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연구 제61집|233~262쪽|2021.5.
모스크바에서의 한국사 연구* -소련 시기(1917~1991)를 중심으로-
1)
박노자**
1. 들어가며
2. 제정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과 ‘한국사’ 연구의 기원
3. 소련 시기 모스크바에서의 한국사 연구:
맑스주의 이론과 국가의 제도 사이에서
4. 결론: ‘모스크바 학파’의 멸망?
<차 례>
[국문초록]
제정 러시아 시기 이후로는 소련, 그리고 소련 몰락 이후의 러시아의 한국학,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한국사 연구는 수백년에 걸친 긴 여정을 걸어 왔다. 한국사에 대한 최초의 소개는 17세기말에 북경으로 간 러시아 사절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한국사 관련 최초의 원전 러역은 19세기 초반에,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 (東夷傳) 번역과 함께 이루어졌다. 청일, 러 일 전쟁 시기에 한국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1920-30년에 주로 한인 사회 주의자들에 의해서 식민지 자본주의 연구나 노동․농민 운동 연구가 진행됐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1940년대말 이후의 ‘모스크바 학파’는 한편으로는 제정러시아 ‘동방학’의 전통대 로 삼국사기 등 원전 번역 사업을 계속 진행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식민지 시대 맑시스트 연구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근대 자본가 계급의 ‘종속성’ 문제부터 시작해서 고대사에 있어 서의 ‘사회-경제적 형태’의 문제까지, 맑스주의의 ‘보편 법칙’을 감안하는 한국사 전반의 해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8 S1A3A2075204). 이 논문에 대한 심사를 진행해주신 세 분의 심사 평가자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해외 한국학을 조명하는 이 번 특집을 만들어주신 인하대 한국학 연구소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 본명 티코노프 불리디미르(Vladimir Tikhonov), 오슬로대학교 문화연구 및 동방언어학과 교수, 서 울대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초빙연구원
석 작업에 야심차게 들어갔다. 이 작업의 주요 결론들인 ‘식민지형 예속 자본주의론’이나 ‘고 대 한반도의 국가적 봉건제론’ 등은 사실적 근거가 잘 구비된 결론이라고 볼 여지가 크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비서구를 타자화시켜 그 ‘열등성’을 부각시켰다면 ‘모스크바 학파’의 한국사 연구의 중점은 다름이 아닌 한국사의 ‘보편성’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리엔탈리 즘에 비교적 젖지 않은 연구 풍토라 할 수 있지만, 소련 몰락 이후에 ‘모스크바 학파’도 급속 한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
[주제어] 오리텐탈리즘, 타자화, ‘모스크바 학파’, 미하일 박, 맑시즘, 보편주의
1. 들어가며
에드워드 사이드 (1935~2003)의 오리엔탈리즘[1])이 1982년에 출간한 이 후로는, 서방 국가들의 ‘동양학’의 역사적 계보는 대대적 반성의 대상이 됐다. 이 반성의 주된 방향은, ‘동방학’이 제공해온 ‘동방’에 대한 ‘지식’과 그 ‘동방’을 침략의 대상으로 삼아온 서방 ‘권력’ 사이의 오래된 유착․결탁의 관계이었다. 침략에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의 제공을 넘어서, ‘동양학’은 역 사적으로 침략의 주체들이 필요로 했던 ‘담론’까지 제공해 침략과 식민 지배 를 위한 지적인 인프라를 만들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 흔히 아는 근대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에 대한 그 악명 높은 ‘식민 사관’이나 천년에 가 까운 송나라 이후의 중국의 역사를 ‘정체성(停滯性)’ 위주로 파악한 점[2]) 등 은 서방의 ‘동양학’이 맡아 온 역할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경우, 그리고 제정 러시아의 영토나 일부 관료적 통치 방 식을 계승했으면서도 이념적으로 제정 러시아를 부정한 것부터 시작된 소련 의 경우는 어땠는가? 비록 세계 체제의 준주변부에 위치하고 있었지만,[3]) 러 시아는 엄연히 대대적인 ‘주변부 세계 침략’의 주체이기도 했다. 사실 일본과 의 ‘침략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는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는 러시아의 제1차 혁명 (1905-7년)의 기폭제가 되는 만큼 이 침략의 역사는 러시아 국내 정치 로서는 중추적으로 중요하기도 했다. 소련은 이념적으로 제정 러시아 시대의 침략사를 부정한 것부터 출발했지만,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어 또 하나의 제 국형 민족/국민 국가로 재편된 것도 이미 학계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4]) 이 논문에서 논증하려고 하는 것은, 한국사 연구로 대표되는 러시아/소련 의 ‘동양학’이 서방의 그것과 어떤 면에서는 일맥상통했지만, 또 어떤 면에서 는 다르기도 했다는 점이다. 계통적으로는 물론 제정 러시아의 ‘동양학’은 서 방과 그것과 그 뿌리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밑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서방 ‘동양학’의 기존 연구 성과를 크게 참고하기도 했고, 또 일부의 경우에는 그 논저를 불어나 독어로 발표하기도 했다. 서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수는 외교관 내지 선교사 출신이기도 했다. 한데 소련 시기에는 결정적인 ‘단절’과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1920~30년대 한국사 연구를, 대개 코민테른 계통의 조선 혁명가들이 맡았으며, ‘반제국주의’ 차원에서 진행했다. 전체적으로도 특히 1920년대의 소련의 ‘동양학’에서 과거의 ‘동양학’이 제국주의 침략에 ‘봉사’했다는 점에 대한 활발한 자성(自省)의 운동이 벌어졌다.[5]) 본문에서 논증할 것처럼, 전후의 모스크바에서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비록 소련 지도부 의 ‘국책’과 합치되는 방향으로 그 논지를 전개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국사 전개의 흐름을 맑스주의적으로 이해되는 ‘세계 보편의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보편주의적 태도도 역력하게 보였다. 즉 서방의 ‘동양 학’ 일반과 상당히 다른 면모도 내비쳤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의
차원에서는 본고에서는
제정러시아에서의 한국사
연구의 뿌리,
소련 시절의
한국사 연구의
상황, 그리고 특히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한국사 연구의
성과를 중점적으로
조명할 것이다. 이
조명을 바탕
으로 해서
모스크바에서의 한국사
연구의 주요
특징과 세계적인
한국사 연구
에의 기여,
그리고 그
학술적 전통의
‘계승’의 문제를
논할 것이다. 러시아의
한국학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는 이미
몇 편의
개괄적인 연구
논저들이나 특정
러시아 연구자들이나
한국사의 특정
사건에 대한
러시아 측
저술에 초점을
맞춘 논문
등이 출간된
바 있다.6)
그렇지만, 비록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
‘모
스크바 학파’를 키워낸
미하일 박(박준호, 1918~2009)과의 인터뷰7)가
일찍 국내의
영문 학술지에서
실린 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학파’의 기
원과 역사
연구의 전개,
그리고 차후
계승의 문제를
다루는 전문적
논문은 아
직 나오지
않았다. ‘모스크바 학파’의 구성원들이
이 문제를
다루긴 했지만, 스스로의
‘역사’보다 ‘현황’과 ‘미래’에 더
중점을 두는
논저를 주로
발표했
다.8)
이와 같은
기존 연구의
공백을 메꾸어, 모스크바에서의
한국사 연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정리해보려는 것은
본고의 의도다.
2. 제정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과 ‘한국사’
연구의 기원
중국이나 일본,
조선을 ‘바다’를 건너
접하게 된
서방의 열강인
영, 미, 불, 독 등과
달리 제정러시아의
‘동점(東漸)’은 ‘대륙’을 통해
이루어졌다. 주요 수출
품목인 ‘모피’를 찾아서
러시아의 농민과
사냥꾼, 그리고 관료들은
이미 17세기 중반에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게 됐다.
‘감계(勘界)’, 즉 러․중
대륙 국경을
정하는 문제와
육로 무역의
문제 등은
두 거대한
제국 사이의
‘외교
적 접촉’을 가져다주었다. 몰도바
출신의 러시아
외교관인 니콜라이
밀레스
꾸 스파타리(Nicolae Milescu Spathari, 1636~1708)은 1675~8년에 러시아
6)
유. 와닌, 「현대 러시아 한국학의 탄생과 반전」, 러시아의 한국 연구: 한국 인식의 역사적 발전과 현대적 구조, 풀빛, 1999, 119~156쪽; 권세은, 「러시아에서 한국학의 현황 및 과제」, 아태연구 13-2, 2006, 119~137쪽; 기계형, 「러시아의 한국전쟁 인식에 나타난 변화: 전쟁 발발의 원인을 중심으로」, e-Eurasia 25, 2010, 2~6쪽; 구자정, 「쿠르바노프의 한국사강의를 통해 본 러시아 의 한국인식과 자기인식」, e-Eurasia 25, 2010, 7~10쪽 등 참조.
7)
Vladimir
Tikhonov, “An Interview with Mikhail Pak”,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Vol.
5, No. 2, 2002, pp.133 ~161.
8)
대표적으로는 Tatiana Simbirtseva, “Modern Korean Studies in Russia”, Journal of
Korean Culture, Vol. 10, 2008, pp.81~100 등 참조.
사절단의 단장으로서
북경을 방문하여, 그
방문의 결과를
중국과 그
주변 지
역에 대한
본격적 저서로
정리했다. 그 저서의
한 꼭지는
바로 조선을
다루 었는데, 주로
서구의 야소회(耶蘇會) 선교사들의
기존의 조선
지리 관련의
저술에 의존하는
정도이었다.[6])
야소회 선교사들이
라틴어에 능통하는
스파 타리의
주요 정보원이었다.[7])
즉, 이 단계에서는
러시아의 ‘동양학’의 맹아는
어디까지 서구
‘동양학’의
궤도를 따르고
있었다.
서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러시아
‘동양학자’들은
대개 학구적
지 향의
선교사나 외교관들이었다. 그
연구가 한국사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사
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하자면
가장 대표성이
있는 두
명의 19세 기~20세기초의 외교관/선교사
겸 ‘동양학자’를 언급할
수 있다.
첫째, 선교 사이었던
니키타 야코블레비치
비추린(Nikita Yakovlevich
Bichurin, 수사로 서의 이름은
Iakinf, 1777~1853)이다.
1808-21년에 북경에서 상주했던
학 구적인
정교회 수사(修士)이었던 비추린은
유교 등
중국의 정신
문화에 대해
서도 큰
관심을 보였지만, 한문
실력을 쌓아
중국 역사와
지리 등에
대한 기
본적인 1차 자료의
러어 번역에
착수하기도 했다.
조선어 공부까지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비추린은,[8])
중국의 지리와
경제 통계
등을 다루는
저서에서 도
‘조선국’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는
역대 중국
역사 기록의
중앙 아시아
등의 ‘외국’에 대한
전(傳)이나 지(志)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삼국지
(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까지 러역․주해(註解)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서구 세계의
‘동양학’의
수준으로서는 상당히
선구적인 업적이었다.
둘째,
한국사에서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로 잘
알려진 칼
웨버(Carl
Friedrich Theodor von
Weber, 1841~1910)를 들 수
있다. 웨버에 대해
러
시아와 한국,
양국에서 나름대로
연구된 바
상당히 있지만,12) 대개
기존의 연구의
초점은 그의
학술 작업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등 그가
주도적으로 개입한
각종의 외교․정치적
장면에 맞추어져
있다. 한데 그는
외교관임과 동시에
상트-페테르부르그 황립
대학의 동양학부를
1865년에
졸업한 ‘중국 학자’이기도 했고,
한문에 능통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마도 한학에
그가 능통
했다는 사실은
그와 고종
황제 사이의
‘관계’
구축에 심리적으로
일정하게 역할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본인이
직접 ‘참여 관찰’해온 고종
시대의 한국의
정치사에 대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록도
남겼지만,13) 이외 에는
한국어, 그리고 한국어의
한자음에 대한
자신의 원고도
출판한 바
있었 다.14)
어문학과 역사,
정치에 대한
관심들을 동시에
겸비하는 것도
그 당시
의 서구
선교사 내지
외교관 겸
학자와 웨버
사이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그의 일부
중국학 관련
저술은 불어
등의 서구
언어로 돼
있기도 했다.15)
그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그 당시
제정 러시아의
‘한국학’의
모태적 형태는
제국주의 전성
시대 서구의
‘동양학’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제정러시아는
비추린 이후로는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된, 서구
세계에
서도
명망이 높은
중국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16) 역사
연구를 포함한
조선 연구는
1917년
이전까지는 걸음마
단계이었다. 특히 1905년에 일본에
패배를 당해
한반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망을
당분간 포기해야
했던 사정,
그리고 이
사정으로 인한
한반도에 대한
관심의 저하는
중요한 원인
중의
12)
Пак Б. Б., Российский дипломат
К.И. Вебер и Корея. М., 2013; 김종헌, 「러시아 외교관 베베르와 아관파천」, 역사비평 86, 역사비평사, 2009, 365~394쪽.
13)
Вебер К.И.
《Записка
о Корее до 1898-го года и после. С предисловием О. Суковицыной》 Российское корееведение.
Альманах. Вып 2., М., 2001, С. 128~148.
14)
Вебер К.И.
Пробная транскрипция всех городов Кореи (на правах рукописи), СПб., 1905; О
корейском языке и корейском чтении китайских иероглифов (на правах рук описи), СПб.,
1908.
15)
Ch. de
Waeber Index de la section géographique de la grande encyclopédie chinoise
T'ou-chou-tsi-tch'eng, Saint-Pétersbourg: Impr. de l'Académie impériale des
sciences, 1907 등 참조.
16)
Richard
N. Frye, “Oriental Studies in Russia,” In Russia and Asia: Essays on the
Influence of Russia on the Asian Peoples, Wayne S. Vucinich, ed. 30-51.
Stanford: Hoover Institution Press, 1972.
하나이었다. 대체로는 청일
전쟁, 그리고 러일전쟁
그 당시에는, 부분적으로
한반도에서 수행되는
전쟁이 야기시킨
조선에 대한
관심이 잠시
고조되곤 했
다. 그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군 첩보계
관계자나 외교관
등이 조선의
근 세사와
현황을 조명하는
책을 내곤
했는데,[9])
전쟁의 종식
이후에는 이런
관심도 점차
시들어 갔다.
아마도 이
시기에 나온
한국의–주로 근대
이후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저서는, 니콜라이
와실례비치 큐네르
(Nikolai Vasilyevich
Kyuner, 1877~1955)라는 중국학과 일본학, 그리고
만 주학,
티베트학까지 겸비할
수 있었던
당대 ‘동양학’ 석학의, 일제에 의한
식 민화
이후의 한국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 한국
역사와 현황
관련의 개설서이
었을 것이다.[10])
그러나 ‘식민지’ 상황을 서술했던
이와 같은
저서들은, 제정 러시아도
결코 거리를
두지 않았던
‘식민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현저히 결여했다. 이
점까지 포함해서
여기까지의 러시아
한국사 연구의
역 사를
보면, 사이드가 전개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러시아의 ‘동방학’도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국을
오히려 흠모,
선망해서 당대인의
빈축까지 산
비추린과 같은
경우에는 이
‘오리엔탈리즘’은
부정이 아닌
긍정 위주일
수 있었지만,[11])
좌우간에 ‘동양’은 ‘근대’의 세계와
본질적 으로
이질적인, ‘서방’과 합쳐질
수 없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타자’로 설정돼
있었다. 하지만, 1917년의 혁명에
의해서 이
상황은 대대적으로
역전됐다.
3. 소련 시기
모스크바에서의 한국사
연구:
맑스주의 이론과
국가의 제도
사이에서
1)‘코민테른 한인’들의 연구 활동
사회주의를 지향한
1917년의
혁명이 초래한
변화는 일차적으로
제도적이 었다.
종교(정교회)가 국가로부터
분리돼 국가에
의해서 이념적으로
부정됐 기에
‘선교사
겸 학자’라는 학자의
유형 자체가
소멸됐다. 학구적 외교관들이
종종 나타났지만, 외무
부문 관료
사회의 상층부를
과거 지하
혁명자 출신들
이 장악했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1930년대말까지만
해도 차라리
‘혁명가’에
더 가까웠다.[12])
‘대학’이나 ‘과학원(소련 과학원, Akademiya Nauk)’의
영역 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니콜라이 큐네르와
같이 ‘전통적’ 방식의 한국학
연구 를
계속 계승․발전하는
과거의 일부
전문가들은 남아
있었지만,[13])
‘한국학’ 분야에서는 그들은
소수이었다. 무게의 중심은
코민테른 계열의
새로운 기구
에 옮겨지고, 거기에서
종사하면서 한국사와
관련된 글을
남긴 거의
모든 혁
명가들은 재소련
고려인이나 식민지
조선으로부터의 망명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에 의한
역사 서술은
자연히 근대사, 그리고
식민지 사회․경제나
노
동․농민 운동
중심이었다. 남만춘(Pavel Nikiforovich Nam, 南萬春, 1891 ~1938)의 압박
받는 고려(러어판은 1925년, 한국어 번역은
1926년에
각 각
출판됐다)는 대표적으로
한국 근대사의
전개에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을
적용해 식민지
조선을 ‘일제의 원료
제공지와 일제
내지 완제품의
포획 시장,
그리고 일본
금융 자본에
초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종속
시장’으로 정의했
다.[14])
그의 이와
같은 작업이
나중에 국내의
배성룡(裵成龍, 1896~1964)이 나
박문규(朴文奎, 1906~?), 이여성(李如星, 1901~?) 등 맑스주의자들에게
계승돼 우리가
현재 익히
아는 ‘식민지 수탈론’의
기반을 이루었다. 남만춘
이외에도 1920~30년대에 조선
공산당의 주요
간부 출신의
망명객인 양명
(梁明, 필명은 이강,
1902~?)과 연해주 고려인
출신의 최성우(崔成宇, 1898 ~1937) 등은
조선의 노동․농민
운동과 천도교의
기원과 교리,
구성, 역할, 그리고 ‘민족 개량주의(온건
민족주의)’ 세력의 사회적
배경과 이념
등에 대
한 일련의
중요한 논문들을
남겼다.[15])
그러나 대부분의
고려인 혁명가와
망 명객들이
거의 예외
없이 스탈린의
대숙청에 1936~1938년에 희생되는
바람 에[16]) 이들의 코민테른
계열의 ‘혁명적 한국학’은
비록 후대를
위해 중요한
전통을 남겼지만, 학술적으로
보다 심화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2) ‘제도’로서의 1945년 이후
‘한국학’의
설립과 ‘모스크바 학파’
그 외국인
활동가의 다수를
이미 1936~8년 숙청에
잃은 코민테른은, 1943년에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코민테른의
해산이 소련에서의
‘세계
혁명’ 을 지향했던
시대가 이미
종언을 고했음을
대내외적으로 선언한
거나 마찬가
지였다.[17])
한데 급속히
국민국가화(化)의 과정을
밟고 있었던
소련은 ‘혁명’ 을 ‘국익 증진’으로 대체했지만, ‘한반도’는
1945년8월 이후로는
이 ‘국익’에 있어서는
매우 중심적
역할을 갖게
됐다. 한반도의 해방,
그리고 미․소
분할 점령의
과정에서는 그
북반부는 소련
영향의 자장으로
흡수됐으며, 1946년 중후반
이후로는 소련은
거기에서 ‘민주 개혁’을 진행하면서
점차 소련을
모 델로
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착수하려 했다.[18])
냉전이 깊어지고
‘분단’
영 구화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1946~48년
동안에는 한반도
북반부에 대한
소련 의
국가적 ‘관심’도 장차
장기적이라는 판단도
함께 내려지게
됐다. ‘국익’ 차원의 ‘관심’이 장기적인
만큼 전문가
양성이 시급해지고, 그
전문가 중의
일부는 ‘현재’를 설명해주고
합리화하는 ‘과거’, 즉 ‘역사’의 영역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점차
확실해져 갔다.
스탈린의 치하에서
탈(脫)혁명화된 소련에
서는 전문가
양성 및
전문 지식
생산의 역할을, 제정
러시아의 전통대로
‘국
립 대학’으로 재편된
과거의 ‘황립 대학’인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그(레 닌그라드) 대학,
그리고 소련
과학원이 된
과거의 황립
과학원이 맡았다. 차
후 모스크바
국립대와 합쳐진
모스크바 동양학
대학에서 이미
1945년에,
그 리고
레닌그라드 국립대에서는
1947년에
각각 한국학
전공으로 신입생을
선 발해
본격적 수업에
착수했다.[19])
본 논문의
주안점은, 이렇게 해서
설립된 소련의
새로운 한국학의
틀 속에서
특히 모스크바에서의
한국사 연구가
어떻 게
이루어져 갔는가에
맞추어져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사
연구를 포함한
한국학의 중심은
1917년
이전처럼 다시
한 번
대학과 과학원으로
돌아갔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인적
구성은 획기적
변화를 겪었다. 새로운
한국사 연구의
중심 인물이
된 미하일
박 교수에게는
소련이라는 ‘국가’ 못지 않게
‘민족’이나 ‘혁명’, 그리고 ‘한국사에 대한
보편 적인
맑스주의적 이해’가 중요했다. 고려인
3세인
미하일 박의
가정은 최재
형(崔在亨, 1860~1920) 등 민족
운동 지도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 며,[20])
그의 아버지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스탈린의
대숙청에 희생됐
다. 미하일 박
자신은 상해파
공산당의 주요
운동가이자 국학자인
계봉우(桂奉瑀, 1880~1959)로부터 1942년 카자흐스탄으로의
전시 피난
시절에 한문
과 한국사로
개인적 수업을
받아[21]) 그 역사
인식의 상당부분을
계승하기도 했다.
미하일 박은
대숙청 이후에는
스탈린의 탄압으로
문화 소멸의
위기에 몰린
고려 민족의
자(自)역사 의식을
북돋우고 강화시키기
위해 한국사에
인 생을
바치기로 하여,
1947년에 박사
학위 논문을
통과시키고 1949년에 모스
크바 국립대학
역사 학부의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거기에서 한국사를
전공 하려는
1기의
학생들을 그
해에 선발하게
되었는데,[22])
그들과 그
후배들, 그 리고
미하일 박의
영향을 크게
받은 타(他)대학 출신의
후배들은 ‘미하일 박
학파’, 내지 ‘모스크바 학파’의 핵심
집단을 이루었다. 3) ‘모스크바
학파’의 개화기
연구
이 학파의
주요 관심사들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1930년대
양명이나 최성우
같은 ‘코민테른 한인’의 연구
작업의 주요
방향 중의
하나는 ‘민족 개량주의’, 즉
점차 친일화되어
가는 ‘온건파’ 민족주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계열, 안창호/흥사단과 수양동우회
계열 등)에 대
한 비판적
해부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통일전선’에서의 파트너라기보다는
일제의 영향하에
있는 경쟁적
조직에 더
가까웠다. 미하일 박의
애당초의 관심사는, 이와
같은 ‘친(親)제국 부르주아
집단’의 역사적
기 원이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는
그래서 갑신정변과
그 주역인
개화 당으로
정해졌다. 그가 차후
식민지 시기의
친일 관료나
기업인의 역사적
‘선
조’로 인식됐던
개화당이 ‘일제의 대리인으로
나섰다’라고 주장했으며, 나아
가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받는
주변부 국가에서는
근대 지향적
개혁을 추구하
는 관료
세력이나 부르주아
세력들이 불가불
‘매판화’되어
갈 수밖에
없다고, 세계사적 입장에서
이 결론을
보편화시켰다.[23])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민족
내부의 적으로
생각했던 식민지
시대 ‘친일 엘
리트’의 이와
같은 계보
만들기에 대해서는, 1960년대
초반, 중․소 분쟁
이 후
북․소 관계가
다소 멀어졌을
때에는 북한의
학자들이 대대적인
반박에 나섰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개인 주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미하일 박
의 학위
논문이나 논저들이라기보다는
‘국가적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
소련 과학원이
출판해온 세계사
시리즈(전 10권)32)에서의, 미하일 박과
그 제
자들에 의한
이와 같은
서술들이었다. 북한 사학자들도
일제 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을 이었다고는
할 수
있지만, 1950년대 중반
이후, 보다 자주적
인 국민
(‘인민’)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김일성에게는
개화당의 ‘친일성’ 여 부보다는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초기
담지자로서의 개화당의
근대주의적 긍정성은
더 중요했다. 김일성이
그 때부터
그리기 시작한
한국사의 새로운
‘큰
그림’에서는 그
자신이 이끌었다고
보는 ‘사회주의 혁명’의 배경에는
바 로
개화당의 ‘부르주아 혁명’의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33) 따라서
1963년에
북한을 대표하는
사학자라고 할
김석형(金錫亨, 1915~1996)과 김희일, 손영
종 등은
소련판 세계사의
‘왜곡과
오류’를 준엄하게
비판하면서 미하일
박 의
생각과 정반대로
갑신정변의 주역들의
‘애국성’과
부르주아 개혁의
구상’, 그리고 정변
과정에 있어서의
‘민중의
참여’ 등에 중점을
두었다.34) 이렇게 해서
근대사 서술의
핵심적 포인트에
있어서는 ‘모스크바 학파’와 북한
사학 의
입장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연구 수준이
높아지고 자료
파악이 깊어짐에
따라 갑신정변에
대한 ‘모스 크바
학파’의 시각에
있어서는 점차
다양한 늬앙스들이
생겼다. 예컨대 1970 년대 초반에
미하일 박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후배
사학자 중의
한 명인
갈
리나
댜가이(Galina Davydovna Tyagai,
1922~2006)는 개화파를 ‘봉건 시기
후기의 진보적인
경향인 실학’과 연결시키는
한편 개화파의
계통을 이은
것
32)
Жуков Е.М., ред., Всемирная
история в 10 томах. - М., 1955~1965.
33)
신복룡, 「北韓 史學에 나타난 甲申政變의 吟味」, 한국정치외교사논총 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85,
61~90쪽.
34)
Ким Сэк
Хен, Ким Хи Ир, Сон Ён Дён. О серьезных ошибках в изложении истории
Кореи во “Всемирной истории” изд.
Академии наук СССР. Пхеньян: Изд-во литератур ы на иностранных языках, 1963,
C. 29~33. 이 러어 소책자는 김석형, 김희일, 손영종, 「《전 세계사》(쏘련 과학원 편) 조선 관계 서술의 엄중한 착오들에 대하여」, 력사과학 5, 력사연구소, 1963, 5~26쪽의 번역본이다.
으로 판단되는
독립협회나 그
후의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부르주아
민족주 의의
맹아적 형태’라고 기본적으로
파악하면서 이들이
비록 제국주의
이데올 로기에
포섭된 상태에
있으며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저항에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근대
민족 국가의
건설을 지향한
애국자들이었다고, 보 다
균형 잡힌
평가를 내렸다.[24])
실학-개화당-독립협회-애국계몽운동과 같
은 계통적
파악에 있어서는
같은 시기
북한 사학의
영향도 감지할
수 있었다. 미하일
박의 평가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조금씩 복합적이며
포괄적인 것
으로 변해
갔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이미
남북한, 그리고 구미권
연구 성과
를 다분히
섭렵한 그는
개화당의 성격에
있어서도 근대
민족 국가
지향을 지적한
한편, 그 후속
조직으로 파악되는
독립협회에 대해서도
‘대중
집회의 문화를
발전시키며 근대적인
기본적 자유권, 그리고
국가적 자강을
지향한 조직’이라고 서술하면서
그 ‘친미․친서구적이며 반러시아적
성격’을 동시에
지적했다.36) 즉, 제국주의 침략을
받는 세계
주변부에 있어서의
근대 지향적
인 관료․부르주아
운동의 불가피한
일정한 ‘매판성(性)’에 대한
그의 애당초
의 고민들을, 그가
2000년대에도
끝내 버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이와
같은 고민들을, ‘유산계급의
민족주의’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
려는 조선
공산당 논객들의
후계자로서의 ‘극좌성’으로만 이해해도
될 것인
가? 그렇지만 않은
것이고, 미하일 박과
그 제자들이
애써 지적하는
근대 한
국 민족주의
전통에 있어서의
그 ‘반제(反帝) 의식과 운동의
한계성’은 충분
히 사실에
기반을 둔
하나의 해석틀로
볼 여지가
크다. 미하일 박의
직접적 제자는
아니었지만, 미하일 박과
비슷한 사학적
궤도를 따랐던
동류의 고려
인
사학자 보리스
박(Boris Dmitrievich Pak,
1931~2012)이 밝혀진 것처럼, 실제로
김옥균은 일제의
지원에만 의존한
것도 아니었다. 1886년,
일본 정부
에 의해서
오기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로 유배
가기 직전에
그는 주(駐)일본 러시아
임시 대리
공사에게 ‘러시아의 보호’,
그리고 본인의
블라디보스토크 로의
이주에 대한
허가를-별 성과
없이-요청하기도 했다.37)
즉, 개화당은 반(反)청 입장에
서서 국민
국가 만들기를
지향했지만, 고종 정권의
‘이이제
이(以夷制夷)’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 반청
전략도 자국의
힘보다 타국
의 힘을
빌려 추진해야
했던 것은
개화당을 포함한
그 당시
조선 정치인들의
(어떤
면에서는 불가피한) 한계이었다. 독립협회의
경우에는, 그 주도
세력이 된
개화당의 후계자들이
‘독립’을 열강이
보장해주는, 불평등 조약의
테두리 안에서의
주권 유지
정도로 인식한
것이나, 그 주역들의
매우 강한
친미적 태도
내지 일본에
대한 의존
성향 등에
대해서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
학계에서도 연구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38)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하
지만, 그 당시
계몽주의적 매체들의
상당수가 황성신문처럼
일본발(發) 동 양주의, (묵시적으로
일본을 맹주로
설정한) 황색인종 단결론
담론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해
일제 침략
심화의 현실을
간과한 것도
최근에 국내
학계에서 도
인정한 사실이다.39) 조선
내지 대한제국
정부 못지
않은 한국
개화․계몽 운동
주도층의 세계체제적
내지 지역적
차원에서의 비교적
취약한 입장으로
인한 이와
같은 한계성을
일찍 지적해
‘매판성’으로
개념화한 모스크바
학파 의
논리는, 어떤 면에서는
‘문명개화’의
계통을 이은
한국 민족주의
전통에 대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반성적인 최근
국내 학계의
분위기를 예견했다고
도 할
수 있다.
4) ‘모스크바 학파’의 일제강점기 자산계급 연구
‘애국계몽운동’의
비교적 온건한
갈래를 계승한
식민지 시기
온건 (‘타협 적’)
민족주의에 대한
‘모스크바
학파’의 입장
역시 양명이나
최성우 시대의
코민테른 한인의
견해 못지
않게 비판적이었다. 1954년부터
모스크바의 동
양학 연구소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한일 관계
등을 연구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긴 빅토르
이바노비치 시파예브(Viktor Ivanovich Shipaev, 1928~1994)
37)
Пак Б.Д. Россия и Корея. Издание второе,
дополненное. М., 2004. C. 138~183.
38)
주진오, 「독립협회의 대외인식의 구조와 전개」, 학림 8, 연세대 사학연구회, 1986, 69~105쪽.
39)
박정심, 「황성신문의 동양(東洋) 인식에 관한 연구」, 한국철학논집 59, 한국 철학사 연구회,
2018,
426~454쪽.
는, 1960년대 초․중반에
식민지 시기
민족 운동에
있어서의 한국
유산 계급
의 역할을
조명하면서 각종의
‘실력
양성’이나 ‘물산 장려’,
‘농촌 계몽’과 같
은 운동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유리한
측면이 다분히
있어도 ‘민족 해방’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는
기본 입장에
서고 있었다. 그는
예컨대 ‘물산장려 운동’을 국내
자본이 생산해
내는 제품들에
대한 일종의
‘판촉’
켐페인으로 인식하는가
하면, ‘민족지’ 중심의 ‘재(在)만주 동포
수호’ 켐페인이 결국
객 관적으로는
일제의 만주
침략과 보조를
맞추고 그
침략에 이용돤
측면이 컸
다고 진단하고, ‘만보산
사건’(1931년7월초 식민지
조선 각지에서의
在朝 중
국인에 대한
공격․학살 등)에 대한
일부의 책임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 도
져야 했다고
판단했다.[25][26])
이와
같은 혹평은, 물론
구체적인 연구들이
진행됨에 따라
각종의 단서를
달게 되고
보다 다양한
늬앙스를 포함하게
됐다. 예컨대 모스크바
학파의 한
국사론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1974년의 한국사(전2권) 개설서에서는 한
때에 박헌영(朴憲永, 1900~1956)과
가까이 지냈던
것으로 유명한
소련 외교관
출신의 파냐
샤브시나(Fanya Isaakovna Shabshina,
1906~1998)[27]) 와 고려인
학자 중에서
가장 높은
보직(과학원 산하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부소장)을
가졌던 게오르기
김(Georgii Fyodorivich Kim, 1924~1989)[28])
등은 식민지
시대의 ‘초기 민족
개량주의’, 즉 1920년대 일부
동아일보와 조선일
보, 내지 천도교
구파 계열의
‘상대적인
진보성’을 인정해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박헌영을
비롯한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잠시나마
취직을 하고,
두 신문이
레닌이나 소련에
대해 1920년대말까지 주로
긍정적인 서술
을 하고
모스크바로 특파원도
파견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
일정 정도로
‘손’
을 내밀어준
부분을, 샤브시나와 김은
식민지의 부르주아
계층과 어느
단계 에서는
임시적인 반제
운동에서의 동반자
관계 구축이
가능하다는 레닌과
코 민테른
‘통일전선’ 테제를
뒷받침해주는 자료로
여겨 기술했다. 그러나
동시 에
샤브시나와 김은
신간회 결성
및 운영
과정에서 ‘안광천과 같은
우파 기
회주의적인 노선으로
인해서’ 공산주의자들이 그
내부 헤게모니
장악 투쟁에
패배해 ‘진보성이 결여된
김병로(1888~1964) 같은 개량주의자’들이
결국 그
조직을 장악한
것을 ‘통일전선 구축의
과정에서 개량주의적
부르주아지에 제
대로 맞서지
못했을 때에
생기는 사태’라고 파악하여
특히 1929년 세계
대공 황의
도래 이후
국내 자본가층이
궁극적인 ‘완전한 친일화의
길’로 돌아섰다
고 판단했다. 일제
보호막 속에서의
전시 특수를
노리고, 일제가 구축하려
하는 ‘대동아 공영권’ 속에서의
일정한 역할을
추구하려 하는
국내 부르주아
들의 친일화
경향의 ‘예외’로서는, 샤브시나와 김은
‘진보적인
부르주아 정치
인’이 된
과거의 공산당원인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이나 허헌(許憲, 1885~1951), 홍명희 (洪命憙, 1888~1968)와 같은
일각의 ‘양심적 부르주아
지식인 세력’만을 거론할
정도였다.[29])
식민지
시대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논리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미하일
박이나
빅토르 시파예브, 파냐
샤브시나, 게오르기 김
등 모스크바
학파 계열
의 한국사
전문가들의 식민지
시기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평가는 물론
숨김 없이
당파적이며 이분법론적이라
할 수
있다. 독립 운동에의
기여와 식민지
체제와의 ‘거리’를 유일한
척도로 하는
이 평가
체제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부르주아나 중산
계층 등은,
비록 그
일파가 일시적으로
해방 운동에
개입할 수
있었으며 일부
양심가들이 반체제
투쟁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지만, 전체 적으로는
‘계급적
이익 차원에서
식민지/제국주의 체제
유지’로 실(失)보다 득(得)이 더
많은 사회적
집단으로 판단된다. 과연
비(非)사회주의적 민족
운 동의
모든 계열에
이와 같은
일률적 논리가
적용이 가능한가
라는 부분에
대해 회의(懷疑)해볼 수
있지만, 적어도 조선인
대자본가의 ‘매판성’을 입증
할 만한
자료를 샤브시나와
김은 꽤나
풍부하게 제시한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한국의 매체에서도
최근에 ‘일제 강점기
매판 자본’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박흥식(朴興植, 1903~1994)에
대해서는 샤브시나는-아마도
본 인이
1940~6년
사이에 경성의
소련 영사관에서
주재하면서 수집한
자료를 이용하여-그의
1944-5년
일군 전투기를
생산하기 위한
조선비행기공업주식 회사의
책임 경영뿐만
아니라 그의
북선제지화학(北鮮製紙化學)과 조선석유
(朝鮮石油) 등
일본 자본가들의
주식 회사들의
주식 매입과
이사회 참여
등 을
사례로 들어
그와 일본
대기업 사이의
‘유착
관계’를 고찰했다.44) 그러나
최근에 국내
연구자들도 일본인
대자본가와의 관계
구축, 나아가서 상호
투 자와
이사회, 감사역으로서의 참여,
그리고 일제
금융자본과의 관계
강화 등
을 박흥식과
같은 식민지
시대 예속
자본가들의 기업
전략의 특징으로
거론 한다.45)샤브시나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6대
매판 자본
족벌’로 경성방직의
김성수(金性洙, 1891~1955)와 김연수(金䄵洙, 1896~ 1979),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주로 은행․보험업에
주력했다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제련 회사(朝鮮製鍊會社) 등 여러
업체의 취체역으로
참여한 한
상룡(韓相龍, 1880~1947), 대지주이자 주요
기업 투자자로
참여한 민규식
(閔奎植, 1888~?), 대구
상업 회의소
회두이며 대구
지역의 부호인
장직상
(張稷相, 1883~1947), 그리고 호남의
은행가 현준호(玄俊鎬, 1889~1950) 등을
지목했다.46) 이들 중에서는
한상룡은 일제말기에
‘자본주’보다는
총독 부와
일제 금융기관, 그리고
일본인과 국내인
실업가들을 연결시켜
주는 ‘브 로커(broker)’에 더
가까웠지만,47) 나머지를 서로
교차 투자하고
인적 네트
워크 등으로
긴밀히 같이
연결된 종속
기업가로 보는
데에 있어서는
국내 주류
학계에서도 최근에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48) 그러니까
‘모스크바
학
44)
Гафуров
Б.Г. и др., ред. История Кореи. Т.2. М., 1974, C. 135.
45)
오진석,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 동방학지 118, 연세대 국학연구원, 2002, 93 ~151쪽.
46)
Гафуров
Б.Г. и др., ред. История Кореи. Т.2. М., 1974, C. 135.
47)
김경일, 「한상룡 (韓相龍)-친일 예속자본가의 전형」, 한국학보 19-2, 일지사, 1993, 60~91쪽.
48)
1920년대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제창한 김성수 계열의 산업 부르주아라 하더라 도 ‘만주 특수’를 계기로 하여 일제와 그 거리를 지속적으로 좁혀왔으며 193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전시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최근 국내 학계의 연구 결과이기도 한 다: 이승렬, 「일제 파시즘기 조선인 자본가의 현실 인식과 대응-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민족관을 중
파’의 식민지
시대 자산가
엘리트에 대한
판단을 ‘이념적 도식주의’ 아닌
‘냉
정한 평가’로 보는
게 더
합리적일 듯하다. 이
평가는, 미국 학계에서
1990년
대에 제시된
‘제국의
보호 속에서
성장된 기업’으로서의 경성방직에
대한 연
구의 결과49)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5) ‘모스크바 학파’의 전통
시대 역사의
연구
개화기나 일제
강점기의 ‘친(親)제국주의적 지배층’의
연구는, 소련 학자들
에게는 친미
반공의 보루로서의
당대의 남한,
일제 말기의
기본틀을 이어받
은 박정희
정권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와 그
보호막 속에서
성장되는 ‘재벌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필요했다.50)한데 미하일
박이나 그
많은 제자들
의 1차적인 학술적
관심사는 1950년대 후반
이후로는 보다
‘본격적인’ 학문
으로서의 고대,
중세, 근세사 연구이었다. 소련
과학원의 ‘외국인 원사’
신분 이었던
백남운(白南雲, 1894~1979) 등 식민지
시대 맑스주의
사학의 선구자
나 초기
북한의 사학자들처럼
미하일 박도
‘원시시대-노예제-봉건제-자본
주의-사회주의’와 같은
그 당시
소련의 ‘맑스-레닌주의적인 5단계 분류법’ 이라는
이름의 ‘보편적 법칙’51)
속에서의 조선의
‘위치’를 규명하고자
했다. ‘단계 분류법’의
둘째 단계는-이
분류법을 체계화시킨
소련 학자들이
‘보편
적’인 것으로
오해한, 주로 고대
지중해 지역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차용된- ‘노예제’이었는데, 삼국사기의 신라본기(新羅本紀)를
러어로 역주․출판
한52) 미하일 박인
만큼 한국
고대의 주된
직접 생산
담당자들이 ‘노예(노비)’
심으로」, 사회와 역사 67, 한국사회사학회, 2005, 166~209쪽.
49)
Carter
J.Eckert,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1876~1945,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
50)
Гафуров
Б.Г. и др., ред. История Кореи. Т.2. М., 1974, C. 413~420.
51)
Семенов
Ю. И., Философия истории: общая теория, основные проблемы, идей и конце пции от
древности до наших дней. М., 2003, C. 231~235; Eduard Thaden, “Marxist
Historicism and the Crises of Soviet Historiography” Jahrbücher für Geschichte
Osteuropas, Bd. 51, H. 1, 2003, pp.16~34.
52)
Ким
Бусик. Самгук саги. Издание текста, перевод, вступительная статья и комментарии
М. Н. Пака. T.I. М., 1959.
가 아닌
양민(良民)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래서
이미 1956년에 고대
한반도 삼국(三國)을 ‘봉건제 국가’로 규정해놓았으며,[30])
차 후
그의 고대
관련 저작에서
‘국가
봉건제’와 같은
개념을 활용해
왔다.[31])
1974년의 한국사에서도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서는 ‘잉여가치 수취’의 주
된 방식으로서
국가가 양민들에게
거두는 ‘세금(동시대 중국과
같은 租․
庸․調)’, 내지 귀족들이
국가가 내려준
‘식읍(食邑)’ 등에서 농민들에게
거두 는
지대라고 서술돼
있다.[32])
북한의 경우에는
1961년까지
삼국 시대를
노예 제로
볼 것인가, 봉건제로
볼 건인가에
대한 토론을
몇 차례에
개최했는데, 결국 1961~2년 이후로는
삼국 시대와
그 뒤의
시기를 ‘봉건제’로 보는
데에 찬동하는
대신, 미하일 박
등 ‘모스크바 학파’와 달리
고조선을 이미
완성된 ‘노예제 국가’로 성격
규정한 것이었다.[33])
결국, 비록 유럽의
봉건제 (feudalism)에서 따온,
다소 서구
중심주의적 색채가
짙은 ‘봉건제’라는 용어
를 불가피하게
사용하게 됐지만, ‘모스크바
학파’는 국가
관료 체제와
그 체
제 속에서의
귀족층 중심의
한국 고대․중세
국가들의 역사적
성격을 비교
적 정확하게
짚을 수
있었다고 본다.
제임스 팔레(James
Palais, 1934~2006)나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agner, 1924~2001) 등 미국
‘하버드
학파’의 한국사에
대한 관심은
주로 조선
시대 양반
사회와 그
성리학 사상사로
집중돼 있었다면,[34])
‘모스크바 학파’에서는 전통
시대 전반을
상대로 한
한국사 서술의
작업을 몇
명의 연구자들이
나름 대로
‘분담’해서 골고루
헤보려는 노력들은
더 돋보인다. 주로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의
역사를 맡은
미하일 박은,
소련의 몰락
이후에도 한반도에
서 3~6세기에 ‘봉건제’가 정착되었다는
자신의 기존의
학설을 고수했다. 그
는 나아가서
나말여초(羅末麗初) 호족들의 발호를
(중세
유럽과 그
성격을 비교할
수 있는)
‘봉건제적 할거(割據)의 시기’라고 여기며, 고려초기나
조선 초기에는
‘중앙
집권적 봉건제
국가’가 강화되었다고
봤다.[35])
그의 수제자
중의 한
명인 유리
와닌(Yuri Vasilyevich Vanin,
1930~2017)는 (근현대사 도 겸비해
왔지만) 주로 고려
시대사를 맡았다. 1974년의
한국사에서 고려
관련 서술을
맡은 그는
조․용․조(租․庸․調)에 의한
국가적 잉여
수취 (즉 국가적
봉건제)와 봉건
귀족 및
사찰에 의한
지대 수취나
고리대업, 노비 에
대한 착취를
통한 사적
잉여 수취,
즉 귀족-농민 사이의
봉건적 관계의
‘결합’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다. 고려
시대의 노비를
그가 ‘노예’보다 주로
‘농노’로 파악했다.[36]) 와닌도 일종의
‘자본주의
맹아론’에 기반을
둔 조선
후기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지만,[37])
조선 후기
사상사의 보다
자세한 계보를
제시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갈리나 댜가이(Galina Davydovna Tyagai, 1922~2006)이었다. 그녀 는-대체로
최익한(崔益翰, 1897~?)[38])
등 1950년대 월북파
맑스주의자들의 논리의
연장선상에서-특히 다산(茶山) 등을 ‘봉건주의 위기에
진보적으로 대처하려
했던 사상가’로
파악해 그들과
개화파 사이의
‘계보적
관계’를 강조
했다.[39])
그러나 북한
학계의 주요
학설들을 모스크바에서
수용하는 과정은
동시에 상당히
선택적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한인들의 민속학과
고구려 벽화
이외에 고구려사, 그리고
고대 한반도의
종족 문제를
맡았던 미하일
박
의 직계
제자인 로자
드자를가시노파(Roza Shataevna
Dzharylgasinova, 1931~2017)는
고구려 ‘종족(種族)사’에 대한
자신의 저서에서는
일면으로는 북한
학계(나 남한
학계)의 주장대로
고구려나 부여족과
남한의 진한(신라) 등을 ‘큰 범위에서는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던 동족’이라고 간주했지만, 또
일 면으로는
고구려의 ‘봉건 국가
형성’의 시기를
북한의 주장과
같은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가 아닌,
훨씬 더
늦은 3~4세기로 잡았다.[40])
중앙 집권
적 관료제
성립이나 유교나
불교 등에
대한 수용이
그때 비로소
이루어졌다 는
근거이었다. 드자를가시노파나 댜가이와
같은, 한국사 공부를
1940년말
에 시작한
세대라면 북한
학계의 동향을
그래도 매우
민감하게 인식했지만, 그
이래 세대의
연구자들은 훨씬
더 독자성이
강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잦았
다.
예를 들어서
미하일 박에게
1970년대말~1980년대초에
공부한 세르게이
볼코프(Sergei Vladimirovich
Volkov, 1955년생)의 경우에는, 고대
한국 불
교가 ‘군주의 외호(外護)를 받는
대가로 군주에게
의례 등을
통해서 봉사하
는 등
국가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국가와
호혜적인 거래를
할 수
있었던 세력’
이라고 판단하거나,[41])
그의 동아시
전역(全域)의 관료
집단들의 선발
메커니 즘의
비교사학적 연구에서
한국사 속에서의
‘귀족적
요소’와 ‘관료제적 요소’
의 결합을
논하는 것은[42]) 차라리 일각의
구미 학자들의
연구[43])와 더
가깝다 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미하일
박은 백남운의
‘삼국
노예제설’에 대한
반박으 로부터
시작하고, 댜가이가 최익한의
다산 연구를
계승한 부분이
있다면, 볼 코프의
세대는 북한
사학에 대한
관심 자체를
점차 잃어가기도
했지만, 맑스 주의적
역사 해석에도
내심 회의적이었으며
차라리 ‘전통 사회
통치 방식의
진화’ 연구에 중점을
둔 동시대
구미 사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4. 결론: ‘모스크바 학파’의
멸망?
제정 러시아
시기 이후로는
러시아 내지
소련의 한국학, 그리고
그 중에서
도 한국사
연구는 수백년에
걸친 긴
여정을 걸어
왔다. 한국사의 간단한
첫 소개는
17세기말에
스파타리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한국사
관련 최초의
1차
자료 러역은
19세기
초반에, 비추린의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 번역과 함께
이루어졌다. 청일, 러일 전쟁
시기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 고,
1920~30년에 주로 한인
동포와 혁명적
망명자에 의해서
그 시대로서
상 당히
독보적인 식민지
자본주의 연구나
노동, 농민 운동
연구가 실행됐다. 이와
같은 유산을
이어받은 1940년대말 이후의
‘모스크바
학파’는 한편으로
는 삼국사기
등 원전
번역 사업을
계속 진행하면서
비추린 이후의
‘1차
자 료에
의한 역사
연구’ 원칙을 지켰으며, 또
한편으로는 처음에는
식민지 시대
사회주의 계열
연구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식민지
엘리트의 ‘매판성’이나 근대
유산계급의 ‘종속성’ 문제부터 시작해서
고대사에 있어서의
‘사회․경
제적 형태’의 문제까지, 맑스주의의
‘보편
법칙’을 감안하는
한국사 전반의
해석 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의
주요 결론들인
‘식민지형
예속 자본주의론’ 이나
‘고대
한반도의 국가적
봉건제론’ 등은, 오늘날 연구
수준으로 재단해
도, 나름대로 사실적인
뒷받침이 잘
구비된, 즉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논증할 수
있는 결론이라고
볼 여지가
크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비서구를 타자
화시켜 그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켰다면
미하일 박과
그 제자들의
한국사 연구의
중점은 다름이
아닌 한국사의
‘보편성’에
있었다. ‘국가적 봉건제’는
중국 등
세계의 수많은
사회들과 같은
경우이었으며, ‘식민지형 예속
자본주 의’도 식민화를
당한 세계
주변부의 ‘보편’으로서 고찰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모스크바
학파’의 한국사
연구는 역으로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이분법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고 비서구
지역들을 보편론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좋은
사례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모스크바
학파’를 마냥
이상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
맑스주의적인 단
선적 ‘발전’의 도식에
대한 집착은
‘실증’을 무시한
관념론적 결론으로
쉽게 이어질
수도 있었다. 최익한의
주장대로 댜가이도
‘진보적이며
탈(脫)봉건적’ 이라고 파악한
다산은 비록
서구 과학이나
기술에 관심이
높은 실용주의자
같은 면모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동시에
노비제의 존치
내지 강화를
요구했 던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44])
댜가이는 다산의
보수성을 전혀
인식 안한
것 은
아니었지만, ‘자본주의 맹아론’의
차원에서 조선
후기에 ‘원(原)근대적 (proto-modern)’ 사상가가 필연히
있어야 했던
만큼 이
도식에 역사적
현실 을
맞추기 위해
애써 다산
사상의 ‘탈(脫)주자학적 측면’을 선택적으로
강조 했다.
도식적인 단선적
‘발전론’과
함께 정치적
고려들도 ‘모스크바 학파’의 역사
서술에 부득이하게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소련의 동맹국인
북한의 당
국을 인식해야
했던 만큼
‘모스크바
학파’의 공식적
역사 서술에서는
1936년
이후 김일성이
주도했던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의
투쟁이 갑산
등 일부
한 반도
북반부 지역이
아닌 조선
전역(全域)에서 커다란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 던
것처럼 묘사되는
한편 김일성에게
결국 제거를
당한 박헌영이
주도했던 경성콤그룹에
대한 언급은
전무했다. 반대로 여운형계의
일부가 북한에서
수 용돼
학계나 명예직
등에 포진된
만큼 여운형의
‘건준’에 대한
간단한 언급은
있었다.[45])
6.25의 시발점을
‘미국이
암암리에 같이
계획했던 이승만
패당의 침략
행위’로 보는
등69) ‘민감한 사건’에 대한
서술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국
익’에 알맞게
처리됐다. 6.25 전쟁 준비
과정의 전모를, 비밀
해제된 소련
문 서를
기반으로 해서
소련 몰락
이후에야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46])
그러나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1차 자료를
나름대로 충실히
섭렵․ 번역하고
가능만 하면
‘사실대로, 보편적
원칙과 연결시켜서’ 한국사를
서술 하려는
태도를 간직해온
‘모스크바
학파’는 그래도
오랫동안 매우
중요한 한
가지로 해외
한국학의 전통으로서
존재해왔으며, 특히 동유럽
지역 등에
영 향력을
미쳐오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의 몰락과
함께 인문학에
대한 ‘전략적 인’
국가적 지원도
급감됐으며, 학자들의 생활
여건 등이
대대적으로 악화됐
다. 학계는 ‘유망 직장’으로서의 위치를
잃었으며, 인문학을 위시한
여러 부
문 연구자들의
숫자는 러시아에서
경향적으로 떨어져가고
있다. 러시아 국가
는 러시아
국내 ‘명문대’들의 국제적
랭킨을 높이는
데에 최근
투자를 시도했
지만, 러시아 학계의
총체적인 위기와
쇠퇴 속에서
이 프로젝트도
예상대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47][48])
총체적 쇠퇴는
한국사 분야를
비켜나지 않았다. 원
전 번역은
지속되지만, 번역 대상에
오르는 원전들은
난중일기처럼 기존에
이미 영역되어
있으며 번역자가
그 영역을
참고해 번역하는
경우가 많아진
다.[49])
즉, ‘모스크바 학파’
특유의 독자성이
희미해져 간다고
볼 수
있다. 한 국
전통시대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단행본들은 이제
거의 나오지
않으며, 종 종
근현대와 관련된
학위논문이나 단행본들이
나와도 이렇다
할만한 독자성
을 발견하기가
힘들다.[50])
윗세대의 맑시즘은
도식성이나 단선적
발전론, ‘자 본주의의
합법칙적 발생’
등 획일적인
‘역사
발전의 법칙’들을 특정
사회의 역사적
상황 등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려는
목적론적 태도
등 수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사와
세계사의 모종
의 보편적인
‘큰
그림’을 그려보려는
그 세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
다.
반대로, 얼만 남지도
않은 ‘모스크바 학파’의 신진․소장파
후계자들은 이제는
‘큰
그림’에 대한
고민을 거의
접은 채
그저 특정
‘사실’에 대한
서술 에만
매달리는 것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모스크바 학파’와 계보적으로
연결 돼
있는 연구자라
해도 ‘모스크바 학파’로서의 특징들을
더 이상
발견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더
많다. 앞으로는 러시아
학계 전체가
‘회생’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한 모스크바에서의
한국사 연구도
점차 한국이나
구미권 등
국제적인 한국사
연구 중심지의
‘주변부’로
전락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본다.
▌참고문헌
기계형, 「러시아의 한국전쟁 인식에 나타난 변화: 전쟁 발발의 원인을 중심으로」, e-Eurasia 25, 2010, 2~6쪽.
김경일, 「한상룡 (韓相龍) - 친일 예속자본가의 전형」, 한국학보 19.2, 일지사, 1993, 60~91쪽. 김석형, 김희일, 손영종, 「《전 세계사》(쏘련 과학원 편) 조선 관계 서술의 엄중한 착오들에 대하여」, 력사과학 5, 력사연구소, 1963,
5~26쪽.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혜안, 2014.
김종헌, 「러시아 외교관 베베르와 아관파천」, 역사비평, 86, 역사비평사, 2009, 365~394쪽.
구자정, 「쿠르바노프의 한국사강의를 통해 본 러시아의 한국인식과 자기인식」,
e-Eurasia 25,
2010, 7~10쪽.
뀨네르 저, 한국개관 1부, 김종헌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12.
권세은, 「러시아에서 한국학의 현황 및 과제」, 아태연구 13.2, 2006, 119~137쪽. 남만춘, 압박받는 고려, 극동도서출판사, 1925.
박성봉, 「南北韓의 古代史 時代區分論에 대하여」, 국사관논총 59, 국사편찬위원회, 1993, 63~80쪽.
박정심, 「황성신문의 동양(東洋) 인식에 관한 연구」, 한국철학논집 59, 한국 철학사 연구회, 2018,
426~454쪽.
볼코프, 한국고대불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사이드, 에드워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00.
신복룡, 「北韓 史學에 나타난 甲申政變의 吟味」, 한국정치외교사논총 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85,
61~90쪽.
신, 마이클 D., 「특집 미국의 한국사 연구-미국 내 한국학 계보」, 역사비평 59, 역사비평사, 2002, 76~98쪽. 오진석,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 동방학지 118, 연세대 국학연구원, 2002, 93~151쪽. 와닌, 유., 「현대 러시아 한국학의 탄생과 반전」, 러시아의 한국 연구. 한국 인식의 역사적 발전과 현대적 구조, 풀빛, 1999, 119-156쪽.
이승렬, 「일제 파시즘기 조선인 자본가의 현실 인식과 대응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민족관을 중심으로」, 사회 와 역사 67, 한국사회사학회, 2005, 166~209쪽.
주진오, 「독립협회의 대외인식의 구조와 전개」, 학림 8, 연세대 사학연구회, 1986, 69~105쪽.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평양, 국립출판사, 1955(청년사 영인, 1989).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청년사, 1989. 토르쿠노프 A.V.지음, 구종서 옮김,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에디터, 2003.
de Waeber, Ch. Index de la
section géographique de la grande encyclopédie chinoise T'ou-chou-tsi-tch'eng,
Saint-Pétersbourg: Impr. de l'Académie impériale des sciences, 1907.
Eckert,
Carter J.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1876-1945,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
Frye, Richard N. “Oriental Studies in
Russia,” In Russia and Asia: Essays on the Influence of Russia on the Asian
Peoples, Wayne S. Vucinich, ed. 30-51. Stanford: Hoover Institution Press, 1972.
Kagarlitsky, Boris. Empire of
the Periphery: Russia and the World System, London: Pluto Press, 2008.
Kocho-William, Alastair. Russian and Soviet Diplomacy, 1900-39.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2.
Love, Ronald S. “A Passage to
China": A French Jesuit's Perceptions of Siberia in the 1680s” French
Colonial History, Vol. 3, 2003, pp.85~100.
Osipian, Ararat. “Russia fails to
achieve international excellence target” University World News, 24
October 2020. Available at:
https://www.universityworldnews.com/post.php?story=20201023 130100102 (2021년 3월 15일 접속).
Ozinga, James R. Communism: The
Story of the Idea and Its Implementation, Upper Saddle River, NJ.:
Prentice-Hall, 1987.
Paik, Hak Soon. North Korean State
Formation, 1945-1950, Vol. 1,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3.
Palais, James B. “Confucianism
and The Aristocratic/Bureaucratic Balance in Korea”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44, No. 2, 1984, pp.427~468.
Schimmelpenninck van der Oye,
David. “The Genesis of Russian Sinology” Kritika: Explorations in Russian and
Eurasian History Vol. 1, No. 2, 2000, pp.355~364.
Simbirtseva, Tatiana. “Modern
Korean Studies in Russia”, Journal of Korean Culture, Vol. 10, 2008, pp.81~100.
Tanaka, Stefan. Japan's Orient:
Rendering Pasts into History.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Thaden, Eduard. “Marxist
Historicism and the Crises of Soviet Historiography” Jahrbücher für Geschichte
Osteuropas, Bd. 51, H. 1, 2003, pp.16~34.
Tikhonov, Vladimir, “An
Interview with Mikhail Pak”,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Vol. 5, No. 2, 2002,
pp.133~161.
Tolz, Vera. “European,
National, and (Anti-)Imperial: The Formation of Academic Oriental Studies in
Late Tsarist and Early Soviet Russia” Kritika: Explorations in Russian and
Eurasian History Vol. 9, No. 1, 2008, pp.53~81.
Zubok, Vladislav M. A Failed Empire:
The Soviet Union in the Cold War from Stalin to Gorbachev.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7.
Анучин
Д.Н., 《Очерк
Кореи и ее отношений к Китаю и Японии》, Землеведение, Кн.1, СПб., 1895, C.
164-201.
Бичурин Н. Я., Собрание сведений о
народах, обитавших в Средней Азии в древние времена. В трёх частях с картою на
трёх больших листах. 2-е изд. Под науч. ред. А. Н. Бернштама и Н. В. Кюнера.
М., Л., 1950~1953.
Ванин
Ю.В., 《О
разложении феодализма в Корее》 Историография стран Востока (проблемы
феодализма), М., 1977. С. 120–139.
Ванин
Ю.В. 《Ведущий
историк-кореевед России》 Корея. Сборник статей. К 80-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профессора Михаила Николаевича Пака. М., 1998. С. 23-33.
Ванин Ю.В. 《Фаня
Исааковна Шабшина (Куликова) (1906~1998)》 Жизнь и труд посвятившие Корее:
Российские корееведы 2-й половины ХХ века. М., 2004. С. 236-258.
Ванин, Ю.В., ред., Колониальная Корея:
из публикаций в СССР 1920-х-1930-х гг. M, 2007.
Вебер
К.И. Пробная транскрипция всех городов Кореи (на правах рукописи), СПб., 1905;
Вебер К.И. О корейском языке и
корейском чтении китайских иероглифов (на правах рукописи), СПб., 1908.
Вебер
К.И. 《Записка
о Корее до 1898-го года и после. С предисловием О. Суковицыной》
Российское корееведение. Альманах. Вып 2., М., 2001, С. 128-148.
Волков
С. В. Ранняя история буддизма в Корее (сангха и государство). М., 1985.
Волков
С. В. Служилые слои на традиционн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М., 1999.
Гафуров Б.Г. и др., ред. История Кореи.
Т.1-2. М., 1974
Джарылгасинова,
Р.Ш. Древние когурёсцы (К этнической истории корейцев). М., 1972
Джарылгасинова Р. Ш.,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Пак - Творческая биография ученого”, http://icfks-publishing.narod.ru/workers/Pak_M_N.htm
열람 가능 (2021년3월10일 접속).
Жуков
Е.М., ред., Всемирная история в 10 томах. - М., 1955-1965.
Ким
Бусик. Самгук саги. Издание текста, перевод, вступительная статья и комментарии
М. Н. Пака. T.I. М., 1959.
Ким Сэк Хен, Ким Хи Ир,
Сон Ён Дён, О серьезных ошибках в изложении истории Кореи во
“Всемирной истории” изд. Академии наук СССР. Пхеньян: Изд-во литературы на
иностранных языках, 1963.
Концевич Л.Р. 《Российское
корееведение на современном этапе》 Российское корееведени
е. Альманах. Вып. 3. М., 2003, C. 7-51.
Кюнер Н.В., Статистико-географический и
экономический очерк Кореи, ныне японско го 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ства Циосен, Вып.
I. Ч.1-2. Владивосток, 1912.
Кюнер
Н.В., “Корейцы в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м крае” Этнографическое обозрение №4, 2004 [1929], С.80-96.
Ли Сунсин. Военный
дневник (Нанчжун ильги), вступит. статья, пер.
с ханмуна, коммен
т. и
прил. О. С. Пироженко. М.: Наука., 2013.
Нам
Манчхун, Угнетенная Корея, М., 1925
Пак, А. В., Общество независимости
(“Тоннип хёпхве”) и его место в национальноосвободительном движении в Корее в
конце XIX - начале XX вв. диссертация, кандидат исторических наук, М., 2006.
Пак М.
Н. “Автореферат диссертации: 《Очерки из политической истории Кореи во
второй половине XIX в.》” Доклады и сообщения исторического
факультета МГУ, вып.
8. 1948, C. 88-97.
Пак М.
И. 《О
характере социально-экономических отношений в государстве Силла (III —VI вв.)》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 7,
1956, C. 49-65
Пак М. И., 《О
возникновении и утверждении феодализма в Корее》 Историография стран Востока:
Проблемы социально- экономической истории феодализма в странах Востока, М.,
1969, C. 222- 305.
Пак
М.Н. История и историография Кореи.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М., 2003.
Пак Б.
Б., Российский дипломат К.И. Вебер и Корея. М., 2013
Пак Б.Д. Россия и Корея.
Издание второе, дополненное. М., 2004. Покотилов Д. Д., Корея и японо-китайское
столкновение, СПб., 1895 Россов П.В., Национальное самосознание корейцев, СПб.,
1906.
Россов
П.В., Очерк состояния Кореи в конце 1905 г. и в начале 1906 г., Харбин, 1906
Семенов Ю. И., Философия истории: общая
теория, основные проблемы, идей и концеп ции от древности до наших дней. М.,
2003, C. 231-235.
Симбирцева
Т.М. 《Амурской
нос. У истоков российско-корейских отношений》, Восточна я коллекция, № 4 (31). 2007, С. 12-20.
Сон
Ж.Г. Российские корейцы: всесилие власти и бесправие этнической общности.
1920~1930. М., 2013.
Спафарий Н. Г, Описание первые части
вселенныя, именуемой Азии, в ней же состои т Китайское государство с прочими
его городы и провинции. Киев, 1910.
Тихвинский
С.Л., Шаститко П.М. 《60-летие Г.Ф. Кима》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 10.
1984.
Тихвинский
С.Л., Пескова Г.Н., 《Выдающийся русский китаевед о.Иакинф
(Бичурин) (к 220-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История Российской духовной миссии в
Китае.
М, 1997.
Торкунов
А. В. 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корейский конфликт 1950—1953 годов, М., 2000.
Тягай
Г.Д. Общественная мысль Кореи в эпоху позднего феодализма. М., 1971.
Шипаев, В. И. Корейская буржуазия в
национально-освободительном движении, М., 1966.
Korean History
Research in Moscow
-Focusing on the
Soviet Period(1917~1991)-
74)Vladimir
Tikhonov*
Study of Korea history has a long pedigree in
Russia. Korea and its history were first introduced to the Russian readers by a
Russian envoy to Beijing in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Iakinf Bichurin (1777~1853) made pioneering translations of
some Chinese sources on Korea’s early history(descriptions of proto-Korean
tribes from Sanguo Zhi). Interest in Korea, history included, was considerable
during the time of the Sino-Japanese(1894~5) and Russo-Japanese(1904~5) wars.
In the 1920s-30s, the production of Russophone knowledge on Korea’s modern
history and contemporary conditions was mostly commissioned to the
Comintern-affiliated Korean revolutionaries, who were primarily interested in
the development of colonial capitalism and various anti-establishment
movements. From the late 1940s onward, Korean history became a domain of
professional Soviet historians, the majority of whom were based in Moscow’s
academic institutions. These historians inherited both the belief of the
importance of original materials’ commented translations from Imperial Russia’s
‘Oriental scholars’ and penchant for Marxist generalizations on Korean history
which was typical of the Comintern-affiliated Koreans. ‘Moscow school’
attempted to place Korea firmly on its Marxist map of world history and
concentrated
* Pak Noja, Oslo University, professor;
visiting research fellow at ICKS, Seoul National University
its attention on
the ‘dependent character’ of peripheral capitalism in modern
Korea, as well as
the issue of ‘socio-economic formation’ to which ancient Korea was supposed to
belong. Somewhat dogmatic as they were, Moscow historians’ descriptions of
‘comprador peripheral capitalism’ in modern Korea or ‘state feudalism’ in
ancient Korea were, nevertheless, based on firm belief in Korea being an
organic part of the ‘world-historical process.’ In their universalist approach,
these beliefs could be seen as contrasting what Said famously described as
Western ‘Orientalism’ towards the non-Western Others. However, the present
decline of Russian academia as a whole gives little hope for the survival of
‘Moscow school’ of Korean history in the future.
Key
words:Orientalism, othering, ‘Moscow school’, Mikhail Pak, Marxism,
universalism
논문투고일:
2021년 3월 16일∥심사완료일: 2021년 5월 17일∥게재확정일: 2021년 5월 17일
[1] ) 국내에서의 최초 번역은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00.
[2] ) Stefan Tanaka, Japan's Orient: Rendering Pasts into History,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3] ) Boris Kagarlitsky, Empire of the Periphery: Russia and the World
System, London: Pluto Press, 2008.
[4] ) Vladislav M. Zubok, A Failed Empire: The Soviet Union in the Cold
War from Stalin to Gorbachev.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7.
[5] ) Vera Tolz, “European, National, and (Anti-)Imperial: The
Formation of Academic Oriental Studies in Late Tsarist and Early Soviet
Russia”, Kritika: Explorations in Russian and Eurasian History Vol. 9, No. 1,
2008, pp.53~81.
[6] ) Спафарий Н. Г, Описание первые части вселенныя, именуемой Азии, в
ней же состо ит Китайское государство
с прочими его городы и провинции. Киев, 1910. ‘조선’ 관련 부분에 대한 연구로 Симбирцева Т.М.
《Амурской нос. У
истоков российско-корейс-к
их отношений》, Восточная коллекция, № 4 (31). 2007, С. 12~20.
[7] ) Ronald S. Love, ““A Passage to China”: A French Jesuit's
Perceptions of Siberia in the 1680s” French Colonial History, Vol. 3, 2003,
pp.85~100.
[8] ) Тихвинский С.Л., Пескова Г.Н., 《Выдающийся русский китаевед о.Иакинф (Бичурин) (к 220-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История
Российской духовной миссии в Китае. М, 1997, C. 171.
[9] ) Анучин Д.Н.,
《Очерк Кореи и ее отношений к Китаю и Японии》, Землеведение, Кн.1,
СПб., 1895, C. 164~201; Покотилов Д.
Д., Корея и
японо-китайское столкновение, СП
б.,
1895; Россов П.В., Очерк состояния Кореи в конце 1905
г. и в начале 1906 г., Харби н, 1906; Россов П.В., Национальное самосознание корейцев, СПб., 1906.
[10] ) Кюнер Н.В.,
Статистико-географический
и экономический очерк Кореи, ныне японс
кого 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ства Циосен, Вып. I. Ч.1-2. Владивосток, 1912. 이 책은 최근에 국역됐다: 뀨네르 저, 한국개관
1부,
김종헌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12.
[11] ) David Schimmelpenninck van der Oye, “The Genesis of Russian
Sinology” Kritika: Explorations in Russian and Eurasian History Vol. 1, No. 2,
2000, pp.355~364.
[12] ) Alastair Kocho-William, Russian and Soviet Diplomacy, 1900-39.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2, pp.77~148.
[13] ) 뀨네르는 1929년에 소련 원동에서의 한인 이민자에 대한 개괄적인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Кюнер
Н.В., “Корейцы в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м крае”
Этнографическое обозрение №4, 2004 [1929], С. 80~96.
[14] ) Нам Манчхун, Угнетенная
Корея, М., 1925, 압박받는 고려, 극동도서출판사, 1925.
[15] ) 주로 코민테른 계열의 잡지에서 게재되었던 그 논문들은
요즘 다시 출판됐다: Ванин,
Ю.В., ред.,
Колониальная
Корея: из публикаций в СССР 1920-х-1930-х
гг. M, 2007.
[16] ) Сон Ж.Г. Российские корейцы: всесилие
власти и бесправие этнической общности. 1920~1930. М., 2013, C. 252~318.
[17] ) James R. Ozinga, Communism: The Story of the Idea and Its
Implementation, Upper Saddle River, NJ.: Prentice-Hall, 1987, p.125.
[18] ) Hak Soon Paik, North Korean State Formation, 1945~1950, Vol. 1,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3, pp.423~426.
[19] ) Концевич Л.Р. 《Российское корееведение на современном
этапе》 Российское корееведени
е. Альманах. Вып. 3. М., 2003, C. 7~51.
[20] ) Vladimir Tikhonov, “An Interview with Mikhail Pak”, 2002.
[21] ) Джарылгасинова Р. Ш.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Пак - Творческая
биография ученого”,
http://icfks-publishing.narod.ru/workers/Pak_M_N.htm 열람 가능 (2021년 3월
10일 접속).
[22] ) Ванин Ю.В. 《Ведущий историк-кореевед России》 Корея. Сборник статей. К
80-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профессора
Михаила Николаевича Пака. М., 1998. С. 23~33.
[23] ) Пак М. Н. “Автореферат диссертации: 《Очерки из политической истории Кореи во второй половине XIX в.》” Доклады и сообщения исторического факультета МГУ, вы п. 8. 1948, C. 88~97.
[24] ) Тягай Г.Д. Общественная мысль Кореи в эпоху позднего феодализма. М., 1971. 36) Пак
М.Н. История
и историография Кореи.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М., 2003,
C. 752.
[25] ) Шипаев, В. И. Корейская
буржуазия в национально-освободительном
движении, М.,
[26] .
[27] ) 그녀의 인생과 학술 활동에 대해 Ванин
Ю.В. 《Фаня Исааковна Шабшина (Куликова)
(1906~1998)》 Жизнь
и труд посвятившие Корее: Российские
корееведы 2-й половин ы ХХ века. М., 2004. С. 236~258 등 참조
[28] ) 그의 인생과 학술 활동에 대해 Тихвинский
С.Л., Шаститко
П.М. 《60-летие Г.Ф. Кима》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 10. 1984, С. 115~117 등 참조.
[29] ) Гафуров Б.Г. и др., ред. История Кореи. Т.2. М., 1974, C. 52~147.
[30] ) Пак М. И. 《О характере социально-экономических отношений в государстве Силла (III—VI
вв.)》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
7, 1956, C. 49~65
[31] ) Пак М. И., 《О возникновении и утверждении феодализма в
Корее》 Историография стран Востока: Проблемы
социально- экономической истории
феодализма в странах Восто ка, М., 1969, C. 222~305.
[32] ) Гафуров Б.Г. и др., ред. История Кореи. Т.1. М., 1974, C. 49, 57, 66~67.
[33] ) 박성봉, 「南北韓의 古代史
時代區分論에 대하여」, 국사관논총 59, 국사편찬위원회, 1993, 63~80쪽.
[34] ) 마이클 D. 신,
「특집 미국의 한국사 연구-미국 내 한국학 계보」, 역사비평 59, 역사비평사, 2002, 76~98쪽.
[35] ) Пак М.Н. История и историография Кореи.
М., 2003, C. 613~661.
[36] ) Гафуров Б.Г. и др., ред. История Кореи. Т.1. М., 1974, C. 105~133.
[37] ) Ванин Ю.В. 《О разложении феодализма в Корее》
Историография стран Востока (проблем
ы феодализма), М., 1977. С. 120~139.
[38] )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평양: 국립출판사, 1955(청년사 영인, 1989).
[39] ) Тягай, Г. Д. Общественная
мысль Кореи в эпоху позднего феодализма. М., 1971.
[40] ) Джарылгасинова, Р.Ш. Древние
когурёсцы (К этнической истории корейцев). М., 1972.
[41] ) Волков С. В. Ранняя история буддизма в Корее (сангха и государство). М., 1985, 국역 으로는 볼코프, 한국고대불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등 있다.
[42] ) Волков С. В. Служилые слои на традиционн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М., 1999.
[43] ) James B. Palais, “Confucianism and The Aristocratic/Bureaucratic
Balance in Korea”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44, No. 2, 1984,
pp.427~468.
[44] )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혜안, 2014.
[45] ) Гафуров Б.Г. и др., ред. История Кореи. Т.2. М., 1974, C. 119~29. 69) Гафуров
Б.Г. и
др., ред. История
Кореи. Т.2. М., 1974, C. 224~25.
[46] ) Торкунов А. В. 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корейский
конфликт 1950~1953 годов, М., 2000. 국역으로는 A.V.토르쿠노프 지음, 구종서 옮김,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에디터, 2003 등이 있다.
[47] ) Ararat Osipian, “Russia fails to achieve international excellence
target” University World News,
[48] October 2020. Available at:
https://www.universityworldnews.com/post.php?story=2020102 3130100102 (2021년 3월
15일 접속).
[49] ) Ли Сунсин. Военный
дневник (Нанчжун ильги), вступит. статья, пер. с ханмуна, коммен
т. и прил. О. С. Пироженко. М.: Наука., 2013.
[50] ) 대표적으로 댜가이의 제자이었던 알력산더 박의 독립협회
관련 박사학위논문은 한국 학계와 구미 학
계
기존 연구를 종합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Пак, А. В. Общество независимости (“Тоннип
хёпхве”) и его место в национально-освободительном
движении в Корее в конце XIX-начале
XX вв. диссертация, кандидат исторических наук, М., 2006.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