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7

(2) 손민석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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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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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SNS 계정을 철저하게 익명으로 사용하고 싶었지만 어떤 사람이 본명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신고하는 바람에 계정이 정지되어 결국 익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됐던 적이 있다. 황당했다. 실명과 같은 형태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계정이 정지되는 것도 황당했지만, 더 황당했던 건 그걸 신고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계정에 페이스북의 규정이 실명 사용인데 그걸 지키지 않았으니 자기가 그런 사람들만 찾아다니며 신고한다고 적어놓았다. 누가 그걸 왜 님이 신경쓰시나요? 라고 질문하자 그는 자기는 규정을 안 지키는 사람이 싫기 때문에 규정을 안 지키는 인간한테 엿을 먹이고 싶다고 답했다. 그 넘실대는 악의를 보면서 왜 저러고 살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이런 인간까지 이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차단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유형의 악의를 지닌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함을 느낀다. 굳이 저런 악의를 품을 필요가 없는데 품는 상황도 피곤하지만,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들을 건드려 규정만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규정이 원래 그렇다, 규정은 지켜야 한다 등의 흰소리를 늘어놓지만 사회 전체로 볼 때 경직성만 증가시키는 적폐 같은 인간 유형이다. 가끔 어떤 업체의 규정을 보면 대단히 세밀하게 이런 것까지 규제를 하나?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서술된 경우를 만나게 되는데, 그런 경우는 십중팔구 '진상'이 한번 다녀갔을 확률이 높다. 진상이 규정의 헛점을 노려 자기 이익만 추구하다가 결국 규정의 세밀화로 다음 이용자만 곤란해진 것이다. 좋은 일일까?
 나는 법, 규범 등은 최대한 느슨하게 존재하고 그 느슨한 지점을 관습, 사회적 관행 등이 채우는 게 좋다고 본다. 사회주체들끼리 정해서 최대한 유연하게 상황에 맞게 변화할 수 있는 게 제일 좋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사회' 자체가 원자화된 개인들의 각자도생으로 이뤄져 있어서 계약적 규범을 만들어낼 "사회적 주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규범을 만들어놓아도 한 개인이 와서 그 규범의 권위, 근거 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 많이 보인다. 그러니 심지어 집단으로 조직된 노조 등의 사회적 주체들조차도 협약의 상대를 믿지 못해 법제화 해달라는 무리한 요구들을 남발하지 않았던가. 이런 원자화된 개인들을 어떻게 하나의 사회적 주체로, 공동의 권위와 규범으로 조율할 수 있을 것인지가 예전부터 내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 중 하나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중앙집중적인 국가주의적, 파시즘적 인간형으로 주조된 한국인을 어떻게 공동체적 인간형으로 바꿀 것인가, 항상 고민하는 주제이지만 대안은 없다.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대안을 내놓는 건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사회통합을 이루는 기제보다는 되려 분열을 강화시키고 사회적 비용을 증대시키는 역할"만" 한다는 점이다.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내가 사는동안 정치가 사회통합을 이뤄낸 적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글을 쓰다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1987년 이후 한국에서 정치가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사회적 통합을 이뤄낸 경우를 떠올리기가 어렵다. 떠올려지지가 않는다. 혹시 그렇다고 생각되는 사례가 있으면 제시해주시길 바란다. 천안함 장병들에 관한 여러 글들을 보니 더 그런 생각이 강해진다.
 한쪽에서는 패잔병이고, 문재인 대통령을 건든 대역죄인 취급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세월호에 가려진 희생자이고 어쩌고.. 이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군 내부의 성폭력 피해자에게 조문한 것을 두고 또 천안함 장병들한테는 왜 그러느냐, 반대로 패잔병하고 같냐 등등의 말로 탐라가 어지럽다. 기껏해야 여기서 나올 수 있는 최대한의 통합적 언어는 공동체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다 순직하신 분들이니 좋게 평가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서사들뿐이다. 이 언어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말을 잃고 침묵하게 된다. 패잔병이라 비하하는 것도, 세월호 등에 가려진 희생자라는 것도, 공동체 수호를 위해 순직한 명예로운 군인이라는 것도 모두 내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개중에 2030대들은 그 처지에 동질감을 느끼며 북조선을 증오하는 것 같은데 나는 사실 그 증오도 별로 와닿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좌파로서의 나의 정체성에서는 이 순직 군인들을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국가주의적, 반공주의적, 반북주의적 언어나 정치적 편견으로 오염된 언어가 아닌 그 어떤 제3의 언어가 있지 않을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국가를 위해 죽은 군인들은 부르주아적 질서에 복무한 이들이니 찬양할 필요도 없다,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예컨대 북조선이 한국과 달리 이순신을 성웅이 아니라 봉건왕조에 복무한 반역도당으로 보는 관점에는 그 의미와 취지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더라도 아무래도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설프게 북조선을 전체주의 등으로 평가하며 자유를 위해 복무하다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동의하기 어렵고. 
 언어들이 분열과 갈등을 낳는 상황에서 내 언어가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고 입안에만 맴돌고 있는 이 상황이 정말 어렵다. 차라리 좌파가 헌법을 제정했더라면, 그래서 한국이라는 근대국가를 좌파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더라면 문제가 대단히 쉬워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근대 부르주아적 국가로부터 어느정도 거리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사회분열만 낳는 이 언어의 오용들을 어떤 언어로 배제하고 사회통합을 이뤄낼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현명한 이들의 가르침이 절실하다.
3 comments
김서룡
저도 비슷한 고민을 했습니다. 천안함 생존 장병을 보면서 설령 지금껏 학습한 언어와 세계관과 결이 다르더라도, 그들이 기꺼이 사회 속에서 적절히 회복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떤 언어라도 사용해서 위로하면 좋겠다구요. 지금껏 제가 배운 것으로는 그들에게 다가갈 적절한 언어가 없었는데, 규정하거나 언어화할 수 없어도 일단은 다가가고 위로하고 손을 잡는게 맞지않을지, 그게 정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지향해야 하는 일 아닐까 하는 고민입니다.
 · Reply · 17 h
손민석
김서룡 맞는 말씀이십니다. 다만 제가 정치인이 아니다보니 제 정체성에 맞는 언어를 찾으려 노력하는데 참 쉽지가 않네요.. 그 빈공간을 현실의 언어들이 너무 쉽게 파고 들어 참 문제입니다.
 · Reply · 16 h
김서룡
손민석 예 그쵸ㅠㅠ 정치는 다가가면 되지만, 학문은 언어가 도구다보니. 빈공간에 현실의 언어가 파고든다는 말씀이 참 와닿네요.
과문하지만 저는 천안함 생존장병을 국가적 폭력사태의 피해자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 어떨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국가주의적 시각을 벗어나면서, 공동체적 회복과 같은 개념에 접근할수있지 않나 싶어서요.
 · Reply · 16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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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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