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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bo Clement Shim
12 May at 01:18 ·
“8일본의 더러운 보상금을, 왜 받는가" 한국인들, 위안부 할머니 비난
2014.10.26
야스쿠니에서 다시 만나지 못하다
짙은 감색의 한국 전통의상(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1994년 10월, 도쿄의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했다. 이 여성의 이름은 '朴福順'(박복순)이다. 전쟁 중에 위안소에서는, '가네다 기미코'(金田きみ子)로 불렸다.
“부대원들이 '야스쿠니(靖国) 신사의 벚꽃 아래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죽어갔기 때문에, 야스쿠니를 찾아와 본 것인데 아무 것(무덤 같은 것)도 없다”며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朴씨는,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고노(河野) 관방장관 담화 작성과 관련하여 일본정부로부터 청취조사를 받은 16명의 전 위안부 중 한 명이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박씨는, 일본인 군속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중국 쪽으로 일하러 가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중국 나쓰메쿄(棗強)지역 등의 위안소에서 약 7년간을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정부의 청취조사 당시,
“저항하면 칼로 가슴에 상처를 냈다”고 증언했다.
박씨는 1992년에, 그 한 해 전인 1991년 12월에 김학순씨를 포함한 전 위안부들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낸 배상청구 소송의 원고측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법정에서 체험을 증언했다. 일본정부의 책임을 추궁해 오던 박씨는 전 위안부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던 일본인 '우스키 게이코'(臼杵敬子,66세)씨에게,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일본병사를 간호해줬던 이야기 등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위안부로 끌려오게 되어 죽는 것보다 괴로운 처지가 됐지만, 일본병사들이 비참하게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저들도 나와 비슷한 신세구나하고 눈물을 쏟았지요”
우스키(臼杵)씨는, 박씨가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으로 희생된 병사들의 실제 무덤이 야스쿠니에 있을 것으로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지난 날 애증의 감정들을 다 뒤로 하고 무덤 앞에서 뭔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박씨는 “신사에 있는 비둘기가 죽어간 병사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는 말을 나에게 했다.
사진1)
靖国神社でハトにえさをあげる元慰安婦の朴福順さん=平成6年10月、東京・九段北
야스쿠니(靖国)신사에서 비둘기에게 모이를 던져주는 前위안부
박복순(朴福順)씨 = 1994년 10월, 도쿄(東京)
박씨는 1997년, 전 위안부에 대한 보상사업을 위해 창설된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일시금(보상금) 200만엔에 국비에 의한 의료.복지 지원비 300만엔을 합한 500만엔과,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수상의 사죄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도쿄 지방법원에서 있은 구두변론에서, 사죄 편지를 받은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편지를 읽었는데, (편지에는) 과거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되셨다, 그리고 이에 대해 사죄를 드리며 위로를 드리고 싶다고 되어 있었다. 이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박씨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한국에서는 비난이 시작됐다. 그 중심이 된 것은 반일 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挺対協)다. 정대협은 그 전년도 가을에 '아시아여성기금'을 <일본정부의 배상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속임수>라며, 전위안부들을 한 군데에 모아놓고 기금을 수취하지 말도록 압박했다.
이 자리에서 朴씨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입장인데 지금 받고싶다. 받느냐 안받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라고 반론했다.
이에, 정대협의 공동대표, 윤정옥씨는,
“보상금을 받으면, 스스로 원해서 위안부가 된 공창(公娼)이 된다”
며 박씨와 박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한국의 언론들도 아시아 여성기금에 대해 반발했다.
일본측은 이러한 상황(한국내 분위기)을 배려하여, 일시금을 받은 7명의 명단을 공표하지 않았는데, 한국쪽에서는 이들(7명)의 실명을 공표했고, 이어서 이들에 대한 비난이 시작된 것이다. 집까지 찾아가 <왜 더러운 돈을 받았냐>며 몰아붙이는 시민단체 회원이나 기자도 있었다고 한다. 우스키 씨는 바로 옆에서 이러한 모습들을 지켜봤다.
우스키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박씨 집으로 '일본으로부터 더러운 돈을 받은 더러운 여자'라는 전화가 걸려올 정도였다. 완고한 젊은 남자들이 찾아와 거의 협박조로 따지는 일도 있었다”
우스키씨는 이러한 박씨의 신변을 고려하여 박씨를 잠시나마 일본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 일도 있었다. 그러자, 정대협은 이러한 우스키 씨에 대해 방해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우스키씨에 대한 한국 입국금지 조치를 내리도록 한국 법무부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우스키(臼杵)씨는, 1997년부터 2년 남짓에 걸쳐 방한이 금지됐다.
박씨는 2005년, '공창(公娼), 매춘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떠났다. 83세였다.
박씨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친척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우스키 씨가 자금을 마련하여, 한국 천안(天安)의 공원묘지인 '망향의 언덕'에 박씨를 묻었다.
「위안부, 아무래도 상관없다. 반일이 목적」
2002년 12월, 전 위안부에게 일시보상금을 주는 아시아 여성 기금의 운영 심의회 위원이었던 법학자 요코타 히로시가 참고인으로 출석한 참의원 내각 위원회에서, 지금까지 기금을 받은 인원수가 각국 모두를 합쳐「전체의 40% 정도인 364명이다」라고 설명했을 때였다. 아시아 여성 기금 반대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찬 방청석으로부터 “어?” 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아시아 여성 기금의 전 관계자(74)는 이렇게 회상했다.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 기금을 대부분의 위안부가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본의 시민 단체나 비정부 조직(NGO)등 대부분의 반대운동 단체는, 국가차원의 배상을 요구해, 아시아 여성 기금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기금 시작 때부터 관계해, 기금의 전무이사도 역임한 도쿄대학 명예 교수인 와다 하루키는,
“한국의 전 위안부의 경우, 기금을 받은 사람은 최초의 7명 뿐이라고 오랫동안 여겨져 왔다. 국가 별 인원수의 공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유엔 인권위원회의 특별 보고자, 라디카・쿠마라스와미는 1998년에 공표한 보고서에서, 일본의 역대 수상에 의한 사죄나 기금을 통한 대처를 「환영해야 할 노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 위안부에 대한 국가 보상을 요구해, 일본을 비판한 쿠마라스와미 조차, 일본의 조치를 인정하고 있어, 한국이 “일본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 라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기금에 대한 거부 반응
한국에서의 아시아 여성 기금의 활동은 2002년 9월에 종료했는데, 61명에 대해 기금이 지급되었다. 와다는 그 수를 60명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전 위안부중의 1명이「받지 않았다」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나 지원 단체가 이 기금에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일시금을 누가 받았는지 한국내에서 알려지지 않도록, 전 위안부의 친척 등의 다른 명의의 계좌로 불입하는 등, 우회적인 송금도 행해졌다고 한다.
송금 과정에서 트러블이 일어나「계좌를 빌려 준 사람이 가지고 달아나거나 했지만, 그 기금을 받으려고 한 전 위안부가 누구인지가 공개되어 버리므로 사건화는 되지 않았던」(기금의 전 관계자)일도 있다. 이 기금사업이, 한국에서 얼마나 어려운 상황 하에 놓여져 있었는 지를 상징하는 에피소드다.
2002년 당시 , 한국 정부가 인정한 전 위안부는 207명이므로, 한국에서 일시금을 받은 사람의 비율은 3할 미만이지만, 전 기금 관계자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국 정부도, NGO도 하나가 되어, 기금 반대 캠페인을 했지만, 60명이나 받아 주었다”
기금은 종료했지만, 전 위안부에 대한 보상사업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금도 전 위안부에게 「아시아 여성 기금 폴로우 업」이라는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연간 1500만엔이 넘는 예산을 사용해, 한국이나 대만, 필리핀 등에 사는 전 위안부들에게 1인당 약 2만엔 정도의 의약품등을 일본으로부터 스탭이 방문해, 직접 보내고 있다.
외무성 담당자는 「전 위안부를 직접 만나, 가까워 지는 것이 목적이며, 근황이나 심신 상태를 듣거나 전 위안부들의 개별적인 고민이나 희망을 묻거나 하고 있다. 사망한 전 위안부를 위한 성묘도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전 위안부를 지원해 온 우스키 케이코도 이 폴로우 업 사업에 협력해, 연 4, 5회 한국으로 건너 와, 전 위안부들을 방문하고 있다. 지원을 받고 있는 전 위안부들은 「다음에는 언제 오나?」라며 우스기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등록되어 있는 전 위안부 가운데, 생존자는 이제 54명이 되었다.
한국의 차별
한국 대통령, 박근혜는 24일, 일한 의원 연맹의 멤버와 만났을 때, 한국 미디어가 취재한 기사의 모두에서 「피해자나 국민의 마음을 손상시키는(역사에) 역행하는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피해자의 가슴에 상처를 입혀 온 것은 반일 단체「한국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정대협) 등의 한국 측이다.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항해, 한국에서 1996년에 결성된 「시민 연대」가 전 위안부를 지원하기 위해 거둔 모금도, 일시금을 받은 전 위안부인 박복순 등 7명에게는 분배되지 않았다.
박복순은 “똑같은 괴로움을 받았는데 왜 차별받는 것인가”
라고 분노했다.
어느 일본인 져널리스트는 일찌기 정대협 간부와 인터뷰 했을 때, 종료 후에 그 간부가 했던 말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위안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반일이 목적이다”
http://www.sankei.com/world/news/141026/wor1410260013-n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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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의 반일 정책은 국제정세, 특히 동북아 정세의 급변화에 대처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한일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표면적인 움직임의 물밑에는, 한미관계의 원격화와 한중관계의 근접화라는 정세의 급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정세의 변화와 그에 따른 각국의 적응이 진정화되면, 이 반일정책은 반드시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중일관계도 마찬가지다.
최근, 현 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방침이 서서히 바뀌고 있는데, 이 역시 정세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위안부의 강제연행의 근거였던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날조(미국이 날조하고 해제한 것으로 보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현 정부가 주장하던 위안부 문제의 핵심인 '강제연행" 을 근거로 한 반일정책이, 이제는 보편적인 '인권문제' 즉, 전장에서의 여성인권 문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은, 현재 갑자기 부각되고 있는 북인권 문제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역사문제를 기본으로 국제외교를 하는 나라는 전세계에 거의 없다. 아주 대국이거나 멋도 모르거나 둘 중의 하나만 가능한데, 한국은 이도 저도 아니면서, 그게 미,중,일에게 먹히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해괴하다.
SANKEI.COM
【歴史戦 第7部 崩れ始めた壁(1)後半】「慰安婦どうでもいい。反日が目的」
平成14年12月、元慰安婦に一時金(償い金)を渡すアジア女性基金の運営審議会委員だった法学者の横田洋三が参考人として出席した参院内閣委員会で、これまで基金を受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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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6 11:24
【歴史戦 第7部 崩れ始めた壁(1)後半】
「慰安婦どうでもいい。反日が目的」
(1/3ページ)【歴史戦】
平成14年12月、元慰安婦に一時金(償い金)を渡すアジア女性基金の運営審議会委員だった法学者の横田洋三が参考人として出席した参院内閣委員会で、これまで基金を受け取った人数が各国で合わせて「全体の40%ぐらいで364人だ」と説明したときだった。反基金運動をしている人たちが詰めかけていた傍聴人席から「えっ?」という声が漏れた。その場にいた基金の元関係者(74)は振り返る。
「反対運動の人たちは『基金をほとんどの慰安婦が受け取っていない』と思っていたのではないか」
日本の市民団体や非政府組織(NGO)などの多くは、国家賠償を求め、反基金の立場だった。
基金立ち上げのときから関わり、基金の専務理事も務めた東大名誉教授の和田春樹は「韓国の元慰安婦の場合、基金を受け取ったのは最初の7人だけだと長い間、思われてきた。国別の人数の公表を控えてきたからだ」と話す。
国連人権委員会の特別報告者、ラディカ・クマラスワミは10年に公表した報告書の中で、日本の歴代首相による謝罪や基金の取り組みを「歓迎すべき努力」としている。元慰安婦への国家補償を求め日本を批判したクマラスワミでさえ、日本の取り組みを認めており、韓国が「日本は何もしていない」というのは明らかに間違っている。
大反響の『歴史戦 朝日新聞が世界にまいた「慰安婦」の嘘を討つ』 電子版も発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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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金に拒否反応
韓国での基金の活動は14年9月に終了したが、61人分が支給された。和田はその数を60人としているが、それは元慰安婦の1人が「受け取っていない」と主張しているためだ。
韓国政府や支援団体が基金に拒否反応を見せていたため、一時金を誰が受け取ったか韓国内で知られないように、元慰安婦の親戚などの別名義の口座に振り込むなど、迂(う)回(かい)的な送金も行われていたという。
送金の過程でトラブルが起き、「口座を貸した人が持ち逃げしたようだが、その基金を受け取ろうとした元慰安婦が誰であるかがばれてしまうので事件化はしなかった」(基金の元関係者)こともある。基金の事業が、韓国でいかに厳しい状況下に置かれていたかを象徴するエピソードだ。
14年当時、韓国政府が認定した元慰安婦は207人なので、韓国で一時金を受けとった人の割合は3割足らずとなるが、元基金関係者は肯定的に評価する。
「韓国政府もNGOも一丸となり、基金反対キャンペーンをやっていた。よく60人も受け取ってくれた」
基金は終了したが、元慰安婦への償い事業は続いている。日本政府はいまも元慰安婦に「アジア女性基金フォローアップ」事業を実施している。年間1500万円超の予算を使い、韓国や台湾、フィリピンなどに住む元慰安婦たちに1人当たり約2万円程度の医薬品などを日本からスタッフが出向き、直接届け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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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6 11:24
【歴史戦 第7部 崩れ始めた壁(1)後半】
「慰安婦どうでもいい。反日が目的」
(3/3ページ)【歴史戦】
外務省の担当者は「元慰安婦に直接会い、寄り添うことが目的。近況や心身の状態を聞いたり、元慰安婦の個別の悩みや要望を聞いたりしている。亡くなった元慰安婦の墓参りもしている」と説明した。
元慰安婦を支援してきた臼杵敬子もこのフォローアップ事業に協力し、年4、5回韓国に渡り、元慰安婦たちを訪問している。支援を受けている元慰安婦らは「今度いつ来るのか」と臼杵の訪問を心待ちにしているという。韓国で登録されている元慰安婦のうち、生存者は54人となった。
韓国、配分で差別
韓国大統領、朴槿恵は24日、日韓議員連盟のメンバーと面会した際、韓国メディアが取材した冒頭で「被害者や国民の心を傷つける(歴史に)逆行する行動」を繰り返さないよう要求した。だが、被害者を傷つけてきたのは反日団体「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挺対協)など韓国側だ。アジア女性基金に対抗し、韓国で8年に結成された「市民連帯」が元慰安婦を支援するために集めた募金も、一時金を受け取った元慰安婦の朴(パク)福(ポク)順(スン)ら7人には配分されなかった。朴福順は「同じ苦しみを受けたのになぜ差別されるのか」と怒りをあらわにした。
ある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はかつて挺対協幹部にインタビューした際、終了後にこの幹部が言い放った言葉を鮮明に覚えている。
「慰安婦なんてどうでもいいんだ。反日が目的なんだ」(敬称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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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うなる日韓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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