출하였고, 양정원(養正院)이라는 학교를 만들어 가난한 촌민들에게 무상교육을 시켰다. 보성전문학교가 세워질 때도 설립자금을 3번이나 내기도 했다. 그 공덕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고 집안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명당에 집터를 잡아도 역사의 풍파는 피해갈 수 없지만, 완전히 그 맥이 끊기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명당의 효력이 있다고 믿는다.



조용헌은…

▲강호동양학자, 불교학자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 ▲저서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휴휴명당>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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