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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親日과 抗日, 두 가지 전략 구사했다?
박해현 문학전문 기자기사 북마크 기사 공유 글꼴 크기
입력 2015.11.30 04:25
이광수 삶·문학 재조명 활발

자료집 '이광수 초기 문장집' - 청년기의 민족개조론 집대성
평전 '자유꽃이 피리라' - 춘원의 친일, 위장 친일로 규정

춘원 이광수(1892~1950?)를 재조명하는 연구 활동이 최근 활발해졌다.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 일본 니가타현립대 명예교수와 최주한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가 '이광수 초기 문장집'(전 2권·소나무)을 엮어서 냈고, 김원모 단국대 역사학과 명예교수가 이광수 평전 '자유꽃이 피리라'(전 2권·철학과 현실사)를 출간했다. 김 교수의 평전은 춘원의 친일을 '위장(僞裝) 친일'로 규정해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다.

'이광수 초기 문장집'은 춘원이 1908~1919년 청년 시절에 쓴 글을 한자리에 모은 자료집이다. 발표 당시의 원문 표기를 그대로 살렸기에 일반 독자보다는 연구자들을 겨냥한 책이다. 하타노 세츠코 교수가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찾아낸 잡지 '신한자유종(新韓自由鐘)'을 비롯해 지난 10년 사이 뒤늦게 발굴된 춘원의 자료도 이미 알려진 자료에 덧붙여서 기존 연구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신한자유종'은 춘원이 도쿄 유학 시절 유학생들과 함께 낸 등사판 잡지였고, '비분강개한 애국적인 글'을 실었다가 일본 경찰에 압수돼 지금껏 극비 문서로 보존된 것이다. 이번 자료집은 춘원이 논설과 수필뿐 아니라 시와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민족 독립을 추구한 기록을 보여준다.


1937년 ‘문장독본’을 냈을 때의 이광수. 오른쪽은 이광수가 1910년 도쿄 유학 중 편집한 잡지 ‘신한자유종’의 표지. 일본 경찰이 독립 정신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압수한 뒤 찍은 ‘극비(極秘)’ 도장이 오른쪽 위에 선명하다. /철학과 현실사 제공
'이광수 초기 문장집'을 엮은 하타노 교수는 한국 근대문학을 전공한 일본인 학자로 연구서 '무정(無情)을 읽는다'를 낸 바 있다. 그는 최근 일본에서 평전 '이광수-한국근대문학의 아버지와 친일의 낙인'(중앙공론사)도 냈다. 일본 주요 언론이 잇달아 서평을 실은 가운데 마이니치신문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정한 역사관에 의한 역사의 소유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고뇌를 응시하는 겸허한 시선일 것"이라며 "전후 70년에 어울리는 책"이라고 평했다.

청년 이광수의 글 중에 새로 주목받는 것은 '먹적골 가난뱅이로 한세상을 들먹들먹한 허생원'(1914년)이다. 박지원의 한문 소설 '허생전'을 근대적 한글로 풀어쓴 것. 춘원은 허생의 입을 빌려 조선의 상공업 멸시 풍토를 질타했다. "죠션의 배가 남의 나라에 다니지 아니하고 수레가 내 나라 안에 다니지 아니함으로 모든 물건이 제 곳에서 나서 제 곳에서 없어지고…"라며 청년들에게 창업과 무역 정신을 불어넣으려 했다. 춘원은 연해주를 떠돌면서 현지 동포들에게 "나라를 찾을 이가 우리밖에 없나이다"라고 역설하며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고 했다. "술을 잡수시다가도 내가 독립군이니 몸이 약하게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 하시고, 돈을 쓰시다가도 내가 본국까지 나갈 차비와 총 한 자루 값은 평생 몸에 지녀야 할 것을 생각하옵소서. 여러분의 돈은 피땀 흘려 벌은 것이니 독립 전쟁에 쓰기 마땅한 것이로소이다."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평전 '자유꽃이 피리라'(1852쪽)를 통해 "춘원이 친일과 항일 투트랙 전략을 구사했다"고 강조했다. 춘원은 민족운동단체 '동우(同友)회' 결성에 관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937년 안창호를 비롯해 180여 명이 검거된 '동우회 사건'이었다. 김원모 교수는 춘원이 고문에 시달리는 동지들의 무죄 석방을 위해 재판부에 친일을 위한 사상전향서를 제출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청년들의 우상이었던 춘원이 민족 지도자로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위장 친일'을 선택했다는 것. 동우회는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탄압 때문에 해산됐다. 춘원은 그 이후 조선인의 학병 지원을 권하는 행사에도 나섰다. 평전 '자유꽃이 피리라'는 '조선인의 학병 입대를 장차 독립군의 기간 장교를 육성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고 풀이했다. 또한 춘원은 일제 말기에 조선어 소설 11편을 발표했다. 김원모 교수는 "조선어 사용 전폐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조선어로 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민족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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