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 영조 시대의 조선 8
최봉영 (지은이)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2013-12-31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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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쪽148*210mm (A5)179gISBN : 9788971059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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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영조의 개인사는 물론 정치, 문화, 사회를 아우름으로써 영조라는 존재와 역할이 역사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수 있는 '영조 시대의 조선' 시리즈의 8권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가진 세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도세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조선 왕조 후기에 펼쳐졌던 유교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목차
1부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
영조의 어린 시절과 성격
사적인 은혜와 공적인 의리
탕평이 내세우는 의리
2부 영조와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성장 환경
영조의 질책과 사도세자의 일탈
3부 사도세자의 정신질환
영조와의 갈등, 악화되는 정신질환
궁중에서 사도세자의 위치
정치에 무관심한 사도세자
사도세자와 당파
4부 비극적인 사건, 임오화변
나경언의 고변 사건
영조의 대처분
부홍파와 공홍파
정조와 임오화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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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최봉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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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항공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서울교육대학교와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 현재 바탕공부 연구모임 회장을 맡고 있다.
최근작 :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 … 총 1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가진 세자에 관한 이야기다. 세자는 국왕을 이어서 앞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를 사람을 일컫는데, ‘사도’라는 시호가 붙은 것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이후에 시호를 갖게 되었음을 말한다. 사도세자가 어떤 사람으로 살다가 죽었는지는 사도라는 시호가 잘 드러내고 있다. 사도는 아버지인 영조가 세자를 서인으로 신분을 낮추고 뒤주에 가두어 굶겨서 죽게 한 뒤, 죽은 아들에게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고 붙인 시호이다. 사도는 ‘생각이 슬프다.’, ‘생각하니 슬프다.’, ‘슬픔을 생각하다.’ 등의 뜻으로, 흔히 볼수 있는 시호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라는 시호는 영조와 세자 사이에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압축하고 있는 말이다. 이 책은 사도세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조선 왕조 후기에 펼쳐졌던 유교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국가와 권력, 왕실과 벌열, 정파와 당쟁, 부모와 자식 따위가 어떻게 얽혀서 돌아가고 있는지 좀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영조 시대의 조선” 시리즈 소개
영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오랜 52년간 재위하면서 르네상스에 비견될 만큼 조선의 중흥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영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조를 대왕이라 높여 부르기도 한다. 영조는 정치적으로 철혈의 군주였지만, 학술과 문화를 좋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었다. 재위 기간 부지런히 정사에 힘쓰며 나라를 걱정하기 바빴고 반란과 정통성 시비를 겪으면서도 군주로서의 중심을 잃지 않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면서 화합의 리더십을 몸소 보여주었다. 특히 영조 스스로 자신을 대표하는 업적으로 거론한 탕평, 균역, 준천 등의 육대 사업은 나라 안의 묵은 폐단을 씻어내고 민생의 질을 높이기 위한 애민의 마음이 담겨 있다. 또한 많은 서적을 편찬·보급하여 지식정보 사회를 열고자 하였다. 영조가 만들어낸 18세기의 조선은 개혁과 화합, 민본과 애민의 시대였고, 뒷날 정조 시대를 꽃피우는 값진 유산이 되었다. “영조 시대의 조선”은 영조와 관련한 19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영조의 개인사는 물론 정치, 문화, 사회를 아우름으로써 영조라는 존재와 역할이 역사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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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 아버지와 아들의 슬픈 인연! 새창으로 보기
왕은 만 백성의 군주이기도 하지만 한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왕과 왕세자의 관계 뿐만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에게서 태어났다. 숙빈 최씨는 나인보다 못한 신분에서 성은을 입어 영조를 낳았다. 숙빈 최씨는 친인척이나 다른 지원 세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아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영조는 생모가 하찮은 출신이라 궁궐 안에서 푸대접을 받는 일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생모 역시 아들을 애지중지 키운 탓에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미운 정과 고운 정을 주고받으며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것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이렇듯 영조는 어릴 때부터 일정한 트라우마를 안고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 여파도 영조는 사랑하는 일과 미워하는 일을 매우 극단적으로 보였다. 아버지 숙종에 대해서는 그저 그랬지만, 어머지 최숙빈에 대해서는극진했다. 아들과 딸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극진히 사랑한 반면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를 그저 그렇게 대했다.
한편 영조는 3세에 외동아들 효장세자를 잃었다. 세자빈까지 맞이한 10세의 세자가 갑자기 죽자 그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다행히 7년 뒤 아들 사도세자를 얻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아뿔싸, 영조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300년 종사를 이어갈 세자로서의 체통을 더욱 중요시했다. 그는 세자를 생후 백일만에 생모 영빈 이씨에게서 떼어 세자로서의 위의(威儀) 공부를 시키게 했다.
사실 세자 입장에서도 불운했다. 성장기에는 부모의 사랑을 통한 정서적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었을 상궁이나 나인들이 교육에 대해 얼마나 알았을까? 게다가 당시 세자를 대신 길렀던 이들은 경종을 모시던 윗전 나인들이었다. 이들은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를 낮추어 보아 생모가 세자를 보고자 하면 궁궐의 법도에 따라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세자는 말수가 적고 행동이 느린 성격으로 자랐다. 이에 반해 영조는 매사에 민첩하고 조급한 성격이었다. 부자간에 엇박자가 생긴 것이다. 세자는 부왕의 성격적 결함과 어머니의 부재라는 이중적 어려움 속에서 자랐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부자지간을 중재해줄 인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하때 영조의 사랑을 받던 화평옹주가 중재를 맡기도 했으나, 그녀가 아기를 낳다가 갑자기 죽자 부자지간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 책은 국왕을 대리하던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 세자가 죽어간 과정, 그리고 세자가 죽음으로써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나는 그간 조선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비극의 내막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게 된 원인은 아버지의 잘못된 훈육 방식에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조는 사랑보다는 체통을 중요시했고 칭찬보다는 질책을 더 자주 했다.
원래 권위적인 가부장제 집안에서 그 자녀는 이중 속박을 겪게 마련이다. 영조는 자신이 받았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사도세자에게 권위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
사도세자의 성격은 아버지의 기대를 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도 저도 어쩔 수 없으니 결국 정신착란 증세가 온 것이 아닐까? 결국 영조는 4대 독자였던 아들을 서인으로 강등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여버렸다(1762년 임오화변).
정조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효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령 사도세자의 묘인 수은묘에 처음으로 수봉관을 설치하도록 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바꾸었다.
한편 극적인 매듭은 사도세자가 환갑을 맞은 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화성으로 모시고 가 군왕에서 천민에 이르는 모든 이들이 한데 어울리는 큰 잔치를 베푼 것이었으니. 사도세자의 억울한 한을 멋진 환갑 잔치로 승화시켜 풀어낸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달리 해석한다. 그는 사도세자가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먼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보면서 당시 정치적 권력 다툼의 격변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본다. 역사적 사실을 놓고 그 맥락을 되짚어보는 것은 우리가 오늘을 사는 교훈을 얻기 위함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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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지기 2015-10-2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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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새창으로 보기
엇갈린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영화 <사도>를 보고서 거의 마지막 부분부터 클로징 이후까지 내내 울면서 나왔다.
엇갈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아버지는 미약한 심신 탓에 정치권력의 관계 속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아들을 희생시켰고
아들은 바라고 바랐던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 그냥 부자 사이였더라면 아들이 죽음에까지 이르렀을까.
왕과 세자의 관계였기에 불미스러운 일을 기어코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라는 이름을 아들에게 내린 아버지.
사도라는 시호를 세자에게 하사한 임금 영조.
이들의 비운은 아버지와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임금과 세자였기 때문에 빚어진 것인가.
많은 이들은 영조와 아들 사도 세자의 일을 거론할 때 정치 때문이라 말하며
당쟁 때문에 임오화변이 일어났다고들 한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통해서 왕궁 안의 일이기에 쉽사리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말하는 척 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비호한다.
영조는 성격적 결함이 있었으며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자였다고.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거론한 많은 책이 있지만 이 책은 특히 '임오화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한다.
영화 <사도>의 많은 장면들이 이 책을 읽으며 고스란히 겹치게 되는 것은, 이 책이 비슷한 맥락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임오화변은 당쟁과 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뭉뚱그려서는 실상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며 여러 차원에서의 접근을 시도한다.
결론은, 임오화변이 일어난 주된 원인은 영조와 세자의 성격적 갈등에 있다는 것.
영조는 특히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두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을 영화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영조는 개미의 무리를 보면 밟지 못하며 파리가 간장에 빠지면 그것을 모두 건져서 놓아줄 정도로 어진 마음을 가졌지만 신하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과 같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불편한 일이 벌어지면 자신의 결백함을 보여주기 위해 식사나 탕제를 거부했다. 땅에 주저앉아 운 적도 있고, 옛집으로 돌아가 며칠씩 궁궐을 비우기도 하고 어린 세자에게 왕위를 내어 놓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그런 아버지에게라도 칭찬의 말 한 마디, 다정한 어루만짐을 기대했을 법한 세자에게 영조는 미움을 드러내기만 했다. 불결한 일이나 불길한 일들을 떠넘기기 위해 세자를 귀씻이의 대상으로 삼았고 좋지 못한 사건은 세자가 처리하도록 하며,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세자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이런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인해 세자는 이상행동을 하게 된다. 칼쓰기, 활쏘기, 말타기, 여자, 음주, 병술, 의술, 잡기 등에 관심을 쏟던 세자는 영조의 질책으로 야기된 병증이 발전하여 의대증, 가학증, 자학증의 정신질환을 보였다. 누구 하나 나서서 세자의 이런 행동을 이야기하지 않던 중, 나경언의 고변 사건으로 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기에 이른다.
사도세자의 어린 아들은 뒤주에 갇힌 아버지가 왜, 무엇 때문에 죽어가는지 알고는 있었을까.
아들을 죽이라 명령하는 임금 뒤에서 사도 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선희궁), 혜경궁 홍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도 세자가 일찍 처리되었어야 하는 이유를 정조 탓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영민한 후계자가 일찌감치 정해졌으니 눈엣가시같은 사도세자는 오래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없다...
뒤주 하나를 가운데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시각은 엇갈리고 그들의 가슴 속 진실은 그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당쟁 속에 묻혀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슬프고도 비극적인 이야기가 이제 와 새삼 주목을 받고 널리 회자되고 있을 뿐.
한 왕조의 권좌를 차지하고 있던 왕이었기에 아들에게 더욱 매몰찰 수밖에 없었던가...
엇갈린 아버지와 아들의 시선은 사후에 한 곳으로 모아졌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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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돌이 2015-10-2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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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새창으로 보기
영조와 사도세자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로, 소설로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영조가 장자인 효장세자를 잃은 뒤에 귀하게 얻은 아들이 사도세자이다. 그 아들을 한창 젊은 나이인 28세에 뒤주에 가두어서 죽였다. 11세인 손자가 아비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도 묵살하며 죽인 사건, 그것이 임오화변이다. 왕인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다음 대를 이를 세자를 죽였다는 충격에서 두고두고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요즘 상영하고 있는 영화 〈사도〉를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더욱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에 대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부자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해졌다.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떤 책에서는 사도세자가 당쟁의 소용돌이에 희생된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설에서는 사도세자의 정신병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로 얘기하기도 한다.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서는 그런 사도세자의 정신질환들에 대해서 서술한 부분이 많다.
저자는 이미 알려진 입장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대리청정을 하던 젊은 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당쟁의 격렬함이 있었는지 아니면 사도세자의 억울함에 맞추어서 책을 서술했는지 궁금했다. 영조와 사도세자 중에서 누구의 편에서 풀어나갈지도 관심사였는데, 나의 예상은 틀렸다.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닌 영조와 세자의 성격적 갈등에 있었다고 얘기한다. 부자의 성격이 달랐다는 것은 조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비극으로까지 이어졌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저자의 연구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도세자를 둘러싼 연구 내용이 더 풍부해지는구나하는 생각에 내심 흐뭇하다.
성격이 다름을 인정해주었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을. 영조는 어린 시절 어머니인 숙빈 최씨와 고립된 생활을 했는데, 어머니는 친척이 매우 적었다. 따라서 영조도 고립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또한 생모의 지위가 낮아서 푸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왕자인 자신도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에 출신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다. 그리고 어머니 숙빈 최씨로 나타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생모를 얕보거나 괴롭히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미워하는 사람으로 주변 사람들을 구분지었다. 심지어 자신의 자녀들에게까지 적용이 되어 사랑을 받는 자녀는 넘치게 사랑했고, 사랑하지 않는 자녀는 질책을 하고 꾸중을 하는 등 심하게 대했다. 사도세자는 사랑하지 않는 왕자였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생모의 품에서 떼어내어 경종이 지냈던 저승궁으로 보내 세자로서의 위엄을 갖추도록 했다. 젖먹이가 엄마와 아버지를 떠나 홀로 생활해야 했던 공간,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린 아기의 슬픈 울음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아, 외로웠을 세자.
더군다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자주 찾아 올 수도 없는 곳, 부왕인 아버지도 오지 않는 곳에서 나인들 틈에서 자라는 세자는 부모의 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다.
그랬기에 정치상황에 빨리 대처해서 살아야하는 부왕 영조와는 다르게 행동하게 된다. 부왕의 물음에도 대답이 느리고, 자신의 소신을 얘기하지 못하는 세자. 부왕의 질책에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세자, 그래서 동물들을 죽이거나, 심지어 대항할 수 없는 내관을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해소하려한 세자. 어릴 때 세자를 홀로 두지 않고 곁에서 키우면서 부모의 사랑을 알고 자랐다면, 부왕이 엄하게 야단을 치더라도 그렇게 주눅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면 임오화변같은 참극은 없었을 텐데, 참으로 아쉽다.
세자는 성년이 되자 부왕에게 반항하기 위해 영조가 싫어하는 일을 한다. 술과 여자를 경계하라는 부왕의 분부에 오히려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며 부왕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부왕의 질책이 심하면 두려움에 떨면서도 다른 방법으로 해소했다. 심지어 궁궐을 나가서 여인들, 기생들을 궁으로 데리고 들어오거나,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몰래 평양으로 20여일이나 나가 궁을 비운 일 등 세자로서 자질을 의심받는 행동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경언이 세자에 대한 비행을 적은 고변서를 올리고, 이를 대한 영조의 분노는 급기야 자신의 아들인 세자를 포기하게 했다. 영조는 유독 의리에 집착을 했는데, 종묘사직을 위한 공적인 의리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적인 의리에서 처리하는 방법이 달랐다. 영조는 종묘사직을 위해서 아들인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결국에는 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왕실에서 일어난 조선 시대의 비극적인 부자의 이야기 중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준다. 성리학이 국시인 나라에서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죽게 되는 이야기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슬프다.
이 책은 기존의 당쟁의 격화 속에서 희생되었다는 주장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문제가 되어서 영조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들이 부딪치는 학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이 발단이 되었다는 전개가 참신하다. 물론 부자의 성격상의 차이가 임오화변의 모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서 당쟁이 끼어들 빌미가 되었다. 가볍지만 속이 꽉 찬 내용으로 이루어져 영조와 사도세자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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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누마 2015-10-2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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