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탐색
눈 떠보니 ‘아저씨’가 됐다, 진짜 문제는?
⑫ 1965년생, 이름 없는 남자
김석희 기사입력 2022-09-16 제142호
어릴 때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저씨’였습니다. 단순한 중장년 남성이 아니라 ‘개저씨’라든가 ‘꼰대’같은 멸시의 의미로 불리는 민폐스러운 존재로서의 ‘아저씨’말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지 못할 만큼 좁은 길에서 서로 조금만 물러서면 될 것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어깨를 부딪치며 혀를 차는 아저씨, 전철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붙일 줄 모르는 아저씨, 마트 계산대에서는 반드시 젊은 여성 점원 앞에 줄을 서서 아가씨가 계산하는 동안 뚫어지게 얼굴을 쳐다보는 아저씨, 항의 전화를 걸어서 콜센터 여성에게 욕을 하며 조롱하는 아저씨.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57세가 된 지금도 그런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저씨’였습니다.
자신이 아저씨가 되는 것이 아니라,환경에 의해 아저씨가 됨을 당하는 것입니다.
남성은 그것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중장년 남성이 태도를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역학구조를 바꾸려는 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50세를 넘으니 ‘위압감’ 풍겨 나와 하지만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좋든 싫든 나 자신도 아저씨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깨닫게 됩니다.
몇 년 전부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어쩐지 과장된 경어체를 사용하고, 몸가짐을 조심합니다. 예를 들면, 40세 무렵에 30세의 작가와 만나서 둘 다 여자 축구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럼 다음에 같이 보러 가죠.” “갑시다!”하는 식으로 분위기가 흘러갔는데,
중장년이 되면누구나‘아저씨’당하는사회, 개인의 변화도 중요하지만사회의역학구조를바꾸려는시도가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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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 를 넘기고 나자, 나는 똑같은 기분으로 “그럼, 같이 보러 가요”하고 말해도 상대는 “아,… 그러… 지요. 조만간, 시간이 맞으면…”하고 난처한 듯 애매하게 거절합니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아저씨의 문제는 자신이 아직 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라는 걸. 나이에 상응는 만큼 마음도 늙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이 젊은 것은 중요하지만, 젊은이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 쪽에서는 이쪽이 나이뿐 아니라 캐리어나 지위로나 거절하기 어려운 강제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50세를 넘으면 40대에는 없던 위압감이, 바라지 않아도 풍겨 나오는 것입니다.
가볍게 동등한 입장이라는 감각으로 하는 초대가 상대에게는 어딘가 명령처럼들릴 수 있습니다.
아저씨의 입장에 선 사람의 다수가 이 낙차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점점 그 존재가 부담이 되어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나는 회사나 조직에서 일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일하기 때문에 부하나 후배라는 사람이 가까이 없어서 자신의 ‘아저씨’성을 눈치채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늦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나는 이 현실이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 결과, 사람과 접하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특히 나보다 어린 여성과. 자신의 말과 태도가 언제 위압이나 폭력으로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아저씨’문제는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저씨화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일정 연령에 이르러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지위를 가지게 되면,그 남성의 언동은 자동적으로 권력행위가 됩니다. 자신이 아저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아저씨가 됨을 당하는 것입니다. 남성은 그것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중장년 남성이 태도를 바꾼다고 해결되는것이 아니라(아니, 뭐, 개인이 태도를 바꿔야 하는 예도 많이 있습니다만…) 사회의 역학구조를 바꾸려는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그 근본적인 원인은, 남성우위사회라는 것입니다. 결정권이 있는 지위에 여성을 좀 더 등용하는 일은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남성우위사회가 바뀌지 않습니다. 문제는 훨씬 뿌리 깊은 것입니다.
작년에 나는 넷플렉스에서 한국의 드라마 「D.P.」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탈주병을 추적하는 부대에배속된 청년의 괴로움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일본에는 한국과 같은 병역제도가 없지만, 나도 비슷하게 군대 같은 사회에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단한 이지메를 당한 것도 아니고, 드라마와 같은 심한 폭력을 당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가 살아온 환경은 군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가치관의 세계라고 느꼈습니다. 나 뿐만이 아닙니다. 적어도 일본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남성은 기본적으로 군대와 같은 가치관 속에서 자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체육회 활동’같은 특별활동의 세계관에 잘 나타납니다.
그 가치관이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폭력적이라는 의미로 좀더 강한 자가 가치 있다, 폭력적인 강인함이야말로 윤리다, 그것이 남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패배이며 약함을 보인 자가 폭력을 당하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군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가치관의 세계군대만큼 선명하지 않지만, 남성 젠더의 베이스에는 이 폭력 지상주의가 있고, 그 가치관을 무의식적으로키우는 세상의 일반적인 남성들은 모두 폭력의 가치에 묶여 있습니다.
「D.P.」의 세계가 분명하게 그리고 있듯이, 그 가치관 안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폭력의 정점에 있는 극소수뿐입니다. 대부분의 남성은 자신이 휘두르는 것 이상의 폭력을 당하고 견딥니다. 대부분의 남성은 남성우위사회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인내를 강요당하는 것이며, 거기에 좋은 추억 따위는 없습니다. 그 가치관 안에서 해소할 수 없는 괴로움은 보다 약한 자를 향한 폭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폭력 이외의 생존 방법을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으니까요.
폭력지상주의는 원한과 트라우마의 누적 위에 성립하며, 극단적으로 왜곡된 가치관입니다. 보통 남성우위사회는 군대에서 드러나는 폭력지상주의를 약하게 하여 널리 얇게 펼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의 연령을 거친 남성에게는 시스템적으로 보상처럼 아주 약한 권력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남성이라면 ‘아저씨’가 되는 구조입니다.
실제로는 이것이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형벌로조차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권력성은 필요 없으니 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장년 남성은 고립되고, 보다 심각한 원한을 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병역 문제가 있으니 남성들이 남성우위사회에서 사실상 얼마나 데미지를 입는지가 잘 보입니다. 그것이 지금 커다란 분열의 원인이 되는 거겠지요. 징병제가 없는 일본에서도 기본구조는 같습니다. 성(性)을 둘러싼 폭력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는 남성의 젠더 문제를 보다 꼼꼼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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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호주에서 호시노상의 글을 읽으니, 한국과 일본의 사회구조 (상하관계)가 얼마나 비슷하고, 호주와는 얼마나 다른가를 느끼게 하는군요. 호주에서는 상하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한국 일본에 비하면 약한 편이죠. 우선 존댓말이 없는 것도 있지만, 대학원생과 교수와의 관계가 친구관계같이 되니까요. 봉건세계가 아니라. 교수님이 먼저 드세요, 등은 없ㅈ디요. 대학 밖에도 같아요. 그렇다면 꼰대는 없는가?하면 국제비교로 보면 꼰대성이 약하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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