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自傳) 에세이 《수인》 펴낸 소설가 황석영
조철 문화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승인 2017.08.02 11:02
호수 1450
“돌아보면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몸부림이었다”
“나는 식민지 외곽, 만주 창춘(長春)이라는 국제화된 도시에서 태어나 해방이 되자마자 평양을 거쳐 서울 영등포라는 산업지대에서 자랐다. 세계문학이란 결국 유럽식 보편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현대화가 진행될수록 토박이 이야기꾼은 제약되거나 말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단절된 토박이성을 연결하려는 노력을 해 온 것이 나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자전(自傳) 에세이 《수인》을 펴낸 황석영 작가가 출간 기념 북콘서트에서 자신의 문학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다. 올해 75세인 그는 현대사의 숱한 굴곡과 파란을 겪으며 살아온 과정을 생생한 현장 기록처럼 펼쳐냈다.
“5년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지도 무려 20년째 접어들었다. 돌이켜보면 한 해도 편안했던 적이 없지만, 망명과 투옥의 기간은 수년 전에 고희를 넘긴 생애 속에서 그저 잠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서 살아온 내가 갈망했던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이 책의 제목이 ‘수인(囚人)’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
소설가 황석영 © 사진=박재홍 제공
경계를 넘어 불꽃 속으로 가기까지
《수인》은 2004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원고지 4000매 정도의 분량을 토대로 완성됐다. 당시 연재했던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연대순으로 이어지다가, 1976년 전남 해남으로 이주하는 데서 중단됐다. 13년이 흐른 뒤에 새로 쓴 분량 2000매가 추가됐다. 내용은 해남 이주 그 이후의 파란만장이다. 1980년 광주항쟁과 1989년의 방북과 망명, 투옥, 그야말로 격렬한 삶이다. 중앙일보에 밝히려 했던 주요 내용은 아마 이것들이 아니었을까.
“어른들에게는 가혹한 세월이라지만 아이들은 겉보기에 별로 무서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배고프거나 아플 때, 슬플 때 잠깐 울고 나면 그뿐이다. 얼룩진 눈시울을 쓱 닦고 돌아서면 생존 그 자체가 활기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마치 모르는 사이에 동상에 걸리는 것처럼 성장해 가면서 지난 상처들이 문득문득 못 견디게 가려워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에 허우적대는 것을 나는 종종 보아왔다.”
《수인》은 1993년 황 작가가 방북과 뒤이은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안기부에 끌려가 수사관들에게 취조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이야기는 감옥 안에서 보낸 5년의 시간과, 유년부터 망명 시절까지의 생애라는 두 시간대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그리고 감옥 바깥의 시간은 다시 순서를 달리해, 1985년 광주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출판한 후 처음으로 한반도를 벗어나 바깥 세계를 경험한 뒤 민주화운동과 방북·망명·구속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먼저 이야기한 다음, 시간을 거슬러 가족과 함께 월남한 다섯 살 무렵으로 돌아가 한국전쟁과 4·19, 베트남전쟁을 겪고 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5·18 광주항쟁을 맞기까지의 기억을 되짚어 나간다.
“나는 한국전쟁 당시 남과 북에서 죽어간 사람들과,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이 경계의 금기를 깨뜨렸다가 갇히고 처형당한 사람들, 그리고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다 죽은 시민들을 생각했다. 이 경계를 어떻게 해서든 넘어서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작가도 뭣도 아니었다.”
황 작가는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우리 분단의 운명과 강대국과의 관계에 눈을 뜨면서 문학을 시작하게 됐다. 광주항쟁은 그의 문학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장길산》을 연재하던 시절 농촌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광주에 살며 민주화운동 조직을 이끌었던 그는 광주항쟁이 발발했을 때 우연히 서울에 머물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급기야 작가로서의 삶을 버리고 활동가로 저항운동에 뛰어들며 급진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황석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464쪽 1만6500원
‘자유를 잃은 작가의 운명’ 고스란히 담아
황석영 작가가 《수인》에서 강조한 것은 자유다.
“결국 일생을 돌아보면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몸부림이었다. 자유의 길이다. 석방되기 위해 싸우는 것, 그러니까 이것이 ‘수인’이구나 싶어졌다. 우리는 누구나 시간의 감옥에 갇혀 있고, 또한 나는 작가니까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지 않는가. 정치·사회적으로는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한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나의 평생이었다, 하는 생각을 했다.”
망명과 투옥을 거쳐서 다시 세상에 나온 후 지금까지 20년 동안 15권의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평한 그는 자서전 쓰기의 어려움도 고백했다. ‘황구라’라는 그의 별명처럼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글 중에는 그렇게 비친 것들이 꽤 있었나 보다.
“이번 책을 쓰기 위해 세계 3대 자서전이라는 안데르센·루소·크로포트킨 자서전을 다 찾아서 읽어봤다. 자전이라는 게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잘못한 것, 못 미쳤던 것, 창피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자신의 치부까지도 다 드러내는 어려운 작업이라는 걸 알게 됐다. 초고 원고지 6000매 중에서 2000매 정도를 떼어냈는데, 편집부에서 제 자랑한 것은 귀신같이 알고 한두 줄로 줄이거나 뺐더라. 나중에 책이 나온 거 보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 작가는 얼마 전 ‘토리노 도서전’에 다녀왔다. 그는 그곳에서 만난 이탈리아 작가들에게서 “전 세계가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한국만 유난히 사회를 변화시켰다. 저력이 어디서 오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한참 자랑을 했다. 우리가 원래 미디어에 강한 민족이다. 금속활자도 우리가 제일 먼저 만들었다. 1970~80년대, 엄혹한 시절에 유인물 몇 장 뿌리고 그걸로 잡혀가고 그럴 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정말 미디어의 막강한 힘을 느낀다. 얼굴도 모르는 개인들이면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연대를 이뤄내는 것을 보고 많은 걸 느꼈다.”
‘자유를 잃은 작가의 운명’ 고스란히 담아
황석영 작가가 《수인》에서 강조한 것은 자유다.
“결국 일생을 돌아보면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몸부림이었다. 자유의 길이다. 석방되기 위해 싸우는 것, 그러니까 이것이 ‘수인’이구나 싶어졌다. 우리는 누구나 시간의 감옥에 갇혀 있고, 또한 나는 작가니까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지 않는가. 정치·사회적으로는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한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나의 평생이었다, 하는 생각을 했다.”
망명과 투옥을 거쳐서 다시 세상에 나온 후 지금까지 20년 동안 15권의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평한 그는 자서전 쓰기의 어려움도 고백했다. ‘황구라’라는 그의 별명처럼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글 중에는 그렇게 비친 것들이 꽤 있었나 보다.
“이번 책을 쓰기 위해 세계 3대 자서전이라는 안데르센·루소·크로포트킨 자서전을 다 찾아서 읽어봤다. 자전이라는 게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잘못한 것, 못 미쳤던 것, 창피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자신의 치부까지도 다 드러내는 어려운 작업이라는 걸 알게 됐다. 초고 원고지 6000매 중에서 2000매 정도를 떼어냈는데, 편집부에서 제 자랑한 것은 귀신같이 알고 한두 줄로 줄이거나 뺐더라. 나중에 책이 나온 거 보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 작가는 얼마 전 ‘토리노 도서전’에 다녀왔다. 그는 그곳에서 만난 이탈리아 작가들에게서 “전 세계가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한국만 유난히 사회를 변화시켰다. 저력이 어디서 오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한참 자랑을 했다. 우리가 원래 미디어에 강한 민족이다. 금속활자도 우리가 제일 먼저 만들었다. 1970~80년대, 엄혹한 시절에 유인물 몇 장 뿌리고 그걸로 잡혀가고 그럴 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정말 미디어의 막강한 힘을 느낀다. 얼굴도 모르는 개인들이면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연대를 이뤄내는 것을 보고 많은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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