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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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윤건차, 그리고 최근의 정영환 등의 재일조선인 담론은
그들이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는데도 불구하고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 집착하며 나름의 내셔널리즘, 그것도 혈연적 내셔널리즘을 추구한다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서경식의 대단히 폭력적인 면모가 있다.
그는 재일조선인을
- 일본 내셔널리즘과
- 한국의 우익 국가주의의, 그리고
- 동포인 한국인의 무관심 속에 위치한
희생자로 위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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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일조선인의 위치야말로 그에게는 어떠한 치밀한 논증보다도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권이 박탈당한 존재로서의, 수난의 대상으로서의 재일조선인은 그의 담론 속에서 난민으로 표상된다.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났기에 난민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는 단순히 소수민족으로서의 재일조선인의 복지 향상, 사회경제적 지위획득 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일본 내셔널리즘, 더 나아가 근대국가 체제 전체를 전복시킬 저항적 주체로서의 재일조선인을 지향하는데,
문제는 이 주체의 탄생을 역사적 기원, 즉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태초부터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을 난민화한 주범으로 상정된다.
일본을 언제나 조선인의 절멸, 난민화를 산출하는 기구로만 파악하는 그의 관점에서
주권자로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일본 시민권을 획득하는 재일조선인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여지는 조금도 없다.
일본 내셔널리즘에 동화된 존재로만 파악된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드러나듯이 일본의 식민주의적 폭력이라는 태초적 폭력은 어떠한 상황, 어떠한 조건, 어떠한 의미에서도 부정되어야 한다. 그에게 있어 식민주의적 폭력이란 마치 프로이트의 근친상간 금지와도 같은 태초적 폭력=욕망=주체구성의 조건이다. 이 폭력을 통해서"만" 재일조선인이라는 역사적 주체를 산출할 수 있기에 그에게 있어 이 폭력성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는 불가침의 영역이 된다.
그는 이러한 불가침의 영역을 침해한 모든 한일양국의 지식인에게 그 스스로가 "가혹"할지도 모른다고 인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비판을 퍼붓는다.
와다 하루키는 국가주의에 협력한 비루한 리버럴이 되고,
우에노 치즈코는 일본인의 전쟁책임을 망각한 민족주의자로,
니시카와 나가오는 신식민주의 - 국민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일본인으로서의 위치를 망각한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인물로 매도된다.
솔직히 그의 글을 읽다보면 '감히'라는 말이 생략됐다는 느낌마저 들 때가 많다.
한국인인 박유하 또한 식민주의의 직접적 피해자인 위안부에게 식민주의적 폭력을 가한 인물로 파악된다.
일본제국주의의 무조건적 항복(?)을 바라는 것인지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기 힘들다.
그에게 일본군 위안부라는 구체적인 피해자의 삶, 보상을 바라고 이미 화해재단으로부터 보상금("배상금"이 아니라!)을 받은 위안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논리의 정당성의 근거는 그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서 나온다.
그는 태초적 폭력, 식민주의적 폭력의 산물인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에 내셔널리즘적, 식민주의적 폭력을 감지할 수 있는 존재론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유물론적 입장에서 역사의 최종심급의 위치를 생산력, 경제적 토대가 점유하고 있듯이
서경식의 재일조선인 담론에서 내셔널리즘 - 식민주의적 폭력을 판단하는 최종심급의 지위는 재일조선(인 서경식)이 차지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은 식민주의적 폭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누구보다도 잘 감지할 수 있다.
그는 윤건차와 마찬가지로
이런 재일조선인의 역사가 조선민족 전체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한국 민주당 계열의 진보적, 좌파적 민족주의와 연결되면서 과거 통일운동론으로 이어졌지만
1990년대 잠깐 윤건차 등이 강하게 주장했던 통일론은 지금 와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민론만 남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에 식민주의 - 내셔널리즘의 폭력을 인지하고 비판하며 판단할 수 있다는 이 재일조선인 담론이 지닌 폭력성은 다분히 운동론적 관점에서 비롯됐다.
한국의 민중과 재일조선인이 연대를 이루며 동아시아 우익주의, 내셔널리즘, 국가주의 등에 저항하는 기나긴 투쟁의 역사 외에 다른 삶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의 논리를 따르자면 우익을 지지하는 한국인은 그저 자신의 역사적 기원을 잊은, 자본주의적 근대와 국가주의에 협력하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한국이라는 근대국가가 제공하는 공간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그 수많은 이들이 민중 대 반反민중이라는 예의 구도 속에 다시금 포섭된다.
예술에 적용되는 그의 섬세함이 왜 다른 곳에서는 적용되지 않는지.. 그가 말하는 민족해방론, 식민주의 철폐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대단히 폭력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나 또한 폭력적으로 그의 주장을 판별했지만 그의 주장도 참 폭력적이라는 생각이다. 모든 저작을 살펴보고 논평글을 하나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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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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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베 전 총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왔다는 건 내 글을 오랫동안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를 단순히 일본의 우경화, 극우화 등을 추진한 일본 보수 정치인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여러 번이나 주장했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베 전 총리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서경식 등의 일본 재일조선인, 일본 리버럴 등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정치인으로, 그리고 반한反韓을 추동하는 정치인으로 묘사되었는데 그런 질낮은 이해들이 오히려 아베와 한국 간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언젠가 한번 연구를 해보고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여러모로 아쉽다.
노무현 집권 이후 한국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일 강경 정책을 펼쳐왔다. 길게 보자면 이승만 때부터 한국은 집권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하며 대일 강경 태도를 보이다가 집권 후반기가 되면 대일 협력적인 기조로 곧잘 변하고는 했는데 노무현 이후에는 이상할 정도로 반대의 경향이 나타났다. 아베가 관방장관이었던 2006년 노무현 정부는 독도 문제로 해군 함정을 파견해 유사시에 발포하라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아베는 당시를 회고하며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는데, 그해에 총리가 된 아베의 입장에서 한국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아베는 첫 번째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보조를 맞추며 과거사 문제, 위안부 문제 등을 해결하겠다는 취지의 표현을 자주 했지만 한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란 쉽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때도 비슷했다. 2012년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은 노무현 못지 않은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아키히토 천황이 독립운동가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해야 한다, 통석의 염 뭐가 어쩌고 하는 말을 할거면 (일본 천황이) 오지 않아도 좋다 등의 발언으로 상당히 높은 수위의 발언들이었다. 박근혜 때도 비슷했다. 박근혜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고 대단히 강경한 발언을 하며 일본을 공격했다. 박근혜는 동아시아에서의 파워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이동했다는 인식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 절정이 2015년 중국의 항일전승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박근혜가 중국의 전승기념절에 참석하자 일본의 아베 총리는 한국이 더 이상 일본과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가 아니라고 말하며 직격탄을 날렸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흑자에 기대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없이는 발전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이제는 일본이 필요없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인식할 정도로 한국이 발전했던 것이고, 그런 발전과 여론의 움직임을 한국 정치인들은 굉장히 잘 따라갔다. 아베는 이러한 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일본의 '보통국가화'라는 큰 흐름을 만들어야 했다.
어찌됐든 아베 전 총리는 그나마 일본에서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버블의 붕괴, 동일본 대지진 등으로 드러난 일본 '전후 질서'의 한계를 돌파해 "보통국가화"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줄 알았다. 그의 큰 그림은 국내의 '전후체제'와 연결된 동아시아의 전후질서를 일본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기시다 내각이 보여주는 놀라운 외교력의 근간에는 아베 전 총리의 큰 그림이 있다. 결국에 일본은 '아시아 자유주의의 은밀한 지도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아베 전 총리가 구상하는 새로운 질서를 한국이 주도해서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건만.. 은밀한 지도자와 전위국가로서의 한국의 생동력이 결합했다면 얼마나 큰 변화를 이뤄냈을까? 괜한 기대일지 모르겠지만..
아베의 시대는 갔지만 그가 닦아놓은 일본의 '보통'국가화라는 테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의 '전후체제'를 뛰어넘을 새로운 테제로 "보통" 국가화를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것이 일본사의 전개 속에서 점점 더 큰 호응을 얻어냈다는 것 자체가 여러모로 재밌는 지점이다.
일본의 보통국가화는 내가 보기에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일본이 재무장하고 다시금 국제질서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텐데 한국은 도대체 어떻게 대응하려고 이러는지.. 아베 같은 큰 정치인이 현재의 일본 정치에 없다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더 큰 불행의 전조로 보아야 하나.
나는 의외로 아베 암살이 가져올 파급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후계자들이 그에 비해서 너무 자잘해서.. 아무튼 이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큰 인물이 졌는데도 별 감흥이 없다.
=== =
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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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읽고 있다가 덮었다.
예전부터 서경식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자주 뭔가 박탈당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열등감이라 해야 하나 그런 감정이 많이 들어서 읽기가 거북했다. 나는 그림을 보고 한번도 감정적으로 크게 동해본 적이 없는데 서경식의 글을 읽다보면 이 사람은 정말로 그림과 음악, 예술에 감동하는구나 싶어서 뭔가 괜시리 억울해진다.
저렇게 예술을 보고 비평할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갖추게 된 걸까. 단순히 돈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꾸준히 문화예술적인 것들을 향유한 데서 나오는 것이겠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예술도 즐겨본 사람이 즐길 줄 아는건데, 예술적으로 문외한인 내가 봐도 뭘 아나.
나는 신윤복 그림을 봐도 그냥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유럽이나 중국 가서 그림을 봐도 딱히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차라리 건물이나 도자기를 보고 감탄하면 했지. 그런데 서경식 글에 보면 신윤복 그림을 보고 넋을 잃어 침이 흐를 지경이라고 하니,
읽을수록 뭔가 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빈약한 예술적 감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부끄럽고 괜히 분하다.
예전에 드라마에서도 재벌 출신 주인공이 막 회사 이사 사모님 코를 눌러준다고 미술관 데려가서 작품 비평하고 그러는 걸 보면서 속시원하다는 것보다 그렇게 노력해서 대기업 이사직까지 올라가도 그림을 볼 줄 몰라 무시당하는 그 모습에 되려 비참함만 느껴졌는데 그런 것 같다.
‘태생이 달라’라는 느낌이랄까. 열등감과 억울함이 참 어지간히도 많은 것 같다. 나 자신이 고급인간은 아닐지라도 교양 있는 중산층이 되고 싶은 욕망이 강해서 한국인의 욕망이 무엇인지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욕망은 그래도 한국인이라면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런지.. 이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 = 손민석
Sreodostpnt5a4 hmll24e4g1gfhcr0h6 53m9i100gge1i2g512b29Deg52 · 에혀.. 서 선생님도 참..
HANI.CO.KR
일본 ‘리버럴’에 속지 마라, 더 위험하다
중도 자처하는 양심적 지식인? 공허한 양비론으로 본질 흐려 서경식 교수 “밖에선 안 보여”
세진 library 서경식 collection
- [eBook] 책임에 대하여-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9년 10월
- [eBook] 오늘은 선물이다- 오늘 생각 서경식 / e퍼플 / 2020년 7월
-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퇴락한 반동기의 사상적 풍경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나무연필 / 2017년 8월
-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 후쿠시마와 식민주의, 후쿠시마와 연대, 후쿠시마와 예술 서경식.정주하 외 지음, 형진의 옮김 / 반비 / 2016년 3월
-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 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 후쿠시마 이후의 삶-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 한홍구.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대담, 이령경 옮김 / 반비 / 2013년 3월
-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 경계에서 춤추다-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에 대한 서경식의 이야기 서경식 지음, 송현숙 그림 / 철수와영희 / 2009년 1월
-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한일 젊은 세대를 위한 서경식의 바른 역사 강의 서경식 지음, 형진의 옮김 / 반비 / 2012년 8월
- 디아스포라의 눈- 서경식 에세이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3월
- 소년의 눈물-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 난민과 국민 사이-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서경식 지음, 이규수.임성모 옮김 / 돌베개 / 2006년 4월
- 언어의 감옥에서-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 분단의 경계를 허무는 두 자이니치의 망향가- 재인한인 100년의 사진기록 서경식 외 지음 / 현실문화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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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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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보
김항(金杭, Kim Hang)
메일 주소: kimhang@yonsei.ac.kr
연구실 전화: +82-(0)2-2123-7574
# 연구키워드
표상문화론
# 자기소개
근대일본의 정치적 멘탈리티를 정치사상, 헌법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지성사로 분석한 논문으로 2008년 도쿄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김 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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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보
김항(金杭, Kim Hang)
메일 주소: kimhang@yonsei.ac.kr
연구실 전화: +82-(0)2-2123-7574
# 연구키워드
표상문화론
# 자기소개
근대일본의 정치적 멘탈리티를 정치사상, 헌법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지성사로 분석한 논문으로 2008년 도쿄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럽 현대지성사 및 근현대 일본/한국 문화지성사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International Journal of Asian Studies의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문화연구학회 및 비교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 연구주제
# 대표연구업적
1) 저서
『말하는 입과 먹는 입』 , 새물결, 2009.
『제국일본의 사상』, 창비, 2015.
『종말론 사무소』, 문학과지성사, 2016.
# 연구주제
- 근현대 일본/한국 문화지성사
- 유럽 근현대 사상/문화이론
- 20세기 식민주의와 보편주의
- 전지구적 내전과 정체성 정치
# 대표연구업적
1) 저서
『말하는 입과 먹는 입』 , 새물결, 2009.
『제국일본의 사상』, 창비, 2015.
『종말론 사무소』, 문학과지성사, 2016.
세진 서재
[eBook] 제국일본의 사상 : 포스트 제국과 동아시아론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김항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
김항.이혜령 기획,인터뷰,정리 / 그린비 / 2011년 1월
2) 논문
「내전과 현대 민주주의의 상황: 슈미트의『리바이어던』 해석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56집, 2018.
「혁명을 팔아넘긴 남자: 유폐되는 혁명과 음모 서사의 틈입」, 『민족문학사연구』 66호, 2018.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 『동방학지』 179집, 2017.
"Universalism and colonialism: reconsidering postwar democracy in Japan", Inter-Asia Cutural Studies, 17-3, 2016.
3) 기타
(역서) 『미시마 유키오 vs. 도쿄대 전공투』 새물결, 2006
(역서) 『예외상태』 새물결, 2009
(역서) 『정치신학』 그린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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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과 현대 민주주의의 상황: 슈미트의『리바이어던』 해석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56집, 2018.
「혁명을 팔아넘긴 남자: 유폐되는 혁명과 음모 서사의 틈입」, 『민족문학사연구』 66호, 2018.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 『동방학지』 179집, 2017.
"Universalism and colonialism: reconsidering postwar democracy in Japan", Inter-Asia Cutural Studies, 17-3, 2016.
3) 기타
(역서) 『미시마 유키오 vs. 도쿄대 전공투』 새물결, 2006
(역서) 『예외상태』 새물결, 2009
(역서) 『정치신학』 그린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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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김항의 와다 하루키 비판론
김항 교수의 와다 하루키 비판논문,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라는 글을 읽는데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치사상사를 전공하는 김항의 와다 하루키 비평은 한 학자가 다른 학자에 대해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정치사상가로서의 김항의 능력에 의문이 들게 만들 정도이다.
요컨대
- 그의 해석 능력에 의문이 들고
- 글 전체에서 박유하와 와다 하루키를 비판하고자 하는 강한 편향이 느껴진다.
김항의 와다 하루키 비판은 아래의 와다 하루키의 글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한다.
“군대가 다른 나라로 나가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자기 나라가 공습을 받아 초토화되었다. 그럼에도 요격하는 항공기도 없고 고사포의 응사도 없었다. 군대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감각을 결국에 갖지못했던 전시의 본토 일본인으로서는 군대 부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그것은 누군가 타인으로부터 강요된 것도 아니고 패전의 과정에서 스스로 납득하여 획득한 입장이다. 확실히 여기에는 일본국가가 조선인을 ‘황국신민’화시키고, 만주국을 건국하고,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고, ‘ 대동아공영권’ 건립을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공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 의식, 가해 의식은 없다. 그런 한계를 포함하면서도 이 자연스러운 군대부정의 감정이 전후 일본인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김항은 “여기서 되풀이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감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질문은 ‘한국인으로서’ 충분히 던질만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와다는 군대나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가 공습을 겪은 ‘일본인’으로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라 하는데,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면 “조선, 중국, 동남아에 대한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은 그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평화주의 내에 일본제국의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이 ‘자연스럽게’ 내장해 있지 않다면,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없이도 성립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김항은 이러한 와다의 인식을 “자기배반”이라고까지 한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부터 김항의 와다 비판은 의문을 자아낸다.
과연 “자연스럽다”는 말이 김항이 말하는 그런 의미를 지닌 것인가? 와다가 말하는 ‘자연스럽다’의 수식대상은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형성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형성이라 한다면 김항의 비판은 의문의 여지 없이 타당한 것이지만 김항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의 수식대상은 “군대부정”이다. “군대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감각을 결국에 갖지 못했던 전시의 본토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군대의 효용성에 회의를 느끼고 군대를 부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것은 일본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일반의 합리성을 지닌 모든 인간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김항이 인용을 잘못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김항이 직접 인용한 저 문단 속에서의 자연스럽다는 말의 의미는 군대 부정의 감정을 수식하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이 자연스럽다는 말에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와다가 정당화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는 “지배나 침략에 대한 반성”을 망각한 “자기배반”을 범하고 있다는 김항의 주장은 과도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논리적인 비약에서 시작한 글은 와다의 사상에서의 어떠한 “단절”이 존재한다는 또다른 비약으로 연결된다.
김항은 와다 하루키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 및 극복에서부터 그의 사상적 여정을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와다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적 개입은 단순히 한국을 돕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을 청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자기 개혁을 위한 실천이란 관점이었던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와다의 지적 여정은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식민주의 문제에 대한 보다 역사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김항의 분석에 따르면 와다는 북조선의 변화를 위해 한국전쟁과 북조선 연구를 행했으며 여기서 일본의 역할이란 “20세기의 역사를 정리하여 남겨진 전후-식민지 후 문제의 처리를 이번 세기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일본국가 및 일본국민의 의무”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일본인의 의무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편에서 군대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와 다른 한 편에서 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무감한 고립주의가 동시에 자리 잡”은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시 말해 일본 자신의 개혁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와다 하루키의 ‘동북아 공동의 집’이라는 “유토피아” 또한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김항에 따르면 이 새로운 유토피아는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지역 내 이웃들의 고통에 눈감아야 했던 것이 전후 일본의 조건이었다면, 냉전의 종식으로 이제 평화는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역 내 주체들과 주체적으로 협력하여 미래지향적으로 구축해나가는 과제가 되었기 때문”에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런 맥락 속에서 김항은 와다가 위안부 문제에 실천적으로 개입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내 추측이지만 김항은 위안부 문제에 개입하는 와다의 실천 속에서 그의 사상의 “단절”의 계기를 포착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과 극복보다는, 미래를 향한 지역 내 주체들의 대화가 과제가 되는 역사 단계로 이행했다는 인식이었던 셈”이라고 김항은 말하고 있는데 마치 와다가 이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과 극복”을 방기했다는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방기를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에 있어 난항을 겪자 와다는 점차 사상적 초점을 동아시아에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로 옮겨갔다고 김항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와다는 동아시아의 역사 주체 상호 간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데에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지렛대로 삼아 동아시아 및 전 세계 차원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데로 초점을 이동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하는 문장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김항은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에 대한 와다의 이러한 입장이 식민주의와의 사상적 유착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항에 따르면 <‘평화국가’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와다는 “전후 일본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및 국제 정세 속에서 주체적으로 평화국가를 지키려 노력해온 것이지, 미점령군으로부터 강요된 헌법 아래 무장해제 당해 굴욕을 경험해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패전 직후의 평화국가 구상을 천황과 주변 인물들의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이념”이라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김항에 따르면 이러한 와다의 인식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왜나하면 “군국주의자가 잘못 이끈 전쟁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련한 천황과 국민이라는 서사는 이미 1942년 시점에서 미국에 의해 고안된 심리전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감안할 때 천황과 주변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국가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어떤 구상을 가졌더라도 미점령군의 승인 없이는 전후 일본의 기본 노선으로 채택”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와다의 이러한 주장은 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주의”가 내장되어 있는 서사이며 “미국과 일본 보수파의 서사”이기도 하다. 여기서 와다는 미국과 일본 보수파와 사상적으로 ‘내통’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김항은 더 나아가 “침략전쟁은 결국이 질서를 어지럽힌 일탈 행위”였다는 이 서사를 와다가 받아들인 “이 지점에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피식민지(인)와 피침략 지역(인민)으로 향하기보다는 인류의 정의라는 보편주의적 규범을 향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인류의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 책임을 져야 할 과오로 인식되는 것”이다. 김항은 와다의 이러한 평화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식민주의가 착종된 난바라 시게라의 평화주의 평가에서 오류를 낳는 원인이 된다고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난바라 시게루는 비록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해 언급했지만, 아니 그의 천황 전쟁책임론은 대만인, 조선인 등과 같은 피식민지민의 추방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보다 “순수한” 일본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서 제기된 것이었다. 난바라는 피히테의 관점을 받아들여 개인 - 국민 - 인류라는 세계사적 관점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국민은 단순히 개인과 인류를 매개하는 중간적 존재가 아니라 국민이 존재함으로써만 비로소 개인과 인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천황은 이 국민 공동체의 형성을, 그것도 순수한 형태로의 분열과 대립이 없는 김항의 표현에 따르자면 ‘매끈한’ 공동체의 창출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이런 난바라의 입장에서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친일파와 같은 역사적 대립이 존재하고 있는 조선과 대만은 국민을 형성하지 못한 곳이고, 그렇기에 그들은 인류에 포함되지 않는다. 일본은 천황을 매개로 국민을 창출하여 인류 보편에 기여하는 문명국가이지만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배제되어 자신들만의 국민을 창출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그런 비문명 지역이 되는 것이다.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이 난바라 사상의 중심축이라는 것이 김항의 분석이고, 그런 난바라의 주장에 동의하며 높게 평가하고 있는 와다의 사상도 난바라와 마찬가지로 식민주의에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 김항의 핵심 주장이다.
다소 난폭한 논리전개와 단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 논지 자체는 진부하기까지하다. 기존의 다른 논자들과 다를 바 없이 일본국의 평화헌법은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이며 일본인의 주체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일본인들의 그 평화 인식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몰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 않으나 한국인인 김항이 일본인에게 “일본인의 주체성”을 무시하라는 역사인식을 강요한다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평화헌법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어찌됐든 지킨 것은 일본인들 스스로의 결단이고 당연하게도 일본인들의 그 결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해명을 이뤄져야만 한다. 일본인은 일본 역사의 전개에 있어 일본인 자신의 주체성을 세울 필요성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김항은 이런 지점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본논의로 돌아가자면 김항의 논지는 결국 와다의 사상이 위안부 문제를 계기로, 그 이전부터 사상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단절을 경험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우선 한 가지 사실부터 지적하자. 김항 자신도 와다 하루키가 모를 리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지만 와다 하루키는 이미 전후의 상징적 천황제가 미국의 정책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미국의 정책으로 쇼오와 천황의 전쟁책임은 추궁하지 않고 책임을 오로지 군부에게만 지운다는 방침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일본인에게는 일억총참회에서 출발하여 군부에게만 전책임을 지우는 것이 홀가분했다.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느끼고 자신들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맡아야 한다는 의식에서 너무 먼 상태”였다고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와다가 설마 김항의 지적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게 “군국주의자가 잘못 이끈 전쟁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련한 천황과 국민이라는 서사는 이미 1942년 시점에서 미국에 의해 고안된 심리전 전략”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와다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어째서 일본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일까. 이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나타난 와다의 현대사 인식 전체를 살펴보아야 한다.
와다 하루키는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1914년 이후의 세계사를 두 단계로 나누어 인식한다. 하나는 ‘세계전쟁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전쟁시대’의 해체의 결과로 나타난 ‘세계경제시대’이다. 와다 하루키는 러시아혁명에서 기원한 현실사회주의 체제는 세계전쟁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나타난 전시체제라고 주장한다. 이 전시체제와 그에 대항하는 미국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충돌한 역사가 바로 동아시아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전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미국은 세계전쟁시대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지만 소련은 시대의 변화를 모르고 소련판 베트남전쟁이라 할 수 있는 아프간 전쟁에 뛰어들어 체제의 동력을 소진한다. 결국 이 전쟁에서 패배한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세계전쟁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탄생한 전시체제가 변혁을 견딜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소련은 해체되고 미국도 세계전쟁시대의 후유증으로 점차 패권이 약해지기에 이른다. 와다는 이런 세계전쟁시대가 종말된 시대를 경제력에 기반한 세계경제시대라고 파악한다. 보다 효율적인 경제를 운영하며 비군사주의적 체제를 운영해온 독일과 일본이 이 시대의 주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와다는 독일과 달리 일본이 철저한 자기반성과 그에 기반한 정치철학에 따라 세계사에 있어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후방기지’로 편입되어 미국의 보호 속에서 모든 역량을 경제에 쏟아부어 세계적인 경제를 이루었을 뿐 스스로 어떠한 정치적 철학과 비전을 지니고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지역에서의 일본의 지위 또한 갖추지 못했다. 와다의 말을 옮기자면 “일본은 제2의 전후에 이루어야 할 것을 방치한 채로 있다가 제3의 전후에 마주친 것이다. 제3의 전후에 걸맞은 새로운 정신으로 제2의 전후에서부터 가지고 넘어온 문제를 해결해야만 새로운 시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전쟁책임과 피식민책임을 회피한 일본국은 세계경제시대의 모순인, 세계에서의 불균등 발전에 대항할 사상적•정치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세계경제시대의 모순으로 환경, 각국의 경제적 격차 등의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인류사 자체의 존망이 위태롭게 된다.
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바로 “우선 첫째로,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을 국민적으로 확립하고 그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시하려는 노력, 전후 보상의 노력을 시작”해야만 한다. 둘째는 영토 문제의 해결이고 셋째는 “헌법과 자위대의 관계에 대해 합의를 만들어낼 필요”이다. 셋째가 중요한데 와다에 따르면 “이 헌법말고는 일본국가의 바탕이 될 만한 것이 주어져 있지 않”다. “이 헌법은 역시 15년 전쟁을 통해서 일본국민이 획득한 것”이며 “그 헌법과 자위대의 관계를 조정”함으로써 “세계전쟁시대가 끝나고 앞으로는 군축이 기본적인 과제”가 된 이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 그는 “미국군대에 더하여 러시아•중국•한국•북조선의 군대와 교류를 추진하여 상호신뢰를 구축하는 가운데 본격적 군축”을 행해야 “진정한 의미의 세계전쟁시대의 밖으로 나갈 수 있”고 “일본은 새로운 시대의 과제와 맞서나갈 수 있”다고 인식한다. 이런 와다의 인식 속에서 북조선이 차지하는 위치가 명확해진다. 와다는 일본과 북조선의 화해,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평화 체제의 성립이야말로 세계대전쟁 시대의 완전한 탈피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그렇기에 와다는 동북아 공동의 집 구상에서 세계사의 주체로 한민족을 설정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실현의 주체로서의 한민족의 역할이 와다의 사상에서 중요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민족에 의한 세계전쟁시대의 완전한 마감과 세계전쟁시대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세계경제시대의 마감이야말로 새로운 유토피아, 동북아 공동의 집을 건설하여 세계사의 모순인 환경, 경제적 격차 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이 1992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한국어판은 1994년)은 와다의 사상적 연속성을 부정하는 김항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 김항은 1995년 위안부 문제에 개입하고 좌절하면서 그의 사상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로서의 사회주의>를 분석해보면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 나온다. 실상 김항이 1995년 이후의 사상적 변화라고 할 계기들은 1992년의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와다의 사상적 연속성을 담보한다. 다시 말해 와다 하루키는 ‘세계대전쟁시대 - 세계경제시대 - 동북아 공동의 집’이라는 세 단계의 현대사를 구상하고 있었고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평화헌법 문제는 이미 그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와다가 평화헌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주의와 식민주의가 착종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세계사의 2기인 세계경제시대조차 거스르고 1기인 세계대전쟁시대로 회귀하는 조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수주의로의 회귀”라 인식하는 김항의 주장은 와다 사상의 연속성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와다는 일본의 개헌이 군축이라는 기본적인 시대적 대세를 거스르고 있다고 인식하기에 평화국가를 강조하는 것이지 자신의 사상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문제를 세계전쟁시대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비판했으며 그것의 잔재를 처리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로 나아가려 했다. 그에게 있어 위안부 문제와 북조선 문제는 역시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처리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김항은 이런 연속성을 경시했다.
덧붙이자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김항은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지렛대로 삼아 동아시아 및 전 세계 차원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데로 초점을 이동”시켰다고 비판하는데 이 문제는 보다 복잡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지난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의 결과로 치유화해재단이 탄생했는데 김항과 서경식 등의 한일 지식인들은 이 위안부 합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김항은 이 글에서 박유하에 대해 비판하며 보편적 인류 규범이 식민주의와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김항의 주장이 옳다면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그토록 비판했던 그 피해자 분들이 치유화해 재단의 지원금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피해자 분들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인가? 일본의 사과와 그에 따른 배상을 받아들인 피해자들은 잘못된 것일까? 그걸 재단할 권리는 대체 누가 갖고 있는가? 화해치유재단의 보고에 따르면 2017년 7월 현재 생존피해자 47명 중 보상금과 사과를 수용한 36명 중 34명에게는 배상금 1억이 지급되었으며 사망피해자 유족들 199명 중 보상금과 사과를 수용한 65명 중 48명에게는 2천만원이 지급되었다. 물론 돈을 받았다고 해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100%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 분들 중에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금을 수용한 분들도 계시며 그 분들의 의사 또한 중시되어야 한다. 합의에 대한 부정은 피해자의 의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김항과 같은 지식인들이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생각을 해봤을지 의문이 든다. 혹여나 오해할 여지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재단이 할머니 분들에게 배상금을 받도록 강요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동의할 수가 없다. 우선 재단이 할머니 분들의 계좌를 알 수가 없다. 먼저 알려주고 신청해주셔야 비로소 그 계좌를 통해 입금하는 것이지 일부의 주장처럼 현금을 강제로 줄 수가 없다. 본인의 주체성이 전제되지 않은 보상금 지급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아시아기금 때도 배상금을 받니마니 하는 문제로 피해자 분들 간에 다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보다 조심스러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식인으로서의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항의 논문은 학술적 논문의 성격을 많이 잃었으며 김항 자신의 학자로서의 능력에도 의문을 품게 한다. 어떤 이의 말을 곡해하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증거로서 김항의 논문은 사료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End of res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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