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1
잠들 수 없는 거북정, 비밀의 정원 : 정해룡 정해진
잠들 수 없는 거북정, 비밀의 정원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잠들 수 없는 거북정, 비밀의 정원
등록 :2013-12-03 19:17수정 :2013-12-22 17:08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곽병찬 논설위원잠은 쉬이 오지 않는다. 달은 이미 일림산 서쪽 산자락을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사랑채 곳곳은 수런대는 소리들로 어수선하다. 해방의 환호, 도주, 토벌, 방화, 오열….
그때도 미명조차 깔리기 전이었다. 4시나 되었을까. 일꾼 하나가 사랑채 문을 다급하게 두드린다. 숨소리가 가쁘다. 곧 행랑채가 술렁댄다. 보성인쇄소에서 삼십리 길, 일꾼은 파김치가 되었을 법도 한데, 목소리는 들떠 있다. 서방님, 해방입니다, 해방.
사발통문이 돌려지고, 아우 해진과 6촌 이내의 종희·종호·종팔 그리고 해두·해묵 등 일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일꾼들은 분주하게 뒷산을 오가며 장정 키만한 대나무 한 짐씩 져 왔다. 아침나절에나 조용해졌다. 낮 12시, 스피커에서 일본 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짧은 항복선언이 끝나자 정씨네 사람들은 죽창을 들고 대문을 나섰다. 전일리 등을 거치면서 행렬은 급격히 불었다. 율포 초입 벽사정을 지날 때쯤은 밀물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조선 3도 수군 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승주·순천·낙안을 돌아 군사와 무기, 보급품 그리고 양민들과 함께 율포에 도착한다. 종사관으로 임명된 정경달은 벽사정에서 선조의 교지를 전달했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신에게는 12척의 전함이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정유재란의 첫 대첩지 울돌목으로 출격한다. 봉강 해룡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정경달의 13세손. 죽창을 든 사람들은 율포 신사로 밀려갔다. 득량만을 한눈에 굽어보는 둔덕 위에 거대한 불길이 일어난 건 15일 2시. 잠시 뒤 봉강의 율포 양조장 앞에선 36년 만의 마을 축제가 벌어진다.
잠자리를 걷었다. 사랑 대청에 서니 득량만에 새벽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진다. 문득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설동백. 첫서리가 오면 피기 시작하는 동백이다. 사랑채 정원엔 한반도 형상 작은 연못이 있다. 홑겹의 연보라 꽃잎 속 노란 꽃술이 선명하다. 연못 둘레엔 정씨댁 5군자, 매화·난초·국화·대나무·솔이 사철 푸르다.
가까운 영천리 도강재 마을의 송계 정응민 선생은 사랑채 단골이었다. 강산 박유전을 비조로 하여 서편제 보성소리를 완성한 천하의 가객. 명창 정권진·성우향·성창순은 그의 제자들. 송계는 물론 제자들의 소리가 완성되면 이곳 사랑채에서 시연을 하곤 했다. 장건상·김성숙 선생 등 몽양계 거물이나 인촌 김성수 등이 찾아와 머물 때도 소리판은 벌어졌다.
안채로 들어선다. 해방공간에서의 방화 등 숱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본채. 대문에서 보면 중문채를 거쳐 한 단 높은 곳에 중문이 있고 그 너머에 본채가 있다. 특이하게도 중문 뒤엔 담 하나가 버티고 있어 안채를 가려버린다. 내외담이다. 사랑채 문 건너편에도 내외담이 있다. 안채 여인들의 동태는 그렇게 꼭꼭 가려져 있었다. 객들은 중문채 쪽문을 통해서만 사랑채로 들었다. 본채는 7칸 겹집에 5량 구조다. 큼직하다. 정면 기둥 9개 가운데 5개는 둥근 기둥이다. 궁궐 또는 관아에서나 쓰던 기둥이다. 봉강의 증조모가 홍살문을 하사받은 열녀 집안이었기에 둥근 기둥을 허락했다. 본채 오른쪽 뒤편엔 사당이 있다. 사당….
“그래, 너희들은 조상도 없느냐. 어디에 불을 지르려 하느냐.” 어머니의 노기 띤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대문·행랑채·중문, 우물가 감나무까지 방화하며 들어온 이들이 사당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어머니는 사당으로 들어가, 위패를 하나씩 들고 나왔다. 12대 선조의 위패를 모시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경찰과 치안대가 슬그머니 물러섰고, 그래서 150년 거북정 본채는 살아남았다.
봉양과 그 형제들이 소싯적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배운 건 천자문·소학·동몽선습 따위가 아니었다. “선조는 누구신가.” “정경달 할아버지입니다.” “경자 달자 할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는가.” “왜군과 싸워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니 병탄은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6촌 해두, 당숙 종팔 등은 일제 때 실형을 살았고, 봉강과 해진도 유치장에 수감됐었다.
할아버지 정각수 옹은 상해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봉강은 직접 만주로 가거나 인편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안에서는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향리에 직접 양정원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곳간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흉년이 들면 땅을 팔아 곡식을 마련해 구휼에 썼다.
할아버지 정각수 옹은 상해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봉강은 직접 만주로 가거나 인편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안에서는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향리에 직접 양정원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곳간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흉년이 들면 땅을 팔아 곡식을 마련해 구휼에 썼다. 그래서 인근 주민들은 봉강의 압해 정씨 종택을 자신의 종가인 양 따랐다.
그런 집안이었으니, 친일파들과는 그림자라도 섞을 수 없었고, 그런 자들을 중용한 미군정과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봉강은 해방 후 자생적 자치기구인 보성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몽양의 건국준비위원회 지역위원장도 맡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와 건준을 해체했다. 봉강은 인민위원회 해산을 거부하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가 따르던 몽양도 암살당하고, 그가 재정부장으로 나섰던 근로인민당도 해산됐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가친척들은 혁신계로, 그리고 혁신계에서 좌익으로 밀려났다.
일림산을 오른다. 봉황이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형국의 산. 그러나 좌우 날개는 꺾여 긴 고개만 높이 쳐들고 있다. 계곡 작은 개울을 넘으면 산기슭에 삼의당이 있다. 할아버지가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지은 별채다. 당호엔 부정부패에 휩쓸리지 말 것, 선영을 지킬 것, 후세 교육에 철저히 할 것 등 3가지 지켜야 할 덕목이 담겨 있다. 삼촌 정종희(봉강의 삼촌)씨의 무덤이 있다. 건국 이래 유일무이한 장님 간첩.
인공 치하는 불과 3개월 만에 끝났다. 인공에 협조하던 일가친척들은 산으로 숨어들거나 월북했다. 종희씨의 누이 국남, 형 종팔은 산으로 들어갔다가 각각 백운산과 모유산에서 사살당했다. 종희씨는 일림산에서 토벌군 총에 맞아 실명했다. 봉강과 6촌지간인 해두·해종·해평은 각각 백아산·모우산·일림산에서 사망했고, 해승은 군산교도소에서 처형당했으며, 해묵은 월북했다. 봉강댁 집사였던 종호씨는 4차례나 투옥됐고, 6촌 해필은 3차 보도연맹 학살 때 보성에서 처형당했다.
산판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곳곳에 야생 차나무의 녹음이 11월에도 성성하다. 20여분 오르니 봉강의 묘지다. 그 밑에 셋째 아들 춘상의 묘가 있다. 1980년 붙잡혀 1985년 간첩죄로 처형당한 셋째 아들이다.
봉강은 동란을 전후해 고향집 거북정에 칩거했다. 1957년 몽양계 김성숙·장건상 등과 함께 근로인민당 재건에 나섰지만, 이번에도 이승만은 가만두지 않았다. 모두 투옥됐다. 4·19 혁명 후 사회대중당을 거쳐 1961년 통일사회당을 창당하는 등 혁신계의 재건에 나서지만, 이번엔 5·16 쿠데타와 함께 투옥된다. 무죄로 출감하지만, 봉강은 좌절이 깊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그의 이상을 펼칠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3천석지기 재산은 모두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재산과 청춘을 바쳐 새로운 세상을 꿈꿨지만, 그 꿈은 가문을 폐족으로 내몰았다.
1980년 11월, 춘상, 다섯째 길상씨 등이 일제히 체포된다. 그때 끌려간 봉강의 일가친척, 처가 식솔은 모두 32명. 보성가족간첩단사건이다. 첫째와 둘째는 일찍이 갔으니, 사실상 폐족이 되었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 사랑채에 걸린 가문의 영광스런 가훈은 멸문의 씨가 되었다.
1965년 월북했던 동생 정해진이 고향집으로 잠행한다. 해진의 월북 길에 동행했던 셋째가 돌아올 땐 손에 김일성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이승만·박정희 체제 아래서 혁신의 꿈이 좌초하자, 봉강은 마지막으로 북쪽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다. 해진은 1967년 재차 고향을 찾았고, 그로부터 2년 뒤 봉강은 심장병으로 급서한다. 조작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북의 무장간첩단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울진 삼척 지구를 휩쓸던 때였다. 가문은 일진광풍 앞의 촛불 신세였으니,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1980년 11월, 춘상, 다섯째 길상씨 등이 일제히 체포된다. 그때 끌려간 봉강의 일가친척, 처가 식솔은 모두 32명. 보성가족간첩단사건이다. 첫째와 둘째는 일찍이 갔으니, 사실상 폐족이 되었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勿爲歷史罪人) 사랑채에 걸린 가문의 영광스런 가훈은 멸문의 씨가 되었다.
신령한 거북이 바다로 돌아가다 우뚝 선, 영구회해(靈龜回海) 터의 거북정, 그러나 분단 현실 앞에서 봉황은 날개가 꺾이고, 거북은 발이 잘렸다. 아침 햇살에 씻긴 설동백의 붉은 향기가 비수처럼 섬뜩하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3787.html#csidx86b814920bbf3a7a99a494b0e9e4dd0
Subscribe to:
Post Comments (Atom)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