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8
상호의존과 격리의 경계선에서 개성 땅을 바라보다(종결) - 라이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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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의존과 격리의 경계선에서 개성 땅을 바라보다(종결)
개성의 산업발전과 남북협력
2020.05.21 09:00
by 이찬우 (일본 테이쿄대학 교수)
앞글들에서 개성 땅의 위상을 생각하면서 남북이 교육/역사문화 협력, 의학/의료 협력을 통해 민족 문명의 새로운 꽃을 피울 것을 제기하였다. 이제 종결 편으로 개성에서 산업협력의 미래상과 그 방법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개성을 ①개성 구도시 지구, ②개성 신도시 지구(개성공업지구), ③개성 농촌지구로 나누어 각각의 특성에 맞는 발전과 협력 방법을 찾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전략을 먼저 그려본다.
▲ 개성의 산업발전 전략 ⓒ 이찬우
ⓒ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1. 개성 구도시 지구
1) 개성을 남북연합의 스마트도시(United Smart Kaesong)로 만들자
스마트도시법 제2조에 의하면, 스마트도시는 "도시의 경쟁력과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하여 건설·정보통신기술을 융·복합하여 건설된 도시기반시설을 바탕으로 다양한 도시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속가능한 도시"를 말한다. 앞으로 도시는 교통, 복지, 환경, 방재, 휴식, 문화, 주거, 쇼핑, 거래, 보건의료, 교육 등 도시의 주요 기능별 정보서비스가 융합되어 편리하게 시민에게 제공되는 스마트도시로 나아갈 것이다. 나는 남한에서 이야기하는 [삶의 질 향상]과 북한에서 이야기하는 [인민생활 향상]은 결국은 같은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마트도시는 그 방향에서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도시문명이다. 특히 생활 편리성뿐 아니라 방재 정보시스템을 통한 긴급구조, 사회적 약자 지원은 스마트도시의 핵심적 요소이다.
"코로나 이후 시대"의 본보기 도시로서 개성을 "남북의 주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협력하는, 보건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한 사람 중심의 무공해 도시인, 이름하여 <유나이티드 스마트 개성 (United Smart Kaesong)>"으로 만들어내는 전략을 짜면 좋겠다. 참고로 할 수 있는 사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스마트 바르셀로나" 구상인데, 도시 내에서 생산적이고 인간중심의 커뮤니티 구축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스마트도시 시스템이 세 가지 요소, 즉 구조(환경, 인프라 등), 상호작용(경제, 문화, 정보 등), 사회(시민, 정부)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6개 핵심전략을 밝히고 있다. 이 핵심전략들을 개성에 응용하면 다음과 같다.
▲ '유나이티드 스마트 개성' 구상의 핵심전략 [자료] Josep-Ramon Ferrer(2017), Barcelona’s Smart City vision : an opportunity for transformation
개성에 스마트도시를 건설하는 데는 물론 많은 장벽이 있다. 남북관계와 국제정세 등도 그리 호의적이진 않다. 그러나 개성의 도시발전을 위해 처음부터 위와 같은 스마트도시 개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개성에 민간경제의 자율을 보장하여 개성이 교육과 보건의료를 중심으로 남북이 연합한 스마트도시로서 상업과 금융, 역사관광에서 개인 상업과 협동조합, 영리기업이 활발히 활동하는 실험을 해보자.
개성직업기술대학(1956년에 설립한 개성상업경제전문학교를 2015년에 직업기술대학으로 전환)을 경공업종합대학인 고려성균관에 통합하고, 남북협력을 통해 경제, 경영, 금융, 인문, 공업, 과학기술 등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종합대학으로 고려성균관을 발전시키자. 개성의학전문학교를 남북협력을 통해 "민족의학대학"으로 전환하여 의학과(고려의학, 신의학), 간호학과, 약학과(고려약, 신약) 등을 두어 민족의 의료인재를 함께 육성하자. 개성고려약공장 등 한약생산공장을 남북협력으로 현대화하자. 개성에 IT 인프라를 구축하자.
그리고 개성 출신의 월남자 가족에 대해서는 희망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살 수 있게 과감한 조치도 취해보자. 그래서 개성이 다시 상업이 번성하고 남북을 연결하는 상업중심지이면서 국제적인 역사문화, 보건의료 도시가 되도록 남북이 문명적인 실험을 해보자.
개성에서 한반도형 스마트도시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류문명에 우리 민족이 새로운 도전장을 내미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2) 가칭 "연합고려인삼 (United Korea Jinseng)"의 상업도시를 만들자
개성시는 원래 상업도시였는데 북한 땅이 된 후 경공업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원래의 상업도시였을 땐 어떠했는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조선왕조 시대에 개성엔 개성상인(송상)이 있었고 전국에 있는 그들의 상업점포를 송방이라 불렀다. 송방은 전국의 장마당에 지점들을 두는 네트워크 조직이었는데 그 전달속도는 조선왕조가 각 지방관청에 보내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고 정확했다 한다. 좀 안 좋은 사례이지만, 개성 상인들은 나라에 국상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내시나 궁녀들을 통해 알아낸 후 전국의 송방들에 전달하여 각 고을 안의 삼베 천을 모두 사들이게 하였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야 지방들에 국상이 났다는 소식이 전달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상복으로 쓸 천을 몇 배값을 치르고서야 송방을 통해 구매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개성 상인들은 서양의 베니스 상인들이 복식회계법을 고안한 시기보다 빠른 고려시대 중엽에 회계를 급차(수입)질, 봉차(지출)질, 이익질, 소비질 등 4개질로 나누어 계산하는 "송도 4개 치부법"을 창안하여 대대로 사용하여왔다. 이 회계법은 이중복식 회계법이라 할 수 있는데 유럽의 복식 회계법보다 우수했다(현재 개성의 고려박물관에 보관).
개성상인이 주로 취급한 상품은 인삼이었다. 고려시대에 개성의 항구인 벽란도는 인삼 무역선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인삼포전(삼포)에서 산업적으로 대량 생산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시대 18세기초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먼저였고 개성에서 본격화된 것은 정조임금 때인 18세기 말이다. 인삼재배는 품이 많이 들고 매우 까다로워서 "인삼 가꾸기 보다 호랑이 길들이기가 낫다"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개성의 상인들과 삼포업자들은 삼포경영에 대규모 투자를 하여 기후와 토질이 인삼재배에 적합한 개성을 전국적인 인삼 주산지로 만들었고 또한 홍삼을 산업적으로 가공하는 기술도 개발하였다. 홍삼은 조선말의 최대 수출상품이었다. 개성 상인은 인삼 생산과 무역권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상업자본가로 등장하였고, 서울에서 가장 큰 상인세력인 경상상인과 함께 전국에서 양대 상인세력을 형성하였다. 개성의 삼포경영이 자본주의적 상업으로 발전하였다. 대규모 인삼포전의 경영방식은 경작지인 삼포를 임차한 삼포주와 지주의 관계가 임차료에 의거한 계약관계에 입각하였고 삼포주와 생산자(농민노동자)의 관계도 임금노동에 입각한 고용 관계로서 자본주의적 화폐경제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여 [조선총독부전매국관제]를 공포하면서 개성에 전매국 출장소를 설치하고 인삼에 대한 전매를 강행하였다. 개성상인과 삼포주들은 근대적 생산조직체계인 "개성삼업조합"을 만들어 일본의 침탈에 대항하였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북한 땅으로 된 개성에서 북한 정부는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에 내각 결정 제152호 [개성지구 민간인 삼포 운영에 관하여]를 채택하였다. 이는 개성에서 인삼전매제도를 실시하지 않고 국영인삼농장과 함깨 개인도 삼포를 경영하고 홍삼을 제조 판매할 수 있게하는 대신 현물세를 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전쟁시기 인삼포주가 월남하는 등 행방불명되어 일시 국가에 귀속 되었던 수만평의 인삼포전을 그 연고자들에게 반환하였다. 개인 삼포업자들의 조합인 개성삼업조합이 이를 열렬히 환영한 것은 당연했다. 참고로 남한은 1989년까지 인삼전매제도를 실시했다.
▲ 개성의 민영 삼포 경작자들의 인삼 수확 ⓒ 노동신문(1953년 10월 27일)
▲ 개성 국영 인삼관리소 산하 종업원들의 묘삼 이식 ⓒ노동신문(1954년 4월 17일)
그리고 개성에 농업협동조합이 생겨나면서 농업협동조합에서도 삼포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1955년부터는 국영 인삼관리소와 농업협동조합의 인삼포전에서 삼포별 담당제를 실시하고 개인간, 삼포간, 작업반간에 증산 경쟁 운동을 실시하였다. 최근 북한 농업에서 유명한 [포전담당제]가 사실 그 연원이 개성 인삼밭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휴전 후 불과 5년만인 1958년에 개인 상공업을 폐지함에 따라 개인 삼포경영은 국영 인삼관리소 또는 농업협동조합으로 편입되어 개성삼포조합도 해체되었다. 개성에 삼포는 의연하되 민영 상업의 면모는 사라졌다. 상인들을 노동자와 농민으로 전환하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인삼을 매개로 성장한 상업 도시 개성을 사회주의화한 것은 양날의 칼과 같았다. 식민지시기와 해방 후 혼란기를 거치면서 영세화한 상인들이 모리간상배로 비난받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협동화와 국영화를 통해 생활의 안정을 이루면서 규모의 경제를 통해 효율적인 인삼 산업이 발전했던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집단주의적 관리에 익숙해지면서 현실에서는 "집단주의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평균주의와 공짜"(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보 2011년 2호) 의식이 나타나 농장에서 포전을 자기 텃밭처럼 알뜰히 다루고 관리하지 않고 보이는데서만 열심히 일하는 타성이 생겨났다. 그리고 생산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기술개발이 지체되었다. 북한에서는 집단주의를 "사람들이 서로 돕고 이끌면서 집단적으로 활동하게 함으로써 자연과 사회를 성과적으로 개조 변혁하고 자기운명을 훌륭히 개척해나갈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창조적 능력도 빨리 키우고 높이 발양시킬 수 있게 한다"(상기 역사학보)고 설명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모습도 있었다.
2000년대까지는 고려인삼이 가진 자체의 브랜드력과 우수한 효능으로 국제시장에서도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해 동안 중국이 품질이 좋아진 인삼을 대량으로 생산 판매할 수 있게 되면서 개성고려인삼의 경쟁력이 저하되어갔다.
이 때문에 2019년 1월 김정은 위원장이 네 번째로 중국을 방문하여 북경의 중의약 기업인 동인당을 방문한 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인삼법]을 제정하였는데 인삼재배와 수매, 가공품의 생산 및 판매 등에 대한 법적 기준을 마련하였다.
그 내용은 그동안 개성시인민위원회와 중앙정부의 관리가 혼재되어있던 개성고려인삼의 생산판매사업을 국가가 통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인삼사업을 총괄하는 "조선인삼협회"도 새로 설립되었다. 약재이기에 경제제재대상이 아닌 고려인삼을 국가의 전략적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려는 의도인 것 같은데 안정적인 품질보장 등 제품 질 개선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지만, 개성사람들의 자랑거리인 개성고려인삼이 중앙관리로 넘어가 개성사람들의 인삼재배 의욕이 저하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이상으로 개성고려인삼을 매개로 개성상인의 상업도시 개성을 살펴보았다. 남북협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경제 제재 국면에서 북한이 지방경제와 중앙경제를 재조정하여 중앙의 통일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는 "정면돌파전"을 선언한 북한이 경제를 주공전선이라고 하면서 추진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앞으로 남북협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개성에 대해 북한이 전혀 다른 정책을 구상할 수 있다. 개성을 다시 고려시대와 같은 국제적 상업 도시로 개변시키는 것인데, 개성이 중국의 홍콩 옆에 있는 심천과 같이 되는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의 공식 경제이론은 각각 [사회주의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기반의 시장경제]이다. 사회주의 정치경제체제의 원칙을 지키면서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에게 중국은 왜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는가 물어본 적이 있는데,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언젠가는 다시 발전된 사회주의로 갈 것"이라는 끝맺음과 함께 돌아와 놀란 적이 있다.
북한의 사상이론가들은 "기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 배신자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상사업을 집어던지고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방법을 끌어들여 사람들 속에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조장시키고 황금만능의 부르주아 사상을 퍼뜨렸으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우월성》에 대하여 떠드는 반동적 부르주아 선전에 동조하고 소유의 《다양화론》에 대하여 떠벌이면서 사회주의적 소유의 우월성을 부인하고 자본주의적인 소유 관계와 경제관리방법을 받아들이였다"(경제연구 2015년 3호)며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개방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그렇지만 북한도 헌법개정과 각종 법 제정 등을 통해 시장기능을 합법화하고 개인소유의 범위를 늘려가고 있다. 북한에서 김정은 시대는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하되 과거보다 현실 적응 면에서 더 효율적이고 실용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1950년대에 개성에서 단 5년 만에 끝내버린 개인상공업을 이제 사회주의 원칙을 지키면서 한 50년 다시 해볼 정도의 구상을 가져보는 것은 어떤가.
인삼 사업을 예로 든다면, 개성에서 월남한 인삼 업자들이 일군 남한의 인삼과 북한의 인삼을 가칭 "연합고려인삼" (United Korea Jinseng)이라는 공동브랜드로 만들어 남북이 각기 생산하되 공동의 품질관리 기준을 정하고 국제시장에서 남북이 협력하여 판매하자. 이러한 과정에서 개성에 개성상인이 다시 등장하여 이들이 모리간상배(공익이나 상도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가 아니라 정당하고 현대적인 상공업자로서 민족경제 발전에 공헌하고 또한 과거의 "송도4개치부법"도 다시 활용하였으면 좋겠다.
2. 개성공단(개성공업지구) : 한반도 산업의 "서플라이 체인(공급사슬)" 을 구축하자
현재 인구 40만을 좀 넘는 규모를 가진 개성의 공업 특징은 경공업이 중심이고 중화학공업이 빈약하다. 개성지역 가까이에 철광, 석탄 같은 원료자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업화 첫 시기부터 섬유공업, 제약공업, 식료품공업, 일용품공업 등 경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섬유공업으로 개성방직공장이 중앙급 공장이고 지방공업에 속하는 개성직물공장, 개성제사공장등이 있다. 기계공업으로 개성종합기계공장이 유명하고 정밀기계로 개성정밀기계공장, 개성시계생산협동조합이 유명하다. 건재공업 으로는 개성유리공장과 개성건재생산협동조합이 있고 제지부문으로 개성제지공장이 있다. 일용품공업으로 제화공장, 목재일용품공장 등과 함께 모자, 담요, 악기, 완구, 화장품, 한지, 학용품, 거울, 공예품 등 품목에 생산협동조합이 많았다. 개성의 공업구조는 지역의 부존자원과 역사 및 기술인재 특성을 배경으로 인해 경공업 도시로 자리매김하여왔다고 할 수 있다.
직물과 피복 기타 일용품과 식료품 등을 주로 생산하는 생산협동조합의 초기 구성원들은 전쟁 전까지 개인경영을 하다가 "자금을 가진 사람들은 자금을 내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기술을 내고 자재를 가진 사람들은 자재를 내어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커다란 공장들을 짓고 국가의 자금과 원료를 공급 받아 가면서 함께 일하고 같이 논아서(주: 원문표현 그대로임) 생활"(노동신문 1956년 12월 2일)하는 방식으로 협동화를 실현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 당시 생산협동조합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개성식료품생산협동조합의 송영경 관리위원장이 1959년 10월에 열린 [전국지방산업 및 생산협동조합열성자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 데에서 잘 나타난다.▲ 개성식료품생산협동조합의 송영경 관리위원장 ⓒ노동신문(1959년 10월 15일)
"개인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던 20명으로 1953년 말에 처음 조합이 조직될 당시에는 조합 재산이란 낡은 정미기 한 대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2,000여 여 평방메터의 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공정의 많은 부문이 손노동으로부터 기계화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리하여 1958년 6월부터 우리는 매일 2톤 이상의 각종 식료품을 개성시 근로자들에게 생산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일부 관리일군들은 《우리 조합이 이렇게 유지되여 온 것은 당과류를 생산하였기 때문이다》,《개성 사람치고 누가 부식물을…더우기 김치를 사먹겠는가》고 하면서 보수주의적이며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조합 초급당단체는 이러한 경향들과 사상투쟁을 전개하면서 채소를 가지고 김치, 깍두기 등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이러면서 한편 우리들은 시제품을 가지고 주민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았습니다. 김치, 깍두기 등 우리들이 만든 식료품에 대한 주민들의 평가는 대단히 좋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민들의 요구에 기초하여 식료품 생산을 정상화하며 계속 확대하는 길에 들어 섰습니다." (노동신문 1959년 10월 15일)
"개성사람치고 누가… 김치를 사 먹겠는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데 김치를 만들어 파는 생각이 당시엔 무척 혁신적이었던 모양이다. 개성 주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생산활동을 하였던 생산협동조합들은 이후로 그대로 조합체계를 유지하거나 경공업 부문 국영 지방공장으로 전환되어갔다.
▲ 개성맹인동맹 생산협동조합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생산한 악기들 ⓒ 노동신문(1957년 7월 19일)
▲ 개성송도시계생산협동조합 완성반 김명식 노동자의 "세계시계" 조립 ⓒ 노동신문 (1964년 11월 11일)
▲ 개성초물공예품생산협동조합의 수출품 ⓒ 노동신문(1984년 11월 11일)
경공업이 중심이 된 개성이었기에 개성공단이 들어서서 경공업분야의 남한기업이 입주해서도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 도라전망대에서 바라본 개성 ⓒ 사진작가 유수(2018년 5월18일 촬영, 서울역 전시)
개성에 남북협력의 개성공단이 들어서게 된 것은 현대그룹의 노력이 컸다. 1998년 6월에 정주영 명예회장(당시)이 소 떼 500마리를 몰고 방북하여 북한의 민족경제협력연합회와 공업 단지개발에 대해 합의하였고 그때의 공업단지는 [서해안공업단지]로 명명되었으며 그 후보지로서 현대그룹은 신의주와 해주지역에 대한 부지조사을 하였다. 그 후 1999년 10월에 서해안공업단지 기본합의서가 현대아산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사이에 조인되었는데, 현대그룹은 신의주와 해주지역에 대한 부지조사를 하였다.
그러다가 개성이 공단지역으로 부상한 것은 2000년 6월의 6.15선언 이후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하면서 남북경제협력의 분위기가 고양된 시점에서 북한 측이 개성지역을 공단부지로 제시하여 8월 정몽헌 회장(당시)의 방북 시 현대아산과 개성공단 건설을 합의하고 바로 [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개성공단은 현대그룹 측이 처음부터 열어달라고 요청해서가 아니라 북한 측이 스스로 판단해서 선정하였다. 개성지역의 군대를 뒤로 밀면서까지 김정일 위원장(당시)이 개성공단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1998년 5월 한국의 한 월간잡지에 개성을 남북협력을 통한 경제특구로 만들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내용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북한당국이 남한과의 경제협력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로 문을 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개성지역을 관광 및 자유경제 무역지대로 남한에 개방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이미 합의된 남북 간 철도 및 도로 연결을 통해 개성지역은 남한과 바로 인접한 북한 내 경제특구가 될 것이다. 개성이 제한된 개방지역으로서 확대된다면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을 것이다.
첫째, 남북기본합의서 실천의 상징이 된다. 철도, 도로, 통신 등의 연결을 통해 남북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둘째, 북한의 사회간접자본시설 개발을 위한 막대한 투자 없이 개성지역 내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만든 생산품을 다시 국내로 들여와 내수 또는 인천 등을 통한 수출에 투입할 수 있으므로 남북 간의 경협에서 가장 효과가 높다는 점이다. 즉 물류비 면에서 항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질 수 있어 그만큼 가격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다.
셋째, 전력계통에서 개성지역을 북한 내 전력계통에서 차단하고 남한의 전력을 공급함으로써 에너지 협력의 한 모델을 만들 수 있다.
넷째, 남북한 이산가족의 면회 장소로서 가장 바람직한 지역이다.
다섯째, 개성지역은 거리상 남한 주민의 1일 관광권에 들 수 있어 관광을 통한 교류가 대단히 활성화될 수 있다. 이산가족상봉과 관광을 연계할 수 있는 좋은 지역이 될 수 있다.
위와 같은 이점을 고려할 때 개성지역은 남한과 북한이 서로 협력하여 공영을 도모하는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형태로서 경제특구로 지정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된다." (출처: 『통일샘』(1998년 5월호)
개성공단 건설이 본격화한 것은 북한이 2002년 11월에 [개성공업지구법]을 제정하면서부터인데, 2003년 6월에 1단계로 100만 평을 개발하는 착공식을 하고 2004년 12월에 첫 남한기업 15개사가 조업을 시작했다.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조업중단 시점까지 입주기업 125사 중 123사가 가동 중이었는데 업종별로는 섬유업종 73사로59%, 기계금속업종이 23사로 19%, 전기전자업종이 13사로 11%였다. 섬유, 기계, 전자 업종이 많았던 이유로는 ①설비 설치와 제품생산 소요 시간이 짧아서 단기간 내에 생산 가동할 수 있다는 점과 ②남한기업으로서 국제가격경쟁력에 압박받아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개성지역에 진출하려는 수요가 높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경제의 필요에 따른 결과였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 해인 2015년 1년간 개성공단에서 생산해서 남한으로 반입한 품목 구성을 보면 전기전자제품 40.5%, 섬유류 36.1%, 생활용품 10.4%, 기계류 6.1%, 화학공업 제품 3.1%, 플라스틱 및 가죽 제품 2.3% 등이었다.
▲ 2005년 개성공단에서 열린 패션쇼 ⓒ공동취재단
개성공단은 다시 열려야 한다. 개성공단을 문 닫은 남한 정부가 다시 여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적어도 문재인 정부는 "재개하겠다"라고 벽에다 대고라도 소리쳐야 한다.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나는 더 적극적인 제안을 하고 싶다. 개성공단이 재개되면 개성은 "코로나 이후 시대"에 남한과 북한 산업의 [서플라이 체인(공급사슬)]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본다. 국제적인 긴급재난 시에 부품공급이 중단되어 공장가동이 중단되는 리스크를 줄이려면 공급라인을 한반도에 구축해놓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과 일본은 중국에 투자한 자국 기업의 본국 회귀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하고 있다. 한국도 국제분업체계를 유지하더라도 중요한 공급망에 대해 한반도 회귀를 추진할 필요가 있고 개성공단은 그 중요한 기지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와 파주시가 2019년에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생산용 원부자재 및 완제품을 보관할 물류 시설과 개성공단 상품, 북한상품 등의 판매장을 갖춘 "복합물류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한반도 산업 공급사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업종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공업기지로서 도약을 해야 한다. 그 분야로는 전기자동차, 보건의료 관련 장비와 물품, 제약(한방과 양약), 물류 서비스, IT, 환경 설비 분야를 들 수 있는데 이 분야들은 개성에 "스마트도시"(United Smart Kaesong)를 건설하는 데 꼭 필요한 산업 분야이다. 전기자동차 생산은 부품조립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인데 무인운전 등 실험도 개성에서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개성공단은 앞으로 남한기업과 북한 노동자의 임금을 매개로 한 결합을 넘어서 남북 간 기업 또는 협동조합의 결합, 개성 및 북한의 발전, 그리고 국제협력을 시야에 넣은 연결망으로 발전해야 한다. 개성공단이 개성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한반도의 동맥으로 그리고 동아시아의 협력모델로 융합적인 성장을 하기를 바란다.
3. 개성 농촌지구 : "6차산업혁명"을 일으키자
이미 "6차산업"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일본학자가 명명한 개념이긴 한데 1차 산업과 2차 산업, 3차 산업이 결합하고 융합한 상태로 1+2+3=6으로 해서 6차 산업이다. 내용으로는 1차 산업 즉 농업을 담당하는 농촌에서 2차 산업인 식품과 특산품 제조가공과 3차 산업인 유통, 판매, 관광, 문화체험 등 서비스를 융합하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업 활동을 말한다.
콩 농사를 예로 들자면 농촌에서 비유전자변형(Non-GMO) 유기농 콩을 생산해서 콩을 원료로 한 각종 콩 제품을 생산한다. 메주, 간장, 된장, 청국장 같은 장류, 두부류, 두유, 압착가공 콩기름, 콩국수, 대두박을 활용한 "콩단백" 고기를 생산하거나 사료로 활용하여 개방형 양계장, 양돈축사 등 축산업과 축산가공품 생산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콩식품의 농촌관광 체험 행사를 하거나 판매를 할 수 있다. 국제적인 공정무역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농촌 지역의 지방정부와 협동조합 등이 앞장서서 6차 산업의 성공사례를 만들어가고 있기도 하다.
2차 산업의 식품 가공 부문이 취약하더라도 농촌관광과 연결해 농촌이 발전하는 사례도 있다. 중국 요녕성 봉성시에 있는 따리수(大梨樹)촌이라는 만주족 마을의 사례가 유명하다. 산골이라 곡물농사가 안되어 1980년대까지 아주 가난했던 마을이 배나무농원을 조성해서 이전처럼 그냥 배를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 아니라 도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농원을 제공하면서 교통로와 민박 시설을 정비했다. 중국정부의 개혁개방 정책이 성공하면서 도시인들이 경제적 여유가 생긴 반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아졌는데 따리수촌에 가면 쉴 수 있다는 점이 성공 요인이었다. 게다가 마을 안에 "모택동 기념관"을 꾸며놓아 도시인들이 이 산골에 찾아갈 수 있는 [红色旅游](홍써뤼요우: 사회주의교양관광) 이라는 정치적 명분도 제공했기 때문에 "그냥 쉬러 가는 게 아닌"게 되어 한마디로 농촌체험 관광이 "대박" 났다고 한다.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비에이쵸(美瑛町)도 유명한 사례이다. 비에이 마을은 70%가 산림이고 15% 정도가 농지인데 감자, 밀, 콩 등 밭작물을 주로 재배하는 구릉 지대이다.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킨 사례로, 농촌이 농업 생산성 향상만을 발전전략으로 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주는 농촌의 지역성을 기본으로 6차 산업화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 라벤다로 유명한 후라노 팜도미타 농원. 관광과 로컬푸드 6차산업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 farm tomita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서 개성의 농촌 지역을 앞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구상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첫째, 당면해서는 개성 농촌 지역을 도시근교 농산물 식품 생산지구와 고려인삼 재배지구로 잘 정비한다. 협동농장들에서 곡물 생산단지, 유기농산물단지, 버섯 한약재 등 임산물재배단지, 꽃재배 단지, 인삼재배단지 등을 배치하고 식품 및 약재 가공을 정비한다. 남북 간에 협동농장과 협동조합 간에 또는 사회단체와 영농회사 등이 참여하는 계약재배와 식품가공기술 협력, 무역 시장 개척을 하고 남한지역과 북한 각 도시에 농산물과 식료품을 공급한다. 이를 위한 물류단지를 개성공단에 세운다. 임진강과 한강의 하구권 지역인 파주와 김포가 개성과 연결하는 물류 및 6차 산업 협력 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다.
둘째, 관광형 생태농원을 조성한다. 이를 위해서 개성 농촌 지역의 에너지원을 전기화 또는 가스화하고 산림녹화에 힘써야 한다. 농촌 지역에 땔감, 다락밭 등으로 벗겨진 산들에 나무를 심어야한다. 남북간에는 개성의 각 농촌 마을의 자원을 조사하고 개성관광을 농촌생태관광으로 연결해 6차 산업 형성에 협력한다. 농촌의 협동농장들은 자체의 농특산물을 개발하여 가공상품으로 공급하는 체계를 세운다. 그리고 음식관광의 상품을 개발하여 남측의 개성생태관광 상품으로 만든다. 개성의 특색있는 음식들로는 약밥, 대추개피떡, 우메기, 편수, 화전, 신선로, 추어탕, 보쌈김치, 방아다리김치, 석류김치, 고수감자나물 등이 있다고 한다([조선료리] 인터넷홈페이지). 예를 들어 개성의 협동농장에서 개성 밀가루로 만든 개성편수(만두) 같은 "개성음식"을 상품화하는 방안도 있다.
▲개성편수. "개성 편수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닭고기, 녹두나물로 만든 소를 넣고 모나게 빚어 삶은 료리이다.편수는 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여 변씨 만두라고 하다가 차츰 편수로 불리워 졌다.편수는 찬 닭고기국물에 띄워 먹기도 하고 국물이 없이 초간장에 찍어 먹기도 하였다." ⓒ [조선료리] 홈페이지
▲개성 우메기. "우메기는 찹쌀가루를 빚어 기름에 튀긴 다음 꿀에 재워 만든 떡이다. 우메기는 튀긴 단 떡의 일종인데 개성지방의 특식이다." ⓒ [조선료리] 홈페이지
▲ 2019년 10월 일본니가타현 일조우호 제4차 조선방문단의 개성방문시 차려나온 개성닭백숙 요리 [사진=방문단의 재일동포 사진 제공]
셋째, 농촌 지역 내에 교통이 편리하고 산림이 좋은 곳에 이른바 "건강 힐링 센터"를 세운다. 이는 북한의 고려의학과 고려인삼, 한방약재를 다루는 고려병원(한의원)을 남북이 함께 짓고 남북의 한의사(고려의사)가 상주하면서, 친환경 유기농 식품을 통한 치유와 힐링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일정 기간 투숙 치유하는 시설이다. 남북의 주민이 함께 건강치유를 받는 시설이다. 북한은 평안남도 양덕군에 양덕온천문화휴양지를 올해 1월에 개장하였는데 치료 및 요양구역과 온천구역이 있어 건강센터의 기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레크리에이션 시설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건강 힐링 개념을 결합한 시설로 발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개성에 이러한 힐링센터가 들어서면 남북 간에 사실상 마음의 통일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격리와 상호의존의 경계선에 서서 개성 땅을 생각하며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구상해보았다. 꿈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좋지만, 꿈은 안 꾸는 것보다는 꾸는 것이 좋다. 그래야 이루어질 가능성도 생긴다.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앞으로 넘어지자. 그래야 이루고자 하는 능력도 확인할 수 있고 그래서 이룰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중심이다.
※ 4회에 걸친 개성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남북경제협력 개성
이찬우 (일본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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