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진의 야생화 세계
정양진의 역사 르포
鳳崗 丁海龍 - 연재 계획
10월 1일부터 한국사진방송 ‘정양진의 역사 르포’ 에 ‘鳳崗 丁海龍’의 삶을 재조명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선생은 1913년 7월 2일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거북정(龜亭)’에서 태어나 1969년 9월 16일 56세의 짧은 생을 그곳에서 마감하게 된다.
나라를 빼앗기고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수탈현장을 보면서 ‘양정원(養正院)’을 설립한 무상교
육,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지금지원, 탄광을 운영 이익금으로 독립자금 지원, 흉년으로 인한 빈민구제 및 정치활동 등으로 선생의 삶을
재조명합니다.
필자가 중점적으로 기술코자하는 부분은 ‘鳳崗 丁海龍’의 무상교육과 정치활동 외에 ‘가난은 나라님도 못 막는다.’는 말과 같이 흉년이
들어 먹거리가 부족할 때 수백석의 쌀을 면사무소를 통해 나눠주게 된 구휼활동 등을 재조명하려 합니다.
특히 그의 정치활동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선생은 진보세력의 혁신 정치인으로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창당에 참여하게 되고 조봉
암의 진보당 사건으로 옥고를 겪는다. 또 ‘통일 사회당’ 과 ‘사회대중당’의 당적을 갖고 활동 하였던 진보정치인이자 혁신계의 정치인이
었다.
4 19 후 ‘사회대중당’으로 보성에서 지지를 얻어 국회진출을 기대했으나 낙선하게 된다.
‘鳳崗 丁海龍’을 재조명하는 데는 정해진(丁海珍)이라는 아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정해진(丁海珍)은 동경대학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1944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사회주의 활동에 적극적으
로 참여하게 되고 한국전 때 북한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와 같이 丁海龍과 丁海珍은 사상과 이념이 다르고 삶의 궤적 또한 달라 남과 북에서 살아야 하는 비운을 갖고 있다.
‘鳳崗 丁海龍’ 선생의 정치적인 사건들을 다루기에는 아직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에서 이적성으로 유죄
판결이 있었던 진보당 사건과 혁신계 사건들이 이 시대의 판사들은 죄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고 사회통념 또한 그렇게 흐르고 있
어 ‘鳳崗 丁海龍’을 재조명하는 데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질 것 같다.
8월 23일 보성문화원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공동주관한 학술심포지엄의 자료를 바탕으로 10월 1일부터 매주 월요일에 연재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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