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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 영산강에서 교토까지, 역사의 질문을 찾는 여행
홍성화 저 | 삼인 | 2008년 08월 19일
책소개
임나일본부, 식민지 근대화, 독도 문제 등등, 한일 간의 역사 논쟁은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제기된다. 두 나라의 역사학자들이 연구와 논쟁을 통해 왜곡된 해석을 바로잡은 경우에도, 그 내용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무시되기도 한다. 『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는 역사책의 행간에서 질문을 찾고, 영산강 유역부터 일본의 교토와 도쿄에 이르기까지 고대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될 유적들을 실제로 답사하며, 흩어져 있는 실마리들을 모아서 꿰어보는 방법으로 역사의 진실을 엿보고자 했다. 답사의 행적을 보여주는 사진과 지도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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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 장차 전원이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1장 영산강 유역에서
아! 영산포
수수께끼 무덤 떼
토기의 비밀
무덤 양식의 결정판인 복암리 고분
전방후원
2장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강변마을의 고인돌
고인돌을 찾아서
전남 동부의 고인돌
고인돌의 흐름은 어디까지
3장 천손 강림 신화
다카치호노미네
사이토바루 고분군
잃어버린 백제의 유민, 난고 촌
또 다른 다카치호
천손 강림의 장소
세토 내해를 건너
4장 진구(神功)의 삼한 정벌
나라의 추억
삼한 정벌론의 실체
남해안에 진출한 백제
일본 사서의 윤색
칠지도의 비밀
5장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
진구의 내력
아메노히보코의 이동 경로
가야 왕자 쓰누가아라시토
연오랑과 세오녀
6장 왕인 유적지의 허와 실
왕인에 대한 상념
왕인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
친일파가 세운 박사왕인비
7장 도래인을 찾아서
민중의 소망, 미륵불
금동반가사유상 추적
교토의 단상
인간 존재의 정화
하타씨족의 내력
도래인의 추억
울진에 가면
8장 백제의 온전한 복원을 바라며
무령왕릉
사마왕의 탄생
곤지의 계보
청동거울의 비밀
9장 게이타이 천황
어느 쪽이 천황의 무덤인가
수수께끼의 인물, 게이타이 천황
일본 고대 최대의 전쟁 이와이의 난
진구에 대한 상념
10장 야마타이국을 찾아서
마키무쿠 고분군의 수수께끼
야마타이국 논쟁
야마타이국은 규슈에 있었는가
야마타이국과 요시노가리
11장 무덤을 찾아서
거대한 고분
기비 지역의 세력
푸른 동해의 진실―네 귀퉁이가 돌출된 무덤
이즈모의 독특한 문화
서쪽과 다른 동일본의 세계
방형주구묘
12장 고대분절국가
남쪽 끄트머리에서
숨겨져 있던 백제 왕국
만가촌에서
13장 임나 이야기
임나
아라가야
광개토왕릉비문 신묘년조
임나일본부
14장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백제의 항전
주류성은 어디에
한국과 일본의 징검다리
백제 구원의 길을 찾아서
답사를 마치며―사실과 이성을 바탕으로 열린 민족주의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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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저 : 홍성화 관심작가 알림신청 작가 파일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배재고, 연세대를 졸업하고 고려대 사학과에서 고대한일관계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역사연구소 및 일본연구센터 연구교수, MBC 특집 다큐 "페이퍼 로드" 자문위원을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교양교육원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충청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충주박물관 운영위원, (재)중원문화체육진흥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고대사에 관한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 양쪽의 분석틀을 비판하고 새로운 고대사상(像)을 제시하고자 관련 연구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하사인가 헌상인가의 논쟁이 있었던 칠지도(七支刀)와 관련해서는 적외선 사진에 나타난 새로운 글자를 통해 독창적인 해석과 분석을 도출하여 고대한일관계사상이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기도 했다. 역사가 몇몇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과 호흡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교류에 작은 몫이라도 기여하는 연구자 겸 실천가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틈나는 대로 우리 땅을 비롯해 동아시아 곳곳을 톺아보며 열심히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동아시아 속의 한일관계사 상(上)』(공저), 「이소노카미(石上)신궁 칠지도에 대한 일고찰」, 「4~6세기 백제와 왜의 관계」 외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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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알다시피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에서 세력권을 가지고 있었다든지, 한반도 각국을 속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았다든지 하는 인식이 일본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반대로 한국 사람들에게는 고대에 백제가 일본열도를 점령했다든지, 일본의 천황족은 백제나 가야의 왕족과 같다든지 하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은 국민의 민족주의 감정을 바탕으로 두 나라의 언론과 출판이 흥미 본위로 접근하거나 인기에 영합한 탓이 크다. 역사를 분석하는 작업은 진실을 찾아 삶의 됨됨이를 돌아보는 일이어야지, 결코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책머리에」에서
우에노 공원 한편에 시커먼 비석 2기가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다름 아닌 왕인 비석이었다. 이곳 도쿄의 한복판인 우에노 공원에 왕인의 비가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런데 이 비를 이곳에 세운 연유를 살펴보고 나서는 기쁨이 금세 분노로 바뀌었다. 일제는 이 비를 침략 야욕을 가장 심하게 드러낼 때인 1940년과 1941년 두 차례에 걸쳐 세웠다. 창경궁에서 하사한 은자(恩資)와 일본의 집권자 고노에(近衛) 수상을 비롯한 황족, 고관, 문학자, 승려, 정치가 등 각계 명사 230여 명의 도움으로 세웠는데, 비석 건립을 협찬한 사람들 중에는 친일파로 지탄을 받은 한국인들이 13명이나 끼어 있었다. 이 자리에 왕인의 비석을 세운 것은 일본이 내선일체를 주장하고자 왕인을 추앙하는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일본 본토와 차별적인 정책을 취했는데, 태평양전쟁을 벌여 조선인을 징병하면서 내지인과 식민지인의 차별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내선일체를 주장했다. 이처럼 우에노 공원에 박사왕인비를 세운 것이나 히라카타의 왕인묘를 헌창한 것, 또한 나주 본원사의 아오키가 왕인의 동상 건립 계획을 주창한 것 모두 그 배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 pp.206~208
지금까지 우리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것으로 영토와 영역을 확정하려는 유물론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보았다. 고분의 유형이나 분포를 조사해서 왕조를 구분하려 하고 영역을 확정하려 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런 시각 때문에 일본에서 한반도계 유물이 발견되는 것을 보고 일본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세운 국가라는 결론까지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단지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도래인이 국가를 세웠다고까지 확대 해석할 수는 없다. 이는 거꾸로 한반도에서 일본 계통의 고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상호교류 속에서 나타난 산물을 곧바로 영토와 국가의 증거로 보는 사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 「답사를 마치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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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영산강에서 교토까지, 역사의 질문을 찾는 여행
1917년 12월, 조선총독부박물관 고적조사위원인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영산강 유역, 나주 반남면의 옛 무덤들을 발굴 조사했다. 그는 이 일대의 고분 31기에 번호를 붙이고, 짤막한 보고문 10여 줄을 남겼다. “그 매장법과 관련 유물로 보건대 아마 왜인(倭人)의 것으로 추측한다”면서. 1935년 5월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사가 준이치(澤俊一)와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반남면 신촌리, 덕산리 등의 독무덤 5기를 추가로 발굴 조사했다. 이때 아리미쓰 교이치는 덕산리 2호분과 신촌리 6호분이 일본의 고분 양식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닮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 고분 2개는 긴사각형이기는 하지만 앞에 네모지고 뒤는 둥글며 주위에 도랑을 두른 전방후원분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1984년 해남 방산리에서 정말로 전방후원형으로 생긴 무덤(방산리 장고분)이 발견되었다. 이후 영광의 월계고분, 함평의 장고분, 마산리 표산 고분, 신덕 고분, 담양 고성리 월성산 고분, 성월리 고분, 해남의 말무덤 고분, 영암의 자라봉 고분, 전북 고창의 칠암리 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과 월계동 고분(2기)까지, 열세 개에 이르는 전방후원형 무덤이 영산강 유역과 그 남쪽 일대에서 나타났다. 처음에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을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했다는 증거로 삼았고,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한반도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라는 주장도 나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고분의 조성 연대(5세기 말~6세기 중엽)는 일본 전방후원분(3~6세기)보다 늦다. 이들 무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이들 무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것일까?
임나일본부, 식민지 근대화, 독도 문제 등등, 한일 간의 역사 논쟁은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제기된다. 고대사에 대한 두 나라 일반 시민의 의식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은, 과거 역사책들 거의 모두 국가가 주도해 편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를 보면 고구려든 백제든 신라든, 또 왜든, 서로의 존재를 빼고 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고대 한일 관계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한국 고대사나 일본 고대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데도, 흔히들 한국인들은 단순히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해주었다고만 생각하고, 일본 쪽에서는 반대로 자기네가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생각한다.
고대 사람들이 문자로, 유물로, 유적으로 남긴 흔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수수께끼이고 질문이다. 지나간 역사에서 진실을 건져내려면, 문자 기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유물 하나에 좌지우지되지 말고, 기록의 행간에서 물음표를 찾아내며 유적과 유물의 맥락을 읽어야 한다. 옛 사람들이 남긴 실제 증거인 유적과 유물을 바탕으로 문자 기록의 틈새에서 질문을 찾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역사를 배우는 일이다.
『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눈으로 보고, 역사책과 학자들의 의견뿐 아니라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옛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고대 한일 관계의 진실을 엿보고자 했다. 한국과 일본 곳곳에 남아 있는 두 나라 고대사의 흔적을 다니며 먼저 역사의 질문을 찾는 여행을 하면서 지은이는 비로소 스스로의 모순된 역사의식을 마주했고, 사실과 이성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의 역사 왜곡을 비판할 수 있었다.
이키 섬의 가쓰모토(勝本)라는 곳에 가면 과거 조선의 통신사들이 머물렀다는 아미타당(阿?陀堂) 옆에 진구를 제신으로 하는 쇼모(聖母) 궁이라는 신사가 있다. 가쓰모토라는 곳은 진구가 삼한을 정벌한 뒤 돌아와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명을 승본(勝本)으로 고쳤다는 곳이다. 그런데 신사 안내판에는 진구가 삼한 정벌 때 적군의 목 10만여 개나 가져와 바닷가에 묻었다고 씌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타던 신마(神馬)의 발자국이라는 돌이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전승된 이유가 무엇일까?
진구의 말굽석 곁에 또 다른 비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文永之役元軍上陸地’라는 비석이다. 고려 말 여몽연합군이 이키 섬을 공략할 때 상륙했다는 곳이다. 『신원사(新元史)』에는 당시 참담하게 패배한 이키 섬의 상황이 실려 있다. 이 전쟁으로 쓰시마와 이키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화살을 쏘지 못하도록 손에 구멍을 뚫어 쇠사슬로 배에 묶어두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북부 규슈에 남아 있는 진구에 대한 전설은 여몽연합군의 공격, 백촌강 전투의 패배, 쓰시마 정벌 등으로 인한 반작용이 설화의 형태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와 궂은 일이 많았던 탓에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통로로 진구 증후군이 급속도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허구가 진실로 만들어진 것은 어쩌면 그들 나름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일종의 보상 콤플렉스는 아니었을까 싶다. (중략)
이처럼 후대의 인식으로 고대를 재단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사람들은 흔히 근대와 현대의 인식으로 고대의 사실까지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려고 한다. (중략)
우리의 실정도 마찬가지다. 역시 고대사 해석과 설정은 중구난방이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성과는 일본 것을 그대로 베끼면서 근거 없는 마음 속 소망만은 일본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표출된다. 이런 주장이 판을 친다면 황국사관에 젖어 임나일본부설과 진구의 삼한 정벌을 주장하는 일본의 극우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 쇼비니즘을 버리고, 사실과 이성을 근거로 열린 민족주의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과도한 갈망이 역사 왜곡을 낳는 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겠다.―「답사를 마치며」에서
일본인들이 왕인을 칭송한 진짜 이유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의 진실은 무엇일까?
『삼국유사』에는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랑이 어느 날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아내인 세오녀도 바닷가에서 남편을 찾다가 우연히 올라선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서 남편을 만났다고 한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제외하면 한국의 사료에서 한반도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가 터를 잡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일본의 사료에는 신라나 가야, 백제에서 건너간 사람들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8세기 초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신령한 물건들을 가지고 일본으로 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메노히보코는 남편을 찾아간 세오녀와 반대로 아내를 찾아 바다를 건넜다. 그는 세토 내해를 거쳐 지금의 오사카 근처에 와서, 북쪽으로 올라가 비와 호(琵琶湖) 동쪽을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 뒤 이즈시(出石) 지방에 정착했다고 한다(147쪽 지도 5-1 참조). 한반도의 서해안에서 일본 규슈까지 이어지는 고인돌의 흐름(97쪽 ‘한국과 일본의 고인돌 분포도’ 참조)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 이전 시대부터 백제 멸망 이후까지 한반도 사람들이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씨족을 이루고 다양한 계층을 형성했다.(5장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
삼족오는 고구려만의 것일까?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세 발 달린 까마귀는 동북아시아에서 태양의 상징으로 널리 공유되었다. 일본의 초대 천황이라는 진무(神武)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야타가라스(八咫烏)의 인도를 받아 야마토에 도착해 천황으로 즉위한다. 야타가라스는 현재 일본 축구대표팀과 일본축구협회(JFA)의 상징이기도 하다.(3장 천손 강림 신화)
삼한 정벌론의 실체는 무엇일까?
진구(神功)는 주아이(仲哀) 천황의 황후인데, ‘처녀의 눈썹 같고, 눈부신 금과 은이 가득한 서쪽에 있는 나라’, 곧 신라를 정벌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는다. 그러나 주아이 천황이 신라 정벌을 꺼리자, 신이 그를 죽여 진구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구는 서기 201년부터 269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그렇다면 진구는 3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인물인데, 진구가 정벌했다는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 곧 파사이사금은 서기 1세기 무렵의 인물이고, 진구 시대에 신라왕이 사신으로 보냈다는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곧 박제상은 5세기 초엽 사람이다. 게다가 진구 시대에 활동했다는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은 4세기 초 ? 중반 사람이다. 진구에 관한 기록은 서로 다른 시대의 이야기들을 짜깁기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삼한을 정벌했다는 진구 이야기는 임진왜란 뒤에 왜군을 혼내주었다는 사명대사 이야기처럼,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하고 왕조의 위세를 세우려고 만들어낸 ‘설화’가 아닐까?(4장 진구의 삼한 정벌)
일제강점기 일본에 왕인을 칭송하는 비석이 세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왕인은 일본에 한자와 유학을 전해주었다는 백제 사람이다. 전남 영암 구림리는 얼마 전부터 왕인의 탄생지로 알려져 왕인 박사 유적지가 조성되고, 1997년부터 해마다 영암왕인문화축제까지 열리고 있다. 왕인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우리 역사책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일본 사서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그리고 영암이 왕인의 탄생지라는 것도 20세기 초반 공주의 유학자인 이병연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의 근거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이 밖에 1932년 나주 영산포의 본원사(本願寺) 주지인 일본인 승려 아오키(靑木惠昇)가 영암 구림리에 왕인 박사의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글을 썼다. 이 두 문서 외에는 국내외 문헌 어디에도 왕인의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일본에는 왕인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오사카 부 히라카타 시의 왕인 묘로 전해지는 곳은 1938년 오사카 부 사적 13호로 지정되었고, 전후에는 여기서 해마다 11월 3일에 왕인제를 연다. 그리고 1940년과 1941년 도쿄 우에노 공원에 왕인을 기리는 ‘박사왕인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창경궁에서 하사한 은자(恩資)와 일본의 집권자 고노에(近衛) 수상을 비롯한 황족, 고관, 문학자, 승려, 정치가 등 각계 명사 230여 명의 협찬으로 세워졌는데, 이들 중에는 친일파로 지탄을 받은 한국인이 13명 끼어 있었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거세어질 무렵에 왕인을 기념하는 운동이 집중해서 벌어졌다. 이는 일본이 조선인까지 전쟁에 총동원하려고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 과거 조선과 일본의 밀접했던 관계를 새삼 내세우고자 왕인을 추앙했던 것이 아닐까?(6장 왕인 유적지의 허와 실)
영산강 유역에 있는 고대 일본식 무덤은 누구의 것일까?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글며 도랑, 곧 주구(周溝)에 둘러싸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일본의 전형적인 고분이다. 그런데 서남해안 지방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현재까지 열세 군데나 발견되었다(40쪽 ‘한반도의 전방후원형 고분’ 지도 참조). 이들 무덤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본이 파견한 왜인의 무덤이라는 설, 백제의 힘이 미치기 전 토착 세력의 무덤이라는 설, 백제 때문에 구심점이 사라진 후 이 지역에서 성장한 중소 규모 세력의 수장이 묻힌 곳이라는 설, 백제가 파견한 왜인 관료의 무덤이라는 설, 일본에서 망명한 마한계 왜인의 무덤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일본에서 전방후원분은 3세기에 나타나 6세기 후반 들어 점차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대개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 ? 중반에 만들어졌고, 다른 무덤들이 같은 지역에 여럿 모여 있는 것과는 달리 한 지역에 한두 기 정도만 있다. 이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오랜 세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한두 세대 만들어지다가 곧 사라졌음을 뜻한다. 곧 일시적인 ‘유행’이었다는 말이다. 백제 무령왕릉도 중국 남조 계통의 벽돌무덤이어서, 무령왕의 능임을 증언하는 지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중국인의 무덤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무령왕릉은 백제가 중국 남조의 문물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로 인정된다. 과거에 중국의 여러 왕조와 백제, 가야, 일본이 교류하려면 한반도의 서해안을 꼭 거쳐야 했다. 서남해안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바로 이런 국제 교류의 산물이 아닐까?(1장 영산강 유역에서, 12장 고대분절국가, 13장 임나 이야기)
『삼국사기』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나 백제가 왜군과 동맹했다고 한 것을 『일본서기』에서는 왜 삼한을 정벌했다거나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고 할까?
과거에 국가가 역사책을 편찬할 때의 주요 목적은 왕조의 정당성 확립이었다. 그것은 고려 왕조가 편찬한 『삼국사기』나 조선 왕조가 편찬한 『고려사』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할 당시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천황 통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 천황 중심주의가 바탕 이념이 되었다. 고대 일본에서 학문 연구와 문서 편찬을 담당했던 이들 중에는 도래인(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의 후손이 많은데, 이들이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찬에 관여하면서, 자기네 선조가 한반도에서 했던 일을 현재 자신이 섬기는 천황의 선조에게 충성하고자 했던 일처럼 윤색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이른 시기부터 신라나 가야, 백제가 왜에 신하로서 조공했던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해서 당시 일본에 정착한 많은 도래계 씨족들이 천황과 일본의 신하라는 지위를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사서를 위서라고 단정하기보다는, 당시의 배경과 맥락에 따라 합리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4장 진구의 삼한 정벌, 14장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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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
내용 평점3점 편집/디자인 평점3점 | flydol | 2009-05-12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1372594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완성하고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며, 새로운 정책을 펼침으로써 근대로 가는 기틀을 다진 일본의 메이지 유신, 그 메이지 유신의 초기에 일본 통치자들이 내세운 정책은 한국을 정벌한다는 ‘정한론’이다.
정한론은 일본이 대륙으로 나가는 발판을 마련하고 대륙을 식민지 삼으려는 침략의 정책일 뿐 아니라 일본 국내의 정치적 문제를 안정시키려는 사정도 있었다고 한다. 서양의 개방 압력을 받아들인 일본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식민지 정책을 참고하여 조선을 침공하여 자신들의 구미열강과 맺고 있는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반대 세력을 국외 전쟁으로 보내어 불만을 무마하고,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며, 조선의 자원을 일본으로 반출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목적도 있었다.
저자는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근대의 일제 침략과 정한론을 공부하다가 정한론의 뿌리가 고대사까지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대 한일 정치외교사’를 연구하게 되었다. 기존의 한국과 일본 고대사의 틀, 전혀 상반되는 두 나라 역사학자들의 틀을 비판하고 철저한 현장 답사에 의해서 진실을 밝히고자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말한다.
기록이나, 유물도 거의 없고, 시간으로도 너무나 오래전의 일, 흔적조차 뚜렷하지 않은 고대사와 관련된 유물을 찾아 저자는 영산강 유역으로 시작한 한반도 와 일본열도의 관련 유적을 두루 답사한 노력 끝에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빼곡한 글자와 사진의 엄청난 자료를 남겼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 왕인 이야기, 고대에 백제가 일본을 점령 했다는 설, 일본의 천황족은 백제나 가야의 왕족과 같다는 우리의 일본에 대한 역사 인식이나
또 그와 반대로 일본이 고대 삼한을 정복했고, 백제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으며, 고대 한반도 남쪽 지역을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는 설 등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역사인식은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고대사를 뒷받침하는 양국의 기록물인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도 그 내용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일본과 한국의 고대사는 주로 일본이 독도에 대해서, 과거 한반도의 영토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주장을 내세우며 시비를 걸면 우리는 거기에 맞서 항변하는 듯한 인상이다. 그런데 왜 자꾸 일본이 고대사를 들추며 한국에 시비를 거는 것일까? 지속적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우위권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외교적인 제스츄어일까? 한국 식민지 지배와 2차 세계대전을 이끈 주도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일까? 또 다른 정복 전쟁을 위한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서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무튼 그들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역사 교육과 역사 인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학생들이 성적과 관련해서 할 수 없이 교과서를 읽어보는 정도로는 절대로 역사의 중요성을 알 수 없다. 그때 있었던 그런 일이 지금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를 배우는 역사 교육이 되어야 하겠다.
이 책은 철저한 유적지와 유물 답사로 한일 고대사를 상세히 파헤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역사를 상세하게 공부한 적이 없는 일반인이 읽기에는 다소 딱딱하고 힘겨운 책인 것 같다. 사람이든 책이든, 딱딱하고 어려우면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게 마련이다. 아주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 더 많이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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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고대사의 비밀을 찾는 여행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eehwan | 2008-10-06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1107205
일본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유물은 고류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이 불상에 대해서 “진실로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라고 말하면서 최대의 찬사를 보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런데 <고류사 내유기(內由記)>에는 이 반가사유상이 “603년 백제에서 쇼토쿠 태자에게 전해준 불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최고 국보인 이 불상은 백제에서 만든 것인가? 대한민국 국보 83호인 ‘금동 반가사유상’과 일본의 ‘목조 반가사유상’의 형태와 양식은 매우 유사하여 같은 사람 혹은 같은 집단에서 제작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616년 신라가 불상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623년에도 신라에서 불상과 금탑, 사리를 보냈다는 내용도 있다. 이때 보낸 불상이 ‘반가사유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고류사 내유기>의 기록과 <일본서기>의 기록 중에 어느 것이 맞을까. 즉 ‘반가사유상’은 백제에서 온 것인지 신라에서 온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는 일단 ‘반가사유상’의 목재 재질에 있다. 반가사유상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적송’이었다. 적송은 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 일대, 그리고 백두산에서 서식한다. 강원도와 경북 북부 일대라면 신라의 영역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 책 <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삼인,2008년)의 저자인 홍성화는 경북 봉화에서 발견된 밑동만 남은 석조 반가사유상에 주목한다. 이 석조 반가사유상은 백제 반가사유상이나 일본의 목조 반가사유상과 모양새가 비슷하다고 한다. 이 유물 역시 신라가 반가사유상을 일본으로 보낸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저자는 고류사로 간다. 도래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그곳에는 저자는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는 동해안에 있는 울진의 봉평비를 찾는다. 이 비문 글자 중에 ‘파단(波旦)’이란 단어에서 그는 무언가 실마리를 찾는다. 단(旦)은 차(且)로도 볼 수 있다. 파단은 일본어로 발음하면 ‘하타’라고 읽으며, ‘하타’는 백제계로서 일본에 건너간 사람집단을 말한다. 이렇게 문헌 연구를 하면 부족한 부분은 직접 현지 답사를 하며 저자는 고대사의 진실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어디에서 왔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하타씨족이 강원도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면, 필시 백제에서부터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백제인이 만든 반가사유상의 기법이 울진과 봉화지역에 전해진 것 같다. 그리고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통합하면서 이들 백제인이 신라인으로 둔갑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일본 반가사유상의 고향을 백제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책에는 영산강 유역의 고분 형태가 일본의 전방후원분인 것에 대한 의문을 파헤치고 있으며. 일본에 한자를 건네준 왕인의 숨은 이야기 속에 후대에 왕인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한 일 양국 사람들의 추한 모습도 담아내고 있다. 또 무령왕과 일본의 관계, 임나일본부 등 고대사에 있어서 의문의 중심에 있는 부분들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나라 여러 곳과 일본을 종횡무진 돌아다닌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한국 고대사를 알려주는 한국의 사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권의 책이 고대사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말해주고 있지 않다. 고려시대에 쓰인 책이다 보니 그때까지 존재했던 삼국시대의 문헌의 내용을 기초로 해서 쓰여 졌다. 그러다 보니 많은 부분에서 공백이 있다. 그래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중국의 사서나 일본의 사서인 <일본서기>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에 그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 즉 어느 사서이든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나 <일본서기>는 거의 소설 수준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훨씬 이전에 쓰인 책이다 보니 한국고대사를 해석해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책이다. 그래도 문헌만 가지고는 연구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직접 현장을 찾아가고 유물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역사 연구에 있어 답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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