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23
정지환(news)
월간 <말> 2000,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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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계의 태두(泰斗)로 불리는 김윤식 교수. 그는 최근 <한국현대문학비평사론>과 <초록빛 거짓말, 우리 소설의 정체>를 펴냄으로써 ‘저서 100권 발간’을 돌파했다. 지난 1973년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를 발간한 이후 27년 만에 이룩한 미증유의 업적이다.
그런데 “언어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내 앞에 소설이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 바 있는 이 백전노장의 문학비평가를 둘러싸고 표절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표절 문제 하나만으로 그의 학문적 성과 전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건이 있는 곳이라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그 현장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기자의 운명인 걸 어쩌랴.
“한 젊은 문학평론가가 작성한 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이 중앙 일간지 문화부 기자들에게 전달됐으나 묵살된 채 보도되지 않고 있다.”
기자가 최근 한 중진 문학평론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전해들은, 1년 전부터 문단에 떠돌고 있다는 ‘흉칙한 소문’의 내용이다. 며칠 후 기자는 문단의 다른 인사가 전하는 또 하나의 소문에 접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소설비평의 대가인 김윤식 교수가 선정되지 않은 것도 표절 논란과 무관치 않다.”
한 문학평론가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실린 글
마침 김윤식 교수(64)의 ‘100권 저술 돌파’ 소식이 각 신문 지면을 덮고 있던 상황이라 충격의 파장은 더욱 컸다. 그 두 개의 소문은 과연 사실일까. 기자는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추적에 나섰다.
단서는 세 가지로 좁혀졌다.
(1)‘젊은 문학평론가’는 누구인가?
(2)‘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은 존재하는가?
(3)‘김 교수가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 이 소문과 관련이 있는가?
문단 인사들을 탐색한 끝에 하나의 실마리를 찾았다.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인 문학평론가 홍기돈씨의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 소문의 진상을 뒷받침하는 글이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인터넷을 연결하자 <현대시문학상 수상식에 다녀오다>라는 제목의 글이 떴다. 글을 올린 날짜는 지난 7월 2일. 다음과 같은 대목이 시선을 끌었다.
“어제는 현대시문학상(실제로는 현대시동인상이라고 함) 수상식이 있었다. …수상식장에는 유명한 시인들이 참 많이도 왔다. 축사는 김춘수 선생이 하셨는데 …(뒤풀이 술자리) 2차에서는 이모 선생 맞은편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거기서 오고 간 기억나는 내용은 대략 두 가지. 하나는 이명원에 대한 얘기였다. 이모 선생께 들은 내용인데, 이번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서 김윤식 교수가 배제된 이유가 이명원의 비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모 선생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에게 들었다고 출처를 밝히셨다.”(홍기돈씨의 요청으로 이모 선생’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사실 확인을 위해 홍기돈씨와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현대시동인상 수상식은 언제 있었나?
“지난 7월 1일이었을 것이다. 장소는 대학로에 있는 한 건물이었다.”
―수상식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이명원, 고명철, 나 셋이서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비평과 전망> 창간호에 글을 써준 권혁웅씨가 올해의 수상자였기 때문에 축하해주려고 갔다. 권씨와는 문예지 <애지>에서 내가 그의 시를 언급했던 인연도 있었다.”
―문제의 발언을 듣게 된 경위는?
“행사가 끝나고 술자리가 있었다. 1차에서는 <현대시학>에서 활동하는 시인들, 고려대 최동호 교수의 제자들과 마셨고, 2차에서는 이모 선생과 마셨다. 그때 이모 선생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이모 선생은 요즘 이명원의 활동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모 선생과는 어떤 사이인가?
“내가 문학평론가로 등단할 때 그분이 심사위원이셨다.”
―홈페이지에 쓴 내용은 사실인가?
“그렇다.”
이로써 세 가지 단서 중 우선 단서(1)과 단서(3)의 진상은 밝혀졌다.
(1)‘김윤식 교수 표절 폭로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젊은 문학평론가’의 이름은 이명원이다.
(3)‘김윤식 교수가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 이명원의 비판과 관련이 있다.
‘폭로 문건’은 없고 ‘학술 논문’은 있다
그러나 단서(2) ‘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의 존재 여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물론 홍기돈씨의 진술을 통해, 문건의 존재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명원의 비판’과 ‘표절 폭로 문건’이 일치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명원’은 누구인가.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인 그는 서울시립대 국문학과 4학년 때인 지난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비평 당선과 <상상> 비평상 수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데뷔했다. 현재 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그는 최근 김현 논쟁, <창작과 비평> 논쟁 등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과 안티조선 논쟁에 논객으로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에 대한 기고·인터뷰 거부 지식인 1백54인 선언에도 문학계 인사로 서명한 바 있다.
지난 9월 1일 마포의 한 술집에서 기자는 이명원씨(30)를 만날 수 있었다. ‘표절 폭로 문건’ 소문의 진위에 대해 묻자, 그는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당신이 ‘표절 폭로 문건’을 작성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 알려진 것이다. 단언컨대 ‘표절 폭로 문건’은 없다. 석사과정 때 김윤식 교수의 비평 작업을 검토하는 논문을 썼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논문을 쓴 것은 언제인가?
“석사과정 3학기 때였으니까 아마 1997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대학원에선 매 학기마다 논문발표회가 있는데, 그때 쓴 논문 제목이 바로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스’ 비판>이었다. 학문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작성한 논문을 두고 ‘표절 폭로 문건’이라니 당치 않은 소리다.”
―일부에선 당신이 직접 문건을 언론사 기자들에게 돌렸다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왜 그런 헛소문이 도는지 이해할 수 없다.”
―논문이 학교 외부로 나갔을 가능성은 없나?
“서울시립대 국문학과는 매년 <전농어문연구>라는 논문집을 내는데, 내가 쓴 논문이 1999년 2월에 발간된 11집에 실렸다. 그때 내 논문만 따로 별쇄본을 만들어 다른 대학 교수 10여 분에게 돌린 적은 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학문적 평가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논문을 보냈던 교수들의 면면을 기억하는가?
“내가 분석 대상으로 삼았던 김윤식 교수를 비롯해, 오세영, 유종호, 정과리 교수 등이었다.”
―교수들로부터 반응은 없었나?
“김윤식 교수가 제3자를 통해 한번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다른 분들로부터는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에세’ 담배 한 개비를 빼 든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불을 붙이더니 다시 말문을 이어갔다.
“사실은 한두 달쯤 지나고, 그러니까 작년 4∼5월경에 <중앙일보> 학술부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기사화하고 싶다고 했지만 내가 반대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상하게 소문이 퍼졌다니 황당할 따름이다.”
―김윤식 교수와 만났나?
“나는 글을 통해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명원씨는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 싫다면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문제가 된 논문을 제공해달라는 기자의 요청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조만간 김윤식을 비판한 이 논문을 포함해, 김 현, 백낙청, 임화 등에 대한 비판적 논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번역상의 표기 차이 빼면 명백한 ‘표절’
그러나 비록 인터뷰는 중단됐지만 성과는 있었다. 소문과 달리 ‘폭로 문건’이 아니라 ‘학술 논문’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이명원의 비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단서(2)의 진상도 밝혀졌다.
(2)‘김윤식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김윤식 교수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논문은 존재한다.
이제 급선무는 문제의 논문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에야 그 논문이 실려 있는 <전농어문연구> 11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이씨의 논문은 다른 일곱 개의 논문과 함께 실려 있었는데, 맨 뒤에서 두번째에 수록돼 있었다.
우선 논문 내용부터 정독했다. 이명원씨가 표절 문제를 언급한 것은 <한국근대소설사연구>. 이 책의 2장 <문학적 풍경의 발견>과 4장 <고백체 소설 형식의 기원>이 일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실제로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보니 <풍경의 발견> <내면의 발견> <고백이라는 제도> 등의 소제목이 보였다. 특히 <문학적 풍경의 발견> 중 일부 대목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아예 ‘표절’한 것으로 드러났다.(여기서 배경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한국근대소설사연구> 53∼54쪽)
다음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번역판에 실린 내용이다.
(1)판 덴 베르크의 생각에 따르면 서구에서 최초로 풍경이 풍경으로서 그려진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이며
(2)그곳에는 풍경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인간과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풍경이 존재한다.
(3)그렇지만 모나리자라는 인물의 미소는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4)거기에 ‘내면성’의 표현을 보아서는 안 된다.
(5)아마 사태는 그 역일 것이다.
(6)>모나리자>에는 개념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맨얼굴이 처음으로 표현되었다.
(7)그렇기 때문에 그 맨얼굴은 ‘의미하는 것’으로서 내면적인 무엇인가를 지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내면’이 거기에 표현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노출된 맨얼굴이 ‘내면’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전도는 풍경이 형상으로부터 해방되고 ‘순수한 풍경’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며 사실상 같은 것이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84쪽)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개의 내용은 번역상의 표기 차이를 빼면 아예 똑같다. 대충 비교해보기만 해도 거의 같은 부분이 무려 일곱 군데나 된다. 물론 김윤식 교수가 인용 표시를 했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을 구해 직접 확인해본 결과 인용 표시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표절’임에 분명했다.
김윤식 교수의 ‘독백’과 이명원씨의 ‘고뇌’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외국 이론의 ‘차용’이라는 수준을 넘어서 ‘표절’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가라타니 고진의 ‘차용’에 대한 지적은 간헐적으로 있어왔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들이 최근 몇 년 사이 집중 번역되면서, 김윤식 교수가 평소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인 것처럼 주장해온 것들이 사실은 가라타니 고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가라타니 고진의 학문적 오류마저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했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를 발간한 김영건 서강대 강사의 비판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비트겐슈타인과 자연주의철학’으로 학위를 취득한 그는 김윤식 교수가 철저하게 동의한 가라타니 고진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에 오류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관련 김윤식 교수는 <문예중앙> 2000년 여름호에 의미심장한 칼럼을 썼다. 자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쓴 이 글에서 자신의 사상적, 학문적 텃밭이 일본이었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기자는 이 칼럼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 주목했다.
“고바야시 히데오, 요시모토 다카키, 에토 준, 가라타니 고진, 미우라 마사시 등의 글을 읽고 배운 것이 많지만, 내겐 외국문학인지라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만일 이런 범주에서 조금 벗어난 것이 있다면 위에서 말한 <소세키와 그의 시대>이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쓸 때 내 머리 속엔 <소세키와 그의 시대>가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았나 회고된다.”
자신의 저술 <이광수와 그의 시대>의 작명이 에토 준의 <소세키와 그의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아울러 에토 준, 가라타니 고진 등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일본 학자들의 이름도 털어놓았다. 그러나 “내겐 외국문학인지라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더 이상 솔직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위에서 확인한 것처럼 가라타니 고진을 명백하게 ‘표절’해놓고도 ‘참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한 것이다.
물론 이 표절 문제 하나만 가지고 김윤식 교수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학문적 업적 전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이명원씨의 논문을 몇 차례나 정독하며 우리 지식인 사회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씨가 작성한 논문의 행간(行間)과 주석(註釋)에 배어 있는 고뇌와 성찰이 가슴에 울려왔거니와, 그는 결론 부분의 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학문의 초입에 있는 사람이, 또한 비평계의 말석에 있는 사람이 우리 근대문학 연구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선배학자를, 또 평단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현재에도 지침 없이 현장비평을 수행하고 있는 선배 비평가를 비판할 때,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이 동반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우리 사회처럼, 두드러지게 ‘장유유서’의 관행이 철저하게 준수되고 있는 곳에서, 이러한 작업은 자칫 ‘치기’ 혹은 ‘객기’의 산물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우리 학계 및 비평계에 건전한 지성의 통풍이 될 수 있는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혹 그러한 가능성이 절망적일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지라도, 누군가는 묵묵히 이 일을 해나갔을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논문을 쓰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독백에 다름 아니거니와, 이씨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문제는 김 교수가 행한 비평적 작업에 대한 가치평가는 그의 작업량에 비하면 미미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비평론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대개 맹목적인 찬사에 가까운 글이거나, 선배 비평가에 대한 과도한 예의에서 나온 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착잡해지기까지 한다. …기이한 것은 일본문학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았을 일문학자들이나 한국의 국문학자들은, 왜 단 한 번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언론은 과연 표절 사실 알고도 쉬쉬했나?
사실 ‘맹목적인 찬사’나 ‘과도한 예의’의 경향은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서 100권 돌파와 관련, “쉽사리 범접하기 힘든 거대한 봉우리”라는 표현을 동원해 칭송한 한 신문의 보도가 단적인 사례이다. 언론에게 ‘범접하기 힘든’ 성역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언론이 김 교수의 표절 사실을 알고도 쉬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은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다. 결국 김 교수 표절 논란은 우리 지식인 사회가 갖고 있는 일그러진 풍경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보여준 셈이다.
마지막 의혹. 자타가 공인하는 소설비평의 대가이자 잡지에 발표된 소설은 다 읽는다는 김윤식 교수가 왜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서 제외됐을까. 그는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의 단골 심사위원으로 활약해 왔다. 그렇다고 그가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도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조선일보>가 김 교수를 심사위원으로 선정할 경우 안티조선에 서명까지 한 이명원의 논문이 언제라도 불거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문단 일각의 분석은 심증 차원을 넘어선다.
이와 관련, 기자는 김윤식 교수에게 4개항의 질의서를 보냈고, 김 교수는 9월 14일 답변서를 보내왔다. 다음은 ‘질문 요지’와 ‘답변 전문’이다.
(1) 표절 문제의 사실 여부에 대하여: “지적한 대로 가라타니의 글 가운데 일부가 내 글에 그대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내 실수입니다.”
(2) 이명원 비판의 적합성과 타당성에 대하여: “젊은 학인 이명원씨의, 나를 비판하는 패기를 높이 평가합니다. 앞선 세대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학문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의 적합성과 논지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3) <문예중앙>에서의 ‘고백’에 대하여: “내 공부와 글쓰기가 일본문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 고백들은 이 점과 관련해서 이해될 터입니다.”
(4)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하여: “그것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처음 듣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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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계의 태두(泰斗)로 불리는 김윤식 교수. 그는 최근 <한국현대문학비평사론>과 <초록빛 거짓말, 우리 소설의 정체>를 펴냄으로써 ‘저서 100권 발간’을 돌파했다. 지난 1973년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를 발간한 이후 27년 만에 이룩한 미증유의 업적이다.
그런데 “언어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내 앞에 소설이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 바 있는 이 백전노장의 문학비평가를 둘러싸고 표절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표절 문제 하나만으로 그의 학문적 성과 전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건이 있는 곳이라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그 현장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기자의 운명인 걸 어쩌랴.
“한 젊은 문학평론가가 작성한 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이 중앙 일간지 문화부 기자들에게 전달됐으나 묵살된 채 보도되지 않고 있다.”
기자가 최근 한 중진 문학평론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전해들은, 1년 전부터 문단에 떠돌고 있다는 ‘흉칙한 소문’의 내용이다. 며칠 후 기자는 문단의 다른 인사가 전하는 또 하나의 소문에 접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소설비평의 대가인 김윤식 교수가 선정되지 않은 것도 표절 논란과 무관치 않다.”
한 문학평론가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실린 글
마침 김윤식 교수(64)의 ‘100권 저술 돌파’ 소식이 각 신문 지면을 덮고 있던 상황이라 충격의 파장은 더욱 컸다. 그 두 개의 소문은 과연 사실일까. 기자는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추적에 나섰다.
단서는 세 가지로 좁혀졌다.
(1)‘젊은 문학평론가’는 누구인가?
(2)‘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은 존재하는가?
(3)‘김 교수가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 이 소문과 관련이 있는가?
문단 인사들을 탐색한 끝에 하나의 실마리를 찾았다.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인 문학평론가 홍기돈씨의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 소문의 진상을 뒷받침하는 글이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인터넷을 연결하자 <현대시문학상 수상식에 다녀오다>라는 제목의 글이 떴다. 글을 올린 날짜는 지난 7월 2일. 다음과 같은 대목이 시선을 끌었다.
“어제는 현대시문학상(실제로는 현대시동인상이라고 함) 수상식이 있었다. …수상식장에는 유명한 시인들이 참 많이도 왔다. 축사는 김춘수 선생이 하셨는데 …(뒤풀이 술자리) 2차에서는 이모 선생 맞은편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거기서 오고 간 기억나는 내용은 대략 두 가지. 하나는 이명원에 대한 얘기였다. 이모 선생께 들은 내용인데, 이번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서 김윤식 교수가 배제된 이유가 이명원의 비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모 선생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에게 들었다고 출처를 밝히셨다.”(홍기돈씨의 요청으로 이모 선생’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사실 확인을 위해 홍기돈씨와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현대시동인상 수상식은 언제 있었나?
“지난 7월 1일이었을 것이다. 장소는 대학로에 있는 한 건물이었다.”
―수상식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이명원, 고명철, 나 셋이서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비평과 전망> 창간호에 글을 써준 권혁웅씨가 올해의 수상자였기 때문에 축하해주려고 갔다. 권씨와는 문예지 <애지>에서 내가 그의 시를 언급했던 인연도 있었다.”
―문제의 발언을 듣게 된 경위는?
“행사가 끝나고 술자리가 있었다. 1차에서는 <현대시학>에서 활동하는 시인들, 고려대 최동호 교수의 제자들과 마셨고, 2차에서는 이모 선생과 마셨다. 그때 이모 선생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이모 선생은 요즘 이명원의 활동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모 선생과는 어떤 사이인가?
“내가 문학평론가로 등단할 때 그분이 심사위원이셨다.”
―홈페이지에 쓴 내용은 사실인가?
“그렇다.”
이로써 세 가지 단서 중 우선 단서(1)과 단서(3)의 진상은 밝혀졌다.
(1)‘김윤식 교수 표절 폭로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젊은 문학평론가’의 이름은 이명원이다.
(3)‘김윤식 교수가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 이명원의 비판과 관련이 있다.
‘폭로 문건’은 없고 ‘학술 논문’은 있다
그러나 단서(2) ‘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의 존재 여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물론 홍기돈씨의 진술을 통해, 문건의 존재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명원의 비판’과 ‘표절 폭로 문건’이 일치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명원’은 누구인가.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인 그는 서울시립대 국문학과 4학년 때인 지난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비평 당선과 <상상> 비평상 수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데뷔했다. 현재 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그는 최근 김현 논쟁, <창작과 비평> 논쟁 등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과 안티조선 논쟁에 논객으로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에 대한 기고·인터뷰 거부 지식인 1백54인 선언에도 문학계 인사로 서명한 바 있다.
지난 9월 1일 마포의 한 술집에서 기자는 이명원씨(30)를 만날 수 있었다. ‘표절 폭로 문건’ 소문의 진위에 대해 묻자, 그는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당신이 ‘표절 폭로 문건’을 작성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 알려진 것이다. 단언컨대 ‘표절 폭로 문건’은 없다. 석사과정 때 김윤식 교수의 비평 작업을 검토하는 논문을 썼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논문을 쓴 것은 언제인가?
“석사과정 3학기 때였으니까 아마 1997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대학원에선 매 학기마다 논문발표회가 있는데, 그때 쓴 논문 제목이 바로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스’ 비판>이었다. 학문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작성한 논문을 두고 ‘표절 폭로 문건’이라니 당치 않은 소리다.”
―일부에선 당신이 직접 문건을 언론사 기자들에게 돌렸다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왜 그런 헛소문이 도는지 이해할 수 없다.”
―논문이 학교 외부로 나갔을 가능성은 없나?
“서울시립대 국문학과는 매년 <전농어문연구>라는 논문집을 내는데, 내가 쓴 논문이 1999년 2월에 발간된 11집에 실렸다. 그때 내 논문만 따로 별쇄본을 만들어 다른 대학 교수 10여 분에게 돌린 적은 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학문적 평가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논문을 보냈던 교수들의 면면을 기억하는가?
“내가 분석 대상으로 삼았던 김윤식 교수를 비롯해, 오세영, 유종호, 정과리 교수 등이었다.”
―교수들로부터 반응은 없었나?
“김윤식 교수가 제3자를 통해 한번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다른 분들로부터는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에세’ 담배 한 개비를 빼 든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불을 붙이더니 다시 말문을 이어갔다.
“사실은 한두 달쯤 지나고, 그러니까 작년 4∼5월경에 <중앙일보> 학술부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기사화하고 싶다고 했지만 내가 반대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상하게 소문이 퍼졌다니 황당할 따름이다.”
―김윤식 교수와 만났나?
“나는 글을 통해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명원씨는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 싫다면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문제가 된 논문을 제공해달라는 기자의 요청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조만간 김윤식을 비판한 이 논문을 포함해, 김 현, 백낙청, 임화 등에 대한 비판적 논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번역상의 표기 차이 빼면 명백한 ‘표절’
그러나 비록 인터뷰는 중단됐지만 성과는 있었다. 소문과 달리 ‘폭로 문건’이 아니라 ‘학술 논문’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이명원의 비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단서(2)의 진상도 밝혀졌다.
(2)‘김윤식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김윤식 교수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논문은 존재한다.
이제 급선무는 문제의 논문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에야 그 논문이 실려 있는 <전농어문연구> 11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이씨의 논문은 다른 일곱 개의 논문과 함께 실려 있었는데, 맨 뒤에서 두번째에 수록돼 있었다.
우선 논문 내용부터 정독했다. 이명원씨가 표절 문제를 언급한 것은 <한국근대소설사연구>. 이 책의 2장 <문학적 풍경의 발견>과 4장 <고백체 소설 형식의 기원>이 일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실제로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보니 <풍경의 발견> <내면의 발견> <고백이라는 제도> 등의 소제목이 보였다. 특히 <문학적 풍경의 발견> 중 일부 대목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아예 ‘표절’한 것으로 드러났다.(여기서 배경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 김윤식의 <한국근대소설사연구>는 1986년,
- 가라타니 고진의 <日本近代文學の 起源>은 1980년에 각각 간행됐다.
-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 한국에 번역돼 들어온 것은 1997년 6월이고,
- 이명원씨가 논문을 작성한 시점은 1997년 10월이다.
이씨가 이 번역본을 정독하는 과정에서 ‘표절’이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국근대소설사연구>의 2장 <문학적 풍경의 발견>에 실린 내용부터 보자.(알기 쉽게 표절 부분에 번호를 붙였다)
(1)반 텐 베르크의 견해에 기대면, 서양에서 처음으로 풍경이 풍경으로 그려진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이다.
(2)거기에는 풍경으로부터 소외당한 최초의 인간과, 인간적인 것에서 소외당한 최초의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이 인간적인 것에서 독립되어 독자적 세계, 이른바 풍경화의 세계를 성취한 것, 그것이 근대성이고, 풍경에서 독립된 인간이 인물화의 세계를 이룩한 것, 그것이 근대성이다.
(3)그러기에 ‘모나리자’라는 인물의 미소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물어서는 안 된다.
(4)거기에는 이른바 ‘내면성’의 표현을 보아서는 안 된다.
(5)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6)’모나리자’에는 개념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맨얼굴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7)따라서 그 맨얼굴은 ‘의미하는 것’(시니피에)으로서 존재한 것과 동시이자 동일한 것이다.
우선 <한국근대소설사연구>의 2장 <문학적 풍경의 발견>에 실린 내용부터 보자.(알기 쉽게 표절 부분에 번호를 붙였다)
(1)반 텐 베르크의 견해에 기대면, 서양에서 처음으로 풍경이 풍경으로 그려진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이다.
(2)거기에는 풍경으로부터 소외당한 최초의 인간과, 인간적인 것에서 소외당한 최초의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이 인간적인 것에서 독립되어 독자적 세계, 이른바 풍경화의 세계를 성취한 것, 그것이 근대성이고, 풍경에서 독립된 인간이 인물화의 세계를 이룩한 것, 그것이 근대성이다.
(3)그러기에 ‘모나리자’라는 인물의 미소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물어서는 안 된다.
(4)거기에는 이른바 ‘내면성’의 표현을 보아서는 안 된다.
(5)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6)’모나리자’에는 개념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맨얼굴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7)따라서 그 맨얼굴은 ‘의미하는 것’(시니피에)으로서 존재한 것과 동시이자 동일한 것이다.
(<한국근대소설사연구> 53∼54쪽)
다음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번역판에 실린 내용이다.
(1)판 덴 베르크의 생각에 따르면 서구에서 최초로 풍경이 풍경으로서 그려진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이며
(2)그곳에는 풍경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인간과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풍경이 존재한다.
(3)그렇지만 모나리자라는 인물의 미소는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4)거기에 ‘내면성’의 표현을 보아서는 안 된다.
(5)아마 사태는 그 역일 것이다.
(6)>모나리자>에는 개념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맨얼굴이 처음으로 표현되었다.
(7)그렇기 때문에 그 맨얼굴은 ‘의미하는 것’으로서 내면적인 무엇인가를 지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내면’이 거기에 표현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노출된 맨얼굴이 ‘내면’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전도는 풍경이 형상으로부터 해방되고 ‘순수한 풍경’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며 사실상 같은 것이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84쪽)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개의 내용은 번역상의 표기 차이를 빼면 아예 똑같다. 대충 비교해보기만 해도 거의 같은 부분이 무려 일곱 군데나 된다. 물론 김윤식 교수가 인용 표시를 했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을 구해 직접 확인해본 결과 인용 표시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표절’임에 분명했다.
김윤식 교수의 ‘독백’과 이명원씨의 ‘고뇌’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외국 이론의 ‘차용’이라는 수준을 넘어서 ‘표절’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가라타니 고진의 ‘차용’에 대한 지적은 간헐적으로 있어왔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들이 최근 몇 년 사이 집중 번역되면서, 김윤식 교수가 평소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인 것처럼 주장해온 것들이 사실은 가라타니 고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가라타니 고진의 학문적 오류마저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했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를 발간한 김영건 서강대 강사의 비판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비트겐슈타인과 자연주의철학’으로 학위를 취득한 그는 김윤식 교수가 철저하게 동의한 가라타니 고진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에 오류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관련 김윤식 교수는 <문예중앙> 2000년 여름호에 의미심장한 칼럼을 썼다. 자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쓴 이 글에서 자신의 사상적, 학문적 텃밭이 일본이었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기자는 이 칼럼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 주목했다.
“고바야시 히데오, 요시모토 다카키, 에토 준, 가라타니 고진, 미우라 마사시 등의 글을 읽고 배운 것이 많지만, 내겐 외국문학인지라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만일 이런 범주에서 조금 벗어난 것이 있다면 위에서 말한 <소세키와 그의 시대>이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쓸 때 내 머리 속엔 <소세키와 그의 시대>가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았나 회고된다.”
자신의 저술 <이광수와 그의 시대>의 작명이 에토 준의 <소세키와 그의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아울러 에토 준, 가라타니 고진 등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일본 학자들의 이름도 털어놓았다. 그러나 “내겐 외국문학인지라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더 이상 솔직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위에서 확인한 것처럼 가라타니 고진을 명백하게 ‘표절’해놓고도 ‘참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한 것이다.
물론 이 표절 문제 하나만 가지고 김윤식 교수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학문적 업적 전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이명원씨의 논문을 몇 차례나 정독하며 우리 지식인 사회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씨가 작성한 논문의 행간(行間)과 주석(註釋)에 배어 있는 고뇌와 성찰이 가슴에 울려왔거니와, 그는 결론 부분의 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학문의 초입에 있는 사람이, 또한 비평계의 말석에 있는 사람이 우리 근대문학 연구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선배학자를, 또 평단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현재에도 지침 없이 현장비평을 수행하고 있는 선배 비평가를 비판할 때,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이 동반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우리 사회처럼, 두드러지게 ‘장유유서’의 관행이 철저하게 준수되고 있는 곳에서, 이러한 작업은 자칫 ‘치기’ 혹은 ‘객기’의 산물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우리 학계 및 비평계에 건전한 지성의 통풍이 될 수 있는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혹 그러한 가능성이 절망적일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지라도, 누군가는 묵묵히 이 일을 해나갔을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논문을 쓰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독백에 다름 아니거니와, 이씨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문제는 김 교수가 행한 비평적 작업에 대한 가치평가는 그의 작업량에 비하면 미미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비평론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대개 맹목적인 찬사에 가까운 글이거나, 선배 비평가에 대한 과도한 예의에서 나온 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착잡해지기까지 한다. …기이한 것은 일본문학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았을 일문학자들이나 한국의 국문학자들은, 왜 단 한 번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언론은 과연 표절 사실 알고도 쉬쉬했나?
사실 ‘맹목적인 찬사’나 ‘과도한 예의’의 경향은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서 100권 돌파와 관련, “쉽사리 범접하기 힘든 거대한 봉우리”라는 표현을 동원해 칭송한 한 신문의 보도가 단적인 사례이다. 언론에게 ‘범접하기 힘든’ 성역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언론이 김 교수의 표절 사실을 알고도 쉬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은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다. 결국 김 교수 표절 논란은 우리 지식인 사회가 갖고 있는 일그러진 풍경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보여준 셈이다.
마지막 의혹. 자타가 공인하는 소설비평의 대가이자 잡지에 발표된 소설은 다 읽는다는 김윤식 교수가 왜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서 제외됐을까. 그는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의 단골 심사위원으로 활약해 왔다. 그렇다고 그가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도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조선일보>가 김 교수를 심사위원으로 선정할 경우 안티조선에 서명까지 한 이명원의 논문이 언제라도 불거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문단 일각의 분석은 심증 차원을 넘어선다.
이와 관련, 기자는 김윤식 교수에게 4개항의 질의서를 보냈고, 김 교수는 9월 14일 답변서를 보내왔다. 다음은 ‘질문 요지’와 ‘답변 전문’이다.
(1) 표절 문제의 사실 여부에 대하여: “지적한 대로 가라타니의 글 가운데 일부가 내 글에 그대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내 실수입니다.”
(2) 이명원 비판의 적합성과 타당성에 대하여: “젊은 학인 이명원씨의, 나를 비판하는 패기를 높이 평가합니다. 앞선 세대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학문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의 적합성과 논지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3) <문예중앙>에서의 ‘고백’에 대하여: “내 공부와 글쓰기가 일본문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 고백들은 이 점과 관련해서 이해될 터입니다.”
(4)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하여: “그것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처음 듣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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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월간 <말> 10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월간 <말> 10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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