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긴소식 : 사회 : 뉴스 : 한겨레모바일
20200527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세월 자신이 감내했던 고통을 드러내며 시민
사회와 정부에 던진 메시지는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 할머니의 호소를 계기
로 <한겨레>는 우리가 무엇을 성찰해야 하고, 남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피해자의
고통과 상처가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는지 모색하는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 조사 연구를 진행한 바 있고, 현재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회장
을 맡고 있는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첫번째 글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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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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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7일에 이어 5월25일 ‘위안부’ 피해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이용수님의 인터뷰
가 있었다. 첫 인터뷰에서 ‘이제 수요시위는 필요 없어. 윤미향은 국회에 가면 안
돼’와 같이 거친 말들이 튀어나왔다. 25일 인터뷰에서는 ‘30년의 정대협 운동이 피
해자들을 이용했다. 우리 증언을 들은 적도 없다’ 등 여러 말씀을 하셨다. 위안부 증
언과 피해자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로서 이런 말들을 접하고 보니, 할 말을 잃었다.
잘못 해석을 했다가는 할머니 증언을 무시했거나 곡해했다 할 것이고, 그 말씀을 그
대로 받아들이자니 이 증언만 가지고는 그 의미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어느
티브이 보도의 멘트처럼, ‘우리 국민이 ‘위안부’ 문제와 피해자 증언에 이렇게 관심
을 가지고 청취한 적이 있었나’ 싶다. 김학순님의 등장 이후 한국에서는 피해자 증언
수없이 이루어졌음에도 왜 하필 이 ‘증언’을 많은 시민들이 함께 듣게 되었는지 지금
의 상황이 가슴 아프고 먹먹하다.
이용수님의 인터뷰를 크게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 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
회, 이하 정대협)의 회계 불투명 의혹과 정의연의 운동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나
눌 수 있다면, 전자는 현재 진행 중인 정의연에 대한 조사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믿
는다. 필자에게 주목되는 부분은 정의연이 ‘할머니들을 팔았다’ ‘할머니들을 이용했
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할머니들과만 활동했다’는 이용수님의 운동방식에 대한
발언 부분이다. 필자는 정의연과 함께 피해생존자를 돕는 등의 활동을 하지는 않았
지만, 정대협 산하에서 피해생존자의 증언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용
수님의 이런 지적이 올바른 것인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준비의
일환으로 피해자들을 만나 증언조사연구를 하였다. 이 증언연구를 수행했던 ‘증언
팀’은 묻기에서 듣기로, 증언자가 기억하는 방식과 비중에 따른 증언 재현, 즉 피해
자의 ‘기억의 지도’를 재현하기, 한숨과 웃음과 같은 표정과 표현들, 투사와 도치와
같은 구어적 텍스트 작성법 등 방법론적 원리들을 세워나갔다.
우리는 수차례 피해자를 만나면서 깊은 각인의 흔들리지 않는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고민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연구자들이 알고 있는 ‘위안부’상(像)에 걸맞은
증언만을 ‘위안부’ 증언이라고 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의 피해자’ 혹은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그녀들과
실제 우리가 만났던 그녀들이 풀어놓은 이야기의 구조와 초점은 많이 달랐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 가난과 배고픔, 귀국 후 한국전쟁과 삶을 헤쳐나갔던 이야기 등을 풀어갔고 ‘위안소’에서의 체험은 이 이야기들과 실타래처럼 엉켜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우리는 연구자의 질문이 중심이 아니라 증언자의 기억을 중심으로 하되 당시의 사회적 맥락과 구조를 놓치지 않는 질문과 청취를 통해 ‘증언자 중심주의’ 증언방법론을 만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그녀들은 더 이상 무력하고 슬프기만 한 피해자가 아니라 그 많은 곤경과 고통
을 뚫고 살아낸 ‘생존자’가 되었다. 증언팀은 할머니들을 그저 편한 ‘할머니’로 부르
지 않았다. 그녀는 피해자, 생존자, 혹은 이름을 가진 어떤 개인, 거기다 할머니로도
가끔 불리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주체성의 존재로 재현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피해자들은 다 똑같은 피해자일 수 없고, 개성을 가진 영혼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들간에도 차이들이 많았다. 개개인의 차이와 미시적 개인사에 주목한다고 해서 ‘위안
부’의 피해가 무엇인지라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개개인의 피해
속에서 가부장제 식민주의의 큰 구조적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식과 질병, 고독과 소망의 디테일에 식민주의와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는 체액처
럼 스며들어 있었고, 분진(粉塵)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증언팀은 이 증언 방법
론을 피해자 중심주의라고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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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이후, 위안부 할머니들은 국내외를 오가며 전시 성폭력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끌어올리는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왼쪽부터 고 김학순, 고 강덕경,고 황금주, 고 안법순, 고 한옥선 할머니. <한겨레> 자료사진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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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받아 적고 따르는
‘피해자의 성역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만이 ‘위안부’ 피
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화자이며, 그녀가 말하는 것이 마치 절대 진리인 것
처럼 성화(聖化)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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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다. 수많은 피해자들 중에서 살아남아 우리 앞에서 증언해주는 소중한 존재, 스
러져간 많은 이들을 대신하여 이야기를 전해주는, 그녀들 역시 수많은 힘들 덕분에
살아온 존재들인 것이지 영웅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녀들을 영웅화한다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로서만 그녀들을 대하는 태도의 이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피해자 중
심주의는 피해자를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화하는 것이다. 주체화한다고 해서
그녀의 취약함이나 불완전함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언어는 소중한 것이
지만, 그 안의 망설임, 언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체험, 침묵, 불명확한 기억, 감정과 욕
망의 지대 등 다양한 굴곡이 존재한다. 이 비언어적 지대, 정동(affect)의 지대를 언
어의 행간에 표현한다는 것은 당연히 많은 고민과 책임을 지는 일이다. 무엇보다, 피
해자 ‘그 인간’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것이 (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자를 재현한다는 것이 가진 복합
성과 책임 그리고 그 불완전성을 나타내지 않나 생각한다. 이용수님은 정의연의 지
원 행위를, ‘팔았다’고 표현하였다. 자신이 원했던 바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도
리어 시민단체를 위해 자신이 활용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쓴 표현일 것 같다. 하지만
너무나 가슴 아프고 아픈 표현이다.
연구자(혹은 활동가)가 피해자와 인간적인 관계를 수십년간 지속하고 그들을 보살
핀다는 것은 엄청난 노동이자 윤리적 숙제이다. 고백하자면, 증언팀의 연구자들은
증언자들과의 관계를 지속한 경우가 별로 없는 것으로 안다. 증언연구가 끝나자 우
리는 각자 살길이 바빠서 할머니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던 것이다. 우리가 증언을
들었던 증언자 한분은 너무 외롭고 살아갈 이유가 없어서 혼자 목숨을 끊으셨다. 이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추구했다는 우리 연구팀의 실상이다. 필자는 정대협의 피
해자 대우가 온전히 공정하고 따뜻하기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
해자 간에는 많은 의견과 개성의 차이들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피해자들을, 그것도 수십년간 꾸준히 보살피고 인권운동가로 함께
해온 정의연과 전국의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들에 대해 우리 사회와 국가는 깊은 경
의를 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용수님은 정대협이 문제 해결을 해주지 않았다고 했지만 문제 해결의 중심 주체
는 시민단체가 아니라 정부이다. 일본 정부와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맺었던 주체
는 한국 정부이고, 개인(피해자)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청구권을 실현할 수 있도
록 징검다리를 놓는 것에도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피해자 개개인이 일
본 정부와 일본 법원에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생경한 외침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가. 시민단체 활동가, 법률가, 연구자들이 부족하나마 이들의 청구를 매개하는 대리
자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단체 활동가들이 봇짐을 싸서 일본과 세계를 누빌 때, 허
름한 숙소에서 새우잠을 잘 때, 대한민국의 외교부, 여성가족부 등 정부 부처와 법·
정책을 입안해야 할 국회는 어디에 있었나. 이용수님이 인터뷰에서 정의연이 아니
라 우리 정부에, 무관심한 국회와 시민에게 ‘증언’을 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
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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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출간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 1집에서부터 증언 6집(2004)까지
정대협은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함께 증언집을
공동 출간하거나 단독으로 출간하였다
요컨대 ‘강제로 끌려간’ 시리즈에 정대협이
출간 주체로 빠졌던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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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증언의 연구는 정대협의 꾸준한 역할이었다. 1993년에 출간된 <강제로 끌려
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 1집에서부터 증언 6집(2004)까지 정대협은 ‘한국정신
대연구소’와 함께 증언집을 공동 출간하거나 단독으로 출간하였다. 요컨대 ‘강제로
끌려간’ 시리즈에 정대협이 출간 주체로 빠졌던 적이 없었다. 이용수님의 증언은
1993년 증언 1집에 실려 있다. 필자는 무조건 정의연을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이것
은 움직이지 않는 진실이다. 이 기회에 생존자 100여명의 증언을 담은 한국의 증언
집들을 초중고,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하고 시민들도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권한다.
그 속에서 할머니들의 절규와 울림을 들을 수 있고, 뜻하지 않은 웃음과 해탈도 맛
볼 수도 있으리. 필자는 이용수님의 인터뷰를 들으며 많은 ‘할머니들’을 떠올리지 않
을 수 없었다. 김학순, 강덕경, 황금주, 문옥주, 석복순, 김복동, 최갑순, 한옥선, 안법
순, 강일출, 길원옥과 같은 별 같은 이름들. 그 많던 할머니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
그동안 한국 정부에 신고한 한국의 피해자는 2019년 현재 240명이지만, 오늘의 생
존자는 17명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살아서 모국에 귀환하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8
만에서 20만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 피해자들의 대다수를 이룬다는 점이다. 이들은
타국에서 디아스포라가 되거나 혹은 유명을 달리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이 많은 피
해자들의 부모와 형제, 자식, 이웃과 친구들도 피해의 간접체험, 그 전이와 대물림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는 조선을 넘어 아시아와 태평양 군도(群
島)에 살았던 수많은 피해자들을 포함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렇게 동심원적이고 역사적으로 구축된 피해자성에 기초해야
하고, 피해자의 회복이란 지금 살아계신 개인들에게 위로금으로 결코 가능하지 않
은, 진실규명과 법적 해결의 방향성 위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2005년 유엔에서는
‘피해자의 회복을 위한 권리의 기본원칙’을 채택한 바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피해
자의 회복을 위해서 사법절차에서의 접근, 적절하고 효과적이고 신속한 회복조치,
정보의 접근, 원상회복, 배상, 재활조치, 만족, 재발방지 보증 등을 규정하고 있고, 여
러 하위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15년 한-일 외교장관 ‘위안부’ 합
의”에서 이런 국제기준과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것으로
합의하고야 말았다. 그런데도 이용수님의 인터뷰 이후 언론 보도를 보면 정부 관계
자들은 정의연에 합의 내용을 피해자에게 전달하지 않은 책임을 전가하는 모양새
다.
어쩌면 우리 정부, 국회, 시민단체, 그리고 우리 같은 연구자와 시민들 모두가 식민주의 유산을
법적으로 정신적으로 청산하지 못한 ‘포스트식민’ 사회 속의 ‘거류자들’인가 보다. 시
민단체를 탓하기 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각자의 자리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겸
허하고 진지하게 노력해야 하지 않나. 그것이 이 이름 없는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응
답하는 일이 아닐까.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들이 편하게 누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 자신의 이 뜻 모를 슬픔과 서러움을 위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시민단체에 원망과 질책을 돌리는 이용수님의 손가
락 뒤에 가린 더 큰 정의와 진실의 달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하자. 그것이 이용수님
과 정의연, ‘그 많던 할머니들’과 이 포스트식민 사회를 모두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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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쌘돌이3시간 전 · 수정됨 · 공유됨(1)
피해자 중심주의, 필요하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의 응석(?)까지 받아줘야 한다는 말은 아닐 테다. 이번 사태로 좁혀 말하자면, 일제의 성노예가 된 할머니들의 고통과 한을 토대로 그것에 공감한 활동가들의 헌신이 강제위안부 명회회복 운동의 근간이 된 거 아닌가. 정의연의 오류는 피해 할머니를 대상화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운동논리를 피해자의 한보다 우선했다는 점, 갈수록 자기 관리에 느슨해졌다는 점 등일 거다. 그렇다고 이 운동이 할머니들에게 명분없는 돈이나 대신 받아주는 심부름센터 역할도 아니다. 피해자 할머니 생계대책을 세워주는 불우이웃돕기 운동도 아니다. 이용수 할머니 국회의원 시켜주자는 운동도 아니다. 진정한 사과가 없이 몇푼 던져주는 일본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정의연이 주장한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지도 않으면 젊은 활동가들이 청춘을 바쳐 이 운동에 동참할 이유가 무언가? 시민단체와 학계 사람들은, 정의연의 부식(?)은 비판하더라도, 이 운동의 대의를 변호해야 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응석에 대해선 그건 또 아니라고 선을 그어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내가 보기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엔 응석과 오해가 매우 많다. 정의연의 잘잘못은 따로 따지더라도 남편, 딸, 친정아버지 등등에 까지 쏟아지는 저 연좌제적인, 그리고 온갖 검증 안 된 의혹을 쏟아내는 조중동(그리고 이제는 한겨례와 경향까지) 등 언론의 고질화된 하이에나식 선동부터 우선 막아내라. 일단, 차분해지고 객관적 거리두기부터 해야 적확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국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지 않겠나.
답글공감11반대4
프로필 이미지naver 대표계정 입니다.아자아자한 시간 전
이용해 먹을때는 영웅 반대 의견 제시하니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토사구팽 참대단한 분들임 ㅋㅋ
답글공감5반대0
프로필 이미지naver 대표계정 입니다.무지의베일한 시간 전 · 공유됨(1)
왜 정대협, 정의연의 성역화, 권력화, 사유화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는 것인지...? 이 문제의 발단이된 문제는 논하지 않고 엉뚱하게 피해자중심주의의 성역화는 안된다는 식의 논리라니... 일본 우익이 그렇게 말할때, 한국측 방어논리가 뭐였습니까...? "피해자중심주의" 아니였던가요...? 진영논리에 빠져서 문제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궁색한 궤변이나 늘어놓다니... 앞으로 강제징용 위안부 운동의 위상과 방향이나 고민하는 것이 맞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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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google 대표계정 입니다.Y J Shon2시간 전
매국언론의 왜곡된 기사로 인해 여권 지지자들 마저 잘못된 판단을 내린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윤미향 사퇴가 매국언론과 검찰이 의도했던 바이고,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며, 앞으로도 많은 진보진영 인사들이 이러한 똑같은 방식으로 희생될 것입니다. 그 때 마다 그들은 더 정권을 압박하며 여권을 굴복시킬 것이며 언론개혁은 더 요원해 질 것입니다.
답글공감4반대1
답글2공감3반대4
프로필 이미지twitter 대표계정 입니다.mcibs2시간 전
@삭제된 댓글입니다 미친넘 넌 포주 옆에 기생하는 기둥서방넘이냐
답글공감0반대1
프로필 이미지naver 대표계정 입니다.nams****3시간 전
@삭제된 댓글입니다 ㅋㅋ 너같은 넘들이 득실대던 시대에 위안부를 팔아 일본과 합의했던 503호 저능아가 있었지.....
답글공감0반대0
프로필 이미지kakao 대표계정 입니다.철인혁명3시간 전 · 공유됨(1)
글 기고자는 연구자의 시각에서 할머님들의 증언을 기계적인 소음으로 들은 것이 문제임을 모른단 말인가? 진정으로 할머님들의 참혹한 체험과 피맺힌 절규에 공감했다면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은 쓰지 않을 것이다. 위안부 인권 운동이 왜 외양의 외양이 되어버렸는지 하는 그 이유를 이 기고문을 읽으면서 느낀다. 연구자랍시고 생생한 증언을 기록한 것 같지만 그것은 허울 뿐인 연구를 위한 연구용 제스처임이 이 기고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직도 왜 이용수 할머님이 구구 절절하게 위안부 인권 운동에 분노하는지 연구자들은 모른다. 그것은 연구자들이 그 할머니와 같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저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제3자의 시각의 연구자의 태도에서 피해 당사자인 할머님과의 공감 능력은 떨어져도 한참 떨어져 있다. 기고자는 이런 점을 모른다. 아니 알 턱이 없다. 할머님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위안부 인권 운동 연구자의 덕목은 똑똑한 이성이 아니라 따뜻한 인성이다. 기고자의 저 해맑은 얼굴에 무슨 위안부 할머님들의 주름진 질곡의 피해의 흔적이 쟁여져 있는가? 할머님이 기자 회견에서 왜 그토록 한맺힌 피눈물을 쏟아냈는지 이해가 된다. 공감능력 제로의 연구자들이 할머님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왔다고 단언한다. 그렇게 연구하려면 하지 않는게 더 낫다.
답글2공감3반대2
프로필 이미지naver 대표계정 입니다.nams****3시간 전@철인혁명 그러는 댁은 얼마나 공감능력이 있는지 ? 그 많은 할머니들과 30년을 할 자신은 있는지 ? 가소롭구만답글공감2반대1프로필 이미지kakao 대표계정 입니다.철인혁명3시간 전 · 공유됨(1)@철인혁명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자연과학과 사회학과 심리학과 역사학과 같은 정신과학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 정신과학은 교양과 공통감각을 토대로 한다. 교양과 공통감각은 인성이다. 인성은 공감능력이다. 할머님들의 참담한 고통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감수성이 정신과학이라는 말이다. 자연과학처럼 동형성 보편성 법칙과 방법을 교조로 하는 것이 정신과학인 역사학 연구자가 갖춰야 할 품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글 기고자의 태도는 역사학을 기계적인 동형성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처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글 기고자는 자연과학의 헐벗은 방법론에 경도되어 있다.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전가의 보도인양 정신과학의 역사학에도 휘둘러서는 안된다.
답글공감1반대1
프로필 이미지naver 대표계정 입니다.sskim****2시간 전 · 공유됨(1)
핵심을 찌르는 훌륭한 글입니다.언론보도 하나하나에 일희일비 하기보단 침착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이번사태를 바라봐야 합니다.
답글공감3반대1
프로필 이미지naver 대표계정 입니다.이화니2시간 전
진정 학문을 연구하시는 전문 지식인의 글을 읽고, 알지 못했던 모르고 있었던 많은 숨어있는 진실들을 깨우치게 만드는 글 입니다.
교수님!
감사 합니다.
답글공감2반대1
프로필 이미지naver 대표계정 입니다.황금붕어2시간 전 · 공유됨(1)
자고 나니 성노예 피해자 이용수 할매가 갑자기 여성인권운동가가 되어 있네~~ 여성인권운동가로로부터 30년간 도움을 받으며 그나마 자기 소리를 내던 사람이 갑자기 이용당했고 소리치니 인권운동가라니! 그런데 뭘 이용당했다는 건지(인권단체에서 기부받은 돈은 다 위안부에 줘야된다고 생각하고 있는거 같다)~~ 30년간 도움을 준 사람에 증오와 분노가 가득한 사람, 그 분노는 또 뭐지( 국회의원 뺏지 달고 싶어하는 욕망과 질투심이 저 나이에도 있나 싶다)~~ 아무나 도와주면 안되는 세상인가 보다~~ 도와줘도 나중에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던지~~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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