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8
상호의존과 격리의 경계선에서 개성 땅을 바라보다(中) - 라이프인
상호의존과 격리의 경계선에서 개성 땅을 바라보다(中) - 라이프인
호의존과 격리의 경계선에서 개성 땅을 바라보다(中)
교육과 역사문화분야 협력
2020.05.07 09:00
by 이찬우 (일본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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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송악산은 백리 남짓한 거리다. 삼각산 마루에 피어오른 흰 구름이 송악산 너머로 흘러가고 송악산 봉우리를 덮었던 구름이 서울의 하늘로 흘러온다. 구름들은 매일 두 산을 넘나든다. 자연에 격리란 없다는 것을 하늘만 쳐다봐도 안다.
인류 사회는 자의든 타의든 여러 가지 격리를 만들어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단 또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서다. 격리된 곳에선 생존을 넘어선 문명은 꽃 피지 못한다. 흐르는 구름과 바람과 물이 있어 꽃이 피듯이 인간 세상에서도 교류와 상호의존이 있어 문명이 꽃 핀다.
이 남북으로 격리된 한반도에서 남한은 남한대로 국제사회와 교류하면서, 북한은 북한대로 그리하면서 제각기 별개의 민족 문명을 키워왔다고 할 수 있지만, 꽃피웠다는 말을 하기엔 부족하다. 우리 민족의 문명이 꽃 피려면 우리가 사는 한반도 전체와 그 원심 공간인 동아시아 나아가 전지구와 교류하고 상호의존하는 흐름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먼저 한반도에서 격리의 경계선을 상호의존의 연결선으로 바꾸는 것이 시작이라는 관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개성은 그 경계선에서 남북을 연결하는 곳이다. 이제 연결을 통한 상호의존이 어떠한 민족 문명을 꽃피울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항목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 개성과 개성공업단지 위치 ⓒ 통일부
나는 그 항목들이 첫째로 교육과 역사·문화, 둘째로 의학, 그리고 셋째로 산업에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내용에 대해 살펴본다.
첫째로 교육과 역사·문화이다. 개성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성균관이 있다. 한반도 통일국가인 고려가 수도 개성에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대학)을 서기 992년(전신인 국자감의 설립연도)에 설립하였으니 1000년이 넘었고, 유럽 최초의 대학이라는 이태리 볼로냐 대학(1088년 설립)보다 앞섰다.
고려의 성균관에서는 200명 안팎의 학생들에게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유학, 법률, 수학, 서예를 비롯하여 전문지식을 가르쳤는데, 강의실과 기숙사(전원 합숙생활) 그리고 식당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 이후 조선왕조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서울에 성균관을 새로 지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유학교육만을 전담하였고 지금의 성균관대학으로 이어졌다. 개성에 남은 성균관은 향교로 이용되었다.
원래의 개성 성균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602-1610년 기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북한은 이 옛 성균관 건물을 보수하여 1988년 9월부터 박물관(고려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려 왕궁인 만월대의 모형과 각종 유물들(비단, 종이, 유리병과 구슬, 금동 공예품, 옥공예품 등), 고려자기, 금속활자, 태양 흑점관측에 대한 [고려사] 천문지의 기록들, 고려 첨성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에서 제일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출판에 혁신을 일으킨 고려 시대 사람들은 분명 문명의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고려가 개방되고 연결된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리아"다.
개성의 성균관이 대학 교육 기관으로 다시 거듭난 것은 1992년 5월 5일 김일성 주석(당시)이 개성을 현지지도하면서부터였다. 이때 김일성 주석은 "성균관을 지금처럼 고려 박물관으로 꾸려놓고 고려시기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고 설명이나 하여서는 의의가 없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성균관을 계승한 대학이 있다는 것을 실물로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라며 성균관을 대학으로 살려 [고려성균관]이라고 하고 경공업 도시로 된 특성에 맞게 경공업종합대학으로 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1992년 9월에 기존에 있던 개성경공업단과대학을 경공업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성균관을 계승한 경공업종합대학-고려성균관이 설립되었다. 학부로는 고려인삼학부, 고려도자기학부, 고려수예학부, 고려방직학부, 고려공장경영학부 등을 구성하였다.
▲ 1992년 5월 5일, 개성의 성균관과 이를 둘러보는 김일성 주석 ⓒ 노동신문(1992년 5월8일)
▲ 고려성균관(구 개성경공업단과대학 건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사진속의 '고려성균관'은 김일성 주석의 친필(1992년9월1일에 '고려성균관' 명명식을 함) ⓒ 노동신문(1992년 9월18일)
1993년에 고려성균관 새 교사를 옛 성균관(고려박물관)의 옆에 짓기로 하고 전통양식의 3-4층 건물로 설계하여 착공하였는데 북한의 경제사정이 급격하게 어려워지면서 공사가 10여 년간 중단되었다. 2006년 4월에 공사가 재개되어 김정은 시대에 들어선 2012년 9월19일에 새 교사 준공식을 하였다. 이 새 교사 건축에 들어간 각종 비닐관은 개성건재생산협동조합이 생산하였다 한다.
▲ 구글어스로 본 개성의 고려성균관 신축교사와 옛 성균관 건물
개성시민들에게 고려성균관 새 교사 건설은 첫삽을 뜬 1993년부터 2012년 준공까지 무려 20년이 걸린 지난한 사업이었다. 피눈물로 지새웠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털어내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상징이 바로 천년의 역사를 잇는 고등교육기관 교사를 신축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은 교육에 있고 이는 남북이 같다.
고려성균관은 경공업종합대학으로서 그 역할은 북한내의 경공업인재 양성뿐 아니라 남북 경제 협력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는 데 있다고 한다. 개성공업단지에 진출한 남측 기업에 북측의 인재를 공급하는 것이 그것이다. 개성공단의 당초 계획(2004년)은 2011년까지 800만 평의 공단과 1200만 평의 배후도시를 건설하여 70만 명의 북한 인력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업종도 남북 경제의 균형 발전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분야가 설정되었다. 그래서 북한은 개성공단에 필요한 인재를 고학력 인재를 포함하여 공급하는 계획을 세웠다.
▲ 고려성균관 ⓒ wikipedia
그런데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직전인 2015년 말에 전자와 섬유 분야를 중심으로 124개 남한 기업이 5만 5천 명의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였고 북한노동자의 최저임금은 월 73.87달러(87,000원)에 월평균임금(각종 수당과 사회보험료 포함)은 187.6달러 (약 22만 원)였다. 사실상 저임 노동력 선호 업종들이 대부분이었다.
2016년 2월에 개성공단 문 닫을 때까지 전 기간에 지급된 임금은 5.5억 달러였고 이 중에 약 2.3억 달러 정도가 사회보험료와 현물 지급 차액 등으로 북한 당국에 이전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세금과 토지사용료 등을 더하면 약 3.2억 달러가 북한 당국 몫이 되었다고 추산된다.
반면에 개성공단의 생산액은 2016년 1월까지 합계로 약 33억 달러인데 기업의 이익률을 10%만 잡아도 3.3억달러이다. 북한 당국이 벌어들인 돈과 남한 기업이 벌어들인 돈이 최소한 같은 규모이고 남한 기업의 이익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시설투자와 운전자금 등에 들어간 금액을 회수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고 폐쇄 시 쌓아둔 원부자재의 비용을 감안하면 개성공단 진출 기업의 고통이 느껴지지지만, 매출의 손익 계산상으로는 그리 보인다.
북한이 벌어들인 외화로 핵 개발하는데 쓴다는 국제사회의 의심은 나름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유엔 안보리 결의보다 한 달 먼저 개성공단을 닫아 남북 경제의 상호의존을 완전히 격리한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우둔했다(유엔 안보리의 대북한 일반 경제재제는 2016년 3월 안보리 결의 제2270호부터 시작되었음).
일반적으로 나라들 사이에 노동력 활용과 외화 획득이 상호 Win-Win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경제발전을 위한 정책으로 될 수 있다. 그러나 개성공단 설립은 남한 기업이 북한의 소위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에만 그 본질이 있지는 않다. 더 중요한 본질은 남북 간 격리의 경계선인 개성에 상호의존의 경제활동이 일상적이며 지속적으로 가능한 공업지구가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북한은 이 개성공단에 보낼 고등 인재를 고려성균관에서 육성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임금 따먹기"적 발상만으로는 개성공단이 초라해진다.
개성은 우리 민족이 문명의 꽃을 피웠던 역사·문화가 있는 곳이다. 6.15공동선언후인 2005년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개성역사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남북이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하여 11월에 남북의 학자들이 개성에 모여 공동학술토론회와 유적답사를 하였다. 또한 남북(남측의 역사학자협의회와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은 고려의 황궁이었던 만월대(약76,000평)를 공동발굴조사하기로 합의하여 2007년 5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9년간 총 7차례에 걸쳐 발굴과 복구조사를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은 2013년 6월에 성균관과 만월대를 비롯하여, 선죽교와 남대문, 개성첨성대, 개성성과 왕건왕릉 등 개성의 11개 역사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
▲ 개성역사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북남공동학술토론회 참가자들이 선죽교를 참관 ⓒ 조선신보(2005년 11월 18일)
▲ '고려 황궁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 도록' ⓒ 남북역사학자협의회(2016년 12월)
남북 간에 개성은 문화의 통로이기도 하다. 2006년 3월1일에는 개성 성균관(고려박물관)에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되찾아온 북관대첩비를 북한에 인도하는 행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 장군이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퇴한 공을 기려 숙종 때 길주군 임명면(현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운 전공 기념 비석이다. 이를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두었던 것을 시민사회의 반환운동과 더불어 2005년 6월 28일 노무현 정부가 일본 정부에 공식으로 반환 요청함으로써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 개성 성균관에서 진행된 남북간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 조선신보(2006년 3월1일)
이제 남북은 민족 문명의 꽃을 피우기 위해 개성이라는 격리의 경계선에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교류와 상호의존의 장을 다시 마련해야 한다. 개성공단의 재개와 발전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임무이다.
교육과 역사·문화의 측면에서 보자면 [고려성균관]이 북한의 필요에 의한 경공업종합대학에서 더 나아가 민족공동의 역사·문화와 산업을 교육하는 남북 협력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거듭난다면 새로운 차원의 교육과 문화 창달이 일어날 것이다.
남북이 공동으로 운영하여 남북의 학자가 개성에서 연구조사와 강의를 공동으로 한다. 그리고 남측의 학생도 입학하여 기숙사에 산다. 그리하여 고려성균관이 남북이 함께 고려시대의 문명사를 연구하고 민족의 문화, 예술, 산업을 높은 수준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남북 공동의 대학으로 될 뿐 아닐라 남북 체제의 차이를 넘어 다양성과 융합을 이루는 창의혁신의 요람이 되기를 꿈꾼다.
남북이 교육 분야에서 상호의존할 수 있는 장소가 개성-격리의 경계선-에 있다는 것을 남북이 함께 생각하고 실천하기를 바란다.
※ 둘째 항목 의학과 셋째항목 산업은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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