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 전투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0년 1월) |
황토현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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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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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동학 농민군 | 조선 | ||||||
지휘관 | |||||||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 김문현 이경호† | ||||||
병력 | |||||||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4000명 최경선 300명 총병력 4300명 | 감영군 700명 향군 600명 총병력 1300 명 |
황토현 전투(黃土峴戰鬪)는 1894년 5월 11일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이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둔 전투로 후에 황룡촌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되었다.[1][2]
배경[편집]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전북 고부에서 고부 민란을 시작으로 발발한 농민 운동은 규모가 커져 4월 5일(음력 2월 30일)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남접계 지도자들이 4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정읍군 태인 주산리에서 태인접주 최경선이 이끄는 300명의 농민군과 말목장터에 집결한 수백 명의 농민군들까지 합세해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후에 금주, 부안, 고창 등 여러 곳에서 농민군이 집결하고 5월 5일(음력 4월 1일) 태인과 5월 8일(음력 4월 4일) 부안 관아를 점령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감사 김문현, 영관 이경호 등이 영내 잡색군 등 총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정읍 황토현으로 진격했다.
전투 과정[편집]
4월 7일 새벽 농민군은 관군에게 포를 쏘아 혼란에 빠뜨린 뒤 미처 대처하지 못한 관군을 추격해 패주시켰고 이 과정에서 영관 이경호가 농민군들에게 체포되어 전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고 전주로도 진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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