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가문은 어떻게 간첩단이 되었나 - 시사IN
의병 가문은 어떻게 간첩단이 되었나
정희상 기자
호수 260
승인 2012.09.12
보성 일대 영성 정씨 가족사를 다루는 이색 심포지엄이 열렸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일제 때 독립운동을 펼친 이 가문은 광복 이후 8명이 처형당하고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냉전시대의 수난사다.
8월23일 전남 보성군에서는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정근식 교수)와 보성문화원(원장 정형철)이 공동 주최한 이색 심포지엄이 열렸다. 임진왜란 때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외세에 맞서온 보성 지역 한 가족의 역사를 다루는 자리였다.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일대 정씨 집안 가족사 연구에는 조선대(김경숙 교수)와 전남대(오승용·천득염 교수) 등 지역 대학뿐 아니라 서울대(정근식 교수), 건국대(이재승 교수), 성공회대(권혁태 교수) 등 서울 지역 대학 교수까지 두루 참여했다.
이들이 정씨 일가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의 가족사를 통해 일제 강점기와 분단의 상처를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씨 일가는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항일운동과 통일운동 등에 연루돼 무려 27명(처형 8명, 구속 19명)의 일가친척이 처형되거나 장기수로 복역한 기록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학제 간 연구는 일종의 ‘탈냉전 시대의 가족사 쓰기’라는 성격을 띠었다.
정씨 일가의 ‘복합 이산가족’ 수난사를 다룬 행사장에서 축사를 하는 이부영 민주당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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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경숙 교수(조선대·역사학)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오른팔 격(종사관)이었던 경북 선산 부사 정경달 형제의 활동 및 그 후손들의 행적을 연구했다. 봉건시대 정씨 일가의 충절(忠節) 전통이 근세에 들어 어떻게 반외세 운동으로 이어졌는지 분석한 것이다.
장흥과 보성 일대의 영성 정씨 문중은 1500년을 전후해 영광에서 장흥 장동으로 이주한 집안이 뿌리다. 장흥에서 출생한 정경달(호 ‘반곡’)은 문과에 급제해 1591년 경북 선산 부사로 부임한 뒤 임진왜란을 맞았다. 그는 선산이 왜군에 함락되자 인근 금오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펴 일본군 415명을 참수했을 정도로 큰 전과를 올렸다.
정경달의 활약이 인근 고을에 알려지면서 수많은 의병장들이 합세했고, 충무공 이순신은 그를 종사관으로 불러들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정경달을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했다. 19세기 다산 정약용은 적을 방어한 수령의 모범 사례로 정경달을 높이 평가해 〈목민심서〉 ‘어구(禦寇)’ 항목에 수록했고, 강진 유배시절에는 정경달의 난중일기들을 모아 〈반곡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봉강 정해룡 선생.광복 이후 여운형계에서 사회운동
정경달 후손들은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로로 공신에 책봉돼 막대한 전답을 사패받아 사회경제적 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 조선 말 전남 지역 세도가인 해남 윤씨 일가에 버금가는 사대부가로 성장한 정씨 일가는 당시 봉강리에 대저택을 짓기도 했다. 400년 역사를 자랑하며 지금도 건재한 정씨고택(1900년대 초 개축)은 2005년 전라남도가 문화재로 지정해 현재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정경달의 후손은 일제가 국권을 찬탈하자 가문 대대로 이어져온 충의(忠義)의 전통에 따라 분연히 반일 전선에 가담하게 된다. 정경달의 후손 정해두는 1921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돼 투옥됐고, 종손인 봉강 정해룡은 전답 수백 두락을 팔아 일제 몰래 만주 광복군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 또 그는 일제치하에서 인촌 김성수가 추진하던 고려대학교 전신 보성전문학교 건립기금과 거액의 도서관 신축 자금을 기부하기도 했는데, 이 내용은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보도된 바 있다.
오승용 교수(전남대·정치학)는 일제 치하 봉강 정해룡의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이처럼 민족교육에 기여한 측면에 주목했다. 봉강은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되자 초기에 주력했던 보성전문학교 건립기금 지원 활동을 넘어서 스스로 향리에 민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데로 나아갔다. 개량 서당이라 할 ‘양정원’ 설립이 그것이다. 오 교수는 “1940년대 초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시대상황과 민족말살 교육정책 아래서 민족교육기관 설립이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비공식적 편법으로 개량 서당 성격의 조선인 사립학교를 세워 총독부 감시망 속에 운영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지방의 작은 개량 서당 ‘양정원’의 설립은 당시로서는 서울에서도 뉴스거리였다.
이 같은 정해룡의 활동은 광복 후 크게 평가받을 만했다. 하지만 정씨 집안에는 이후 침묵을 강요받게 되는 비운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양정원을 함께 설립·운영한 그의 동지 윤윤기는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 희생됐다. 광복 이후 몽양 여운형계에 속해 분단에 맞서는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던 정해룡 일가는 한국전쟁 시기 무려 8명이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정근식 교수(서울대·사회학)는 일제 식민지배 말기, 보성에서 민족교육과 해방 후 정치활동을 함께했던 정해룡과 그 가족 및 자녀들의 부친에 대한 기억을 모아 가족사 쓰기를 통한 사회사적 분석을 시도했다. 분단이 낳은 가족 해체와 냉전시대 수난사를 들여다본 것이다. 정해룡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보성 회천에서 민족교육 활동과 혁신계 정치활동을 했고, 그의 친동생인 정해진은 1940년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제국대학에 유학한 뒤 사회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시사IN 정희상전라남도 지정문화재(제261호) 정씨고택을 지키는 후손 정길상씨(위).
이렇게 이들이 이산가족이 되면서부터 현대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월북한 정해진이 1960년대 두 차례에 걸쳐 몰래 고향에 내려와 형 정해룡 등 친지를 만나고 돌아간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들 가족은 1980년대 들어 숱한 고초를 겪는다. 정해룡은 1969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정춘상은 ‘가족 간첩단 사건’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전두환 정권에서 사형을 당했다.
또 다른 아들 정길상과 친척 정종희 등 수많은 정씨 일가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7년에서 15년에 이르는 장기 감옥생활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씨 일가는 급속히 몰락했고 생존자들은 깊은 트라우마에 빠졌다. 정근식 교수는 “정씨 일가 이산가족은 단순한 이산이 아니라 ‘복합 이산가족’이라 불러야 한다.
이들 가족에 대한 연구는 가족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국가와 가족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학자들은 남북관계가 진전돼 북한 측 자료까지 확보돼야만 정씨 일가 비운의 가족사에 대한 연구가 비로소 완성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들이 정씨 일가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의 가족사를 통해 일제 강점기와 분단의 상처를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씨 일가는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항일운동과 통일운동 등에 연루돼 무려 27명(처형 8명, 구속 19명)의 일가친척이 처형되거나 장기수로 복역한 기록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학제 간 연구는 일종의 ‘탈냉전 시대의 가족사 쓰기’라는 성격을 띠었다.
정씨 일가의 ‘복합 이산가족’ 수난사를 다룬 행사장에서 축사를 하는 이부영 민주당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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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경숙 교수(조선대·역사학)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오른팔 격(종사관)이었던 경북 선산 부사 정경달 형제의 활동 및 그 후손들의 행적을 연구했다. 봉건시대 정씨 일가의 충절(忠節) 전통이 근세에 들어 어떻게 반외세 운동으로 이어졌는지 분석한 것이다.
장흥과 보성 일대의 영성 정씨 문중은 1500년을 전후해 영광에서 장흥 장동으로 이주한 집안이 뿌리다. 장흥에서 출생한 정경달(호 ‘반곡’)은 문과에 급제해 1591년 경북 선산 부사로 부임한 뒤 임진왜란을 맞았다. 그는 선산이 왜군에 함락되자 인근 금오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펴 일본군 415명을 참수했을 정도로 큰 전과를 올렸다.
정경달의 활약이 인근 고을에 알려지면서 수많은 의병장들이 합세했고, 충무공 이순신은 그를 종사관으로 불러들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정경달을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했다. 19세기 다산 정약용은 적을 방어한 수령의 모범 사례로 정경달을 높이 평가해 〈목민심서〉 ‘어구(禦寇)’ 항목에 수록했고, 강진 유배시절에는 정경달의 난중일기들을 모아 〈반곡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봉강 정해룡 선생.광복 이후 여운형계에서 사회운동
정경달 후손들은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로로 공신에 책봉돼 막대한 전답을 사패받아 사회경제적 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 조선 말 전남 지역 세도가인 해남 윤씨 일가에 버금가는 사대부가로 성장한 정씨 일가는 당시 봉강리에 대저택을 짓기도 했다. 400년 역사를 자랑하며 지금도 건재한 정씨고택(1900년대 초 개축)은 2005년 전라남도가 문화재로 지정해 현재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정경달의 후손은 일제가 국권을 찬탈하자 가문 대대로 이어져온 충의(忠義)의 전통에 따라 분연히 반일 전선에 가담하게 된다. 정경달의 후손 정해두는 1921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돼 투옥됐고, 종손인 봉강 정해룡은 전답 수백 두락을 팔아 일제 몰래 만주 광복군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 또 그는 일제치하에서 인촌 김성수가 추진하던 고려대학교 전신 보성전문학교 건립기금과 거액의 도서관 신축 자금을 기부하기도 했는데, 이 내용은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보도된 바 있다.
오승용 교수(전남대·정치학)는 일제 치하 봉강 정해룡의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이처럼 민족교육에 기여한 측면에 주목했다. 봉강은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되자 초기에 주력했던 보성전문학교 건립기금 지원 활동을 넘어서 스스로 향리에 민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데로 나아갔다. 개량 서당이라 할 ‘양정원’ 설립이 그것이다. 오 교수는 “1940년대 초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시대상황과 민족말살 교육정책 아래서 민족교육기관 설립이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비공식적 편법으로 개량 서당 성격의 조선인 사립학교를 세워 총독부 감시망 속에 운영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지방의 작은 개량 서당 ‘양정원’의 설립은 당시로서는 서울에서도 뉴스거리였다.
이 같은 정해룡의 활동은 광복 후 크게 평가받을 만했다. 하지만 정씨 집안에는 이후 침묵을 강요받게 되는 비운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양정원을 함께 설립·운영한 그의 동지 윤윤기는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 희생됐다. 광복 이후 몽양 여운형계에 속해 분단에 맞서는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던 정해룡 일가는 한국전쟁 시기 무려 8명이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정근식 교수(서울대·사회학)는 일제 식민지배 말기, 보성에서 민족교육과 해방 후 정치활동을 함께했던 정해룡과 그 가족 및 자녀들의 부친에 대한 기억을 모아 가족사 쓰기를 통한 사회사적 분석을 시도했다. 분단이 낳은 가족 해체와 냉전시대 수난사를 들여다본 것이다. 정해룡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보성 회천에서 민족교육 활동과 혁신계 정치활동을 했고, 그의 친동생인 정해진은 1940년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제국대학에 유학한 뒤 사회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시사IN 정희상전라남도 지정문화재(제261호) 정씨고택을 지키는 후손 정길상씨(위).
이렇게 이들이 이산가족이 되면서부터 현대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월북한 정해진이 1960년대 두 차례에 걸쳐 몰래 고향에 내려와 형 정해룡 등 친지를 만나고 돌아간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들 가족은 1980년대 들어 숱한 고초를 겪는다. 정해룡은 1969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정춘상은 ‘가족 간첩단 사건’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전두환 정권에서 사형을 당했다.
또 다른 아들 정길상과 친척 정종희 등 수많은 정씨 일가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7년에서 15년에 이르는 장기 감옥생활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씨 일가는 급속히 몰락했고 생존자들은 깊은 트라우마에 빠졌다. 정근식 교수는 “정씨 일가 이산가족은 단순한 이산이 아니라 ‘복합 이산가족’이라 불러야 한다.
이들 가족에 대한 연구는 가족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국가와 가족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학자들은 남북관계가 진전돼 북한 측 자료까지 확보돼야만 정씨 일가 비운의 가족사에 대한 연구가 비로소 완성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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