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2)
민족주의 관점 밖 ‘위안부 연구’ 외면한 운동…비판·성찰 사라져
이보라·최민지 기자2020.06.14
연구와 운동의 불균형
그래픽 | 김덕기 기자
- 30년간 굵직한 성과 이어온 ‘위안부 운동’…학계로 눈돌리면 해방 후 발표된 박사 논문 12건 불과 기존 관점 벗어난 연구엔 ‘친일’ ‘매국노’ 비난…여성주의 측면서 문제 바라보면 여성 차별이란 민족 내부의 문제 지적하게 돼
- 할머니 인터뷰조차 단체 통해야 하는 상황서 연구는 운동 영향권에…연구와 운동, 유기성 갖고 비판과 성찰 주고받아야
전시 성폭력 문제에 관한 국내외 논의 확산과 1444번의 수요시위,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2011년 헌법재판소의 ‘위안부’ 문제 관련 ‘외교부 부작위 위헌 결정’과 위안부 운동의 국제연대 확대까지. 일본군 ‘위안부’ 운동 30년사 속 굵직하게 기억되는 역사적 사건과 성과들이다.
무대를 학계로 옮기면 어떨까. 해방 이후 75년간 ‘위안부’를 주제로 국내에서 발표된 박사논문은 12건이다. 운동이 30년 성장사를 쓰는 동안, 연구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민족적 피해를 강조하는 정의기억연대(정의연·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연구가 특히 그랬다. 증언 고증을 위한 역사학 기반의 연구도 미흡했다.
위안부 문제에 다양한 논의를 제시하기 힘든 사회 분위기와 무관심 속에 연구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빈약한 논의는 비판과 성찰의 부재로 이어졌다.
- 김정란 박사는 2004년 발표한 논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정대협의 활동을 중심으로>에서 “이제까지 정대협을 중심으로 한 위안부 운동은 위안부 문제 전반에 대한 연구물 부족과 함께 정대협이 위안부 연구와 운동의 주축이었다는 상황 속에서 비판적 분석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고 했다.
이후 16년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연구의 다양화는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를 위해 고민해야 할 과제다. 하나로 고정될 수 없는 피해자들 삶의 이야기는 다양한 담론을 통해 풍부해진다. 증언은 철저한 고증으로 탄탄한 기반을 얻는다. 운동은 비판과 새로운 담론으로 현재화된다. 연구자들은 위안부 문제가 ‘여성에 대한 구조적 성폭력’이라는 여성주의적 관점 등 그간 조명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선 자유로운 연구 풍토와 안정적인 연구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했다.
■ ‘위안부’ 연구, 손에 꼽는다
경향신문이 국회전자도서관 검색 시스템을 통해 조사한 결과 1945년부터 2020년 2월까지 ‘위안부’를 제목과 주제에 담아 발표된 국내 박사논문은 12건이다. 이 중 문학과 영화 등 피해 재현의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논문을 제외하면, 위안부 관련 논문은 손에 꼽을 정도다.
박사논문의 수가 해당 분야 연구를 평가하는 완전한 척도는 아니다. 그러나 박사논문부터 전문 연구물로 인정된다는 점에서 이 논문들은 관련 학계의 연구 활동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12건의 논문 가운데에서도 위안부 문제 자체를 집중해 다룬 것은 많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위안부 문제는 담론이나 콘텐츠 분야에서는 많이 다뤄졌지만 역사학을 기반으로 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변혜정 Sex&Steak(섹스앤스테이크) 연구소장은 “성폭력과 관련해 다양한 영역에서 학술논문이 생산되지만 전시 성폭력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양하게 고민을 던지는 학술논문이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다양한 피해자의 삶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했다.
■ 위안부 연구, 왜 왜소해졌나
위안부 연구가 공전한 배경 중 하나는 새로운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다.
연구의 다양화는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를 위해 고민해야 할 과제다. 하나로 고정될 수 없는 피해자들 삶의 이야기는 다양한 담론을 통해 풍부해진다. 증언은 철저한 고증으로 탄탄한 기반을 얻는다. 운동은 비판과 새로운 담론으로 현재화된다. 연구자들은 위안부 문제가 ‘여성에 대한 구조적 성폭력’이라는 여성주의적 관점 등 그간 조명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선 자유로운 연구 풍토와 안정적인 연구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했다.
■ ‘위안부’ 연구, 손에 꼽는다
경향신문이 국회전자도서관 검색 시스템을 통해 조사한 결과 1945년부터 2020년 2월까지 ‘위안부’를 제목과 주제에 담아 발표된 국내 박사논문은 12건이다. 이 중 문학과 영화 등 피해 재현의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논문을 제외하면, 위안부 관련 논문은 손에 꼽을 정도다.
박사논문의 수가 해당 분야 연구를 평가하는 완전한 척도는 아니다. 그러나 박사논문부터 전문 연구물로 인정된다는 점에서 이 논문들은 관련 학계의 연구 활동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12건의 논문 가운데에서도 위안부 문제 자체를 집중해 다룬 것은 많지 않다.
- 2004년 김 박사 논문과
- 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전 한국정신대문제연구소장)의 2010년 논문 <일본군 ‘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조선인 ‘위안부’를 중심으로->가 여기선 유일하다.
위안부 관련 저변까지 주제를 확대하면
- 2009년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일제의 공창제 시행과 사창 관리 연구> 등이 꼽힐 수 있다.
한국 학자의 해외 논문 중에서는
- 2000년 세계 첫 위안부 주제 논문인 윤명숙 박사의 <일본의 군대위안소제도 및 조선인군대위안부의 형성에 관한 연구>와
- 2012년 정유진 전 도시샤대 조교수의 <서벌턴 재현에 관한 연구-일본군 위안부와 국민기금> 등이 거론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위안부 문제는 담론이나 콘텐츠 분야에서는 많이 다뤄졌지만 역사학을 기반으로 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변혜정 Sex&Steak(섹스앤스테이크) 연구소장은 “성폭력과 관련해 다양한 영역에서 학술논문이 생산되지만 전시 성폭력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양하게 고민을 던지는 학술논문이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다양한 피해자의 삶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했다.
■ 위안부 연구, 왜 왜소해졌나
위안부 연구가 공전한 배경 중 하나는 새로운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다.
위안부 문제를 ‘피지배 민족 여성에 대한 지배 민족의 성적 수탈’로 보는 민족주의 관점에서 벗어난 연구들은 배제되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여러 연구자들이 말했다.
학계를 비롯한 한국 사회는 이 같은 연구와 담론을 ‘반일’ ‘친일’과 같은 이분법으로 소비했다. 동원의 강제성을 강조하는 기존 관점에서 벗어난 주장을 하는 학자들에게는 학문적 비판이 아닌 ‘매국노’와 같은 비난이 쏟아졌다. 박유하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는 2013년 8월 위안부 관련 저서 <제국의 위안부>를 출간한 뒤 명예훼손 혐의로 민형사상 고소를 당했다.
남성 학자들이 주류인 역사학계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연구 주제로 인정되지 않았다. 윤 박사는 “남성 중심적인 역사학계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역사학이 다뤄야 할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역사 연구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이 중심이었다. 1980년대 제도적 민주화가 이뤄진 후에도 비슷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도 “위안부 문제는 계급·가족·교육·취업 제도 등과 관련한 근대 여성문제의 절정판이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와 같은 여성사는 오래전부터 역사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학계에서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국내 문제를 건드려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여성주의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려면 위안부 동원에 기여한 가부장제 등 당시 여성차별 문제도 짚어야 한다. 1993년 재일동포 2세 여성학자인 야마시타 영애는 논문 <천황제 국가와 성폭력-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성학적 시론>에서 위안부 문제 맨 밑바닥에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유지를 위해 여성을 가사노동과 출산, 양육의 도구로, 혹은 성적 노리개로 전락시키고 있었던 복합적인 가부장적 폭력의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운동 단체와 주류 학계로부터 제국주의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며 주요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윤 박사는 “위안부 문제는 민족주의 문제이자 여성주의 문제다. 여성주의 관점에서 보면 민족 내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민족 내부 문제를 지적하는 논의는 한국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정유진 전 교수도 “민족주의 관점에서 일본에 사과하라는 말은 쉽지만 위안부 문제에 한 요인이 된 민족 내부 체제를 지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피해자가 느끼는 현재의 고통은 일본의 법적 책임 부재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차별에 기인한다”고 밝혔다.
운동을 주도한 정의연은 자신의 입장과는 다른 관점의 연구들을 운동에 반영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지지·용인하는 범주의 문제에 더해, 사회운동 특성상 세를 확장하기 위해선 메시지가 선명하고 단순화돼야 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담론을 정의연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연구는 운동의 영향권 안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연구자들은 할머니 인터뷰부터 기초 자료까지 모두 정의연을 통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었다. 정의연이 곧 피해자이자 한국 입장을 대변하게 된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정의연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를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강 연구원은 “운동과 연구가 서로 교감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면이 있었다. 연구 주제의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는 다양하게 바라볼 부분이 많다. 하지만 운동 영역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다소 단순화된 면이 있었다”고 했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불거진 정의연과 피해자의 괴리·배제 문제는 2004년 김정란 박사 논문에서 지적됐지만 실제 운동 방식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연구자들 스스로 위안부 운동·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까 위축되는 경향도 있었다.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한 번은 꼭 연구해야 하는 여성문제로서 위안부 문제에 책임감·부채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위안부 연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 정치적 부담을 갖는다”고 했다.
정의연에 우호적인 몇몇 특정 연구자가 국내 위안부 담론을 주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역시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지 못한 요인으로 꼽힌다. ‘일본군위안부연구회’는 2015년 한·일 합의 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2016년 1월 발족한 연구자 모임이다. 연구회는 위안부 운동을 성찰·비판하기보다는 운동의 민족주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는 지적이 있었다. 윤 박사는 “연구회 태생 자체가 한·일 합의 반동으로 생긴 것이라 운동 측 입장에 쏠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이 주로 연구회 소속 밖에 없어 독점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반론도 제기됐다. 연구회 내부에서도 정의연 사태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위안부 연구에 대한 정부와 정치권의 무관심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정춘숙 의원 등이 ‘여성인권평화재단’ 설립 등을 골자로 하는 위안부피해자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20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위안부 연구는 대다수가 단기 용역 사업으로 진행되는 수준으로 지원됐다. 2018년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설치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역시 별도 기관이 아니라 1년 단위 사업에 불과했다. 강 연구원은 “정부 지원은 1차적으로는 위안부 피해자, 2차적으로 운동 단체, 마지막으로 연구자에게 주어져왔다. 피해자 지원이 우선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실규명을 위한 조사연구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고 했다.
이 같은 연구 지원 방식이 연구 풍토를 바꿔놓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프로젝트식 연구가 단기간에 언론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에 위안부 피해를 입증할 만한 영상 등 사료를 발굴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자는 “식민지 사회의 통치 방식이나 당시 경찰 제도 등 위안부 문제를 다양한 틀로 이해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지만 성과 중심 연구 풍토가 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 연구와 운동, 함께 가야
연구와 운동의 이상적인 관계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연구와 운동이 유기성을 갖고 비판과 성찰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간 위안부 연구는 제한이 있었고, 위안부 운동에도 영향을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결국 운동이 깊어지거나 위안부 문제의 복잡한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 이젠 공론장에서 도전적인 연구와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연구의 다양화·활성화를 위한 안정적인 연구 환경도 강조됐다. 강 연구원은 “위안부 문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할 만한 연구기관과 지원이 필요하다. 연구소와 재단과 같은 안정적인 기구를 만들어 연구자들이 연구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위안부 논의에 대한 다양한 공론장이 형성돼야 한다. 윤 박사는 말했다.
“위안부 문제는 가부장제, 여성혐오를 비롯해 디지털 성폭력 사건, 성매매 등 현재의 여성인권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김학순 위안부 피해 생존자 증언이 한국 내 ‘미투’ 1호라는 구호는 이런 맥락으로 이어져야 한다. 위안부 문제가 갖는 다양성·중층성에 주목해 한국 사회의 성찰과 변화로 이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남성 학자들이 주류인 역사학계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연구 주제로 인정되지 않았다. 윤 박사는 “남성 중심적인 역사학계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역사학이 다뤄야 할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역사 연구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이 중심이었다. 1980년대 제도적 민주화가 이뤄진 후에도 비슷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도 “위안부 문제는 계급·가족·교육·취업 제도 등과 관련한 근대 여성문제의 절정판이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와 같은 여성사는 오래전부터 역사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학계에서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국내 문제를 건드려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여성주의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려면 위안부 동원에 기여한 가부장제 등 당시 여성차별 문제도 짚어야 한다. 1993년 재일동포 2세 여성학자인 야마시타 영애는 논문 <천황제 국가와 성폭력-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성학적 시론>에서 위안부 문제 맨 밑바닥에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유지를 위해 여성을 가사노동과 출산, 양육의 도구로, 혹은 성적 노리개로 전락시키고 있었던 복합적인 가부장적 폭력의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운동 단체와 주류 학계로부터 제국주의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며 주요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윤 박사는 “위안부 문제는 민족주의 문제이자 여성주의 문제다. 여성주의 관점에서 보면 민족 내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민족 내부 문제를 지적하는 논의는 한국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정유진 전 교수도 “민족주의 관점에서 일본에 사과하라는 말은 쉽지만 위안부 문제에 한 요인이 된 민족 내부 체제를 지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피해자가 느끼는 현재의 고통은 일본의 법적 책임 부재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차별에 기인한다”고 밝혔다.
운동을 주도한 정의연은 자신의 입장과는 다른 관점의 연구들을 운동에 반영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지지·용인하는 범주의 문제에 더해, 사회운동 특성상 세를 확장하기 위해선 메시지가 선명하고 단순화돼야 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담론을 정의연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연구는 운동의 영향권 안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연구자들은 할머니 인터뷰부터 기초 자료까지 모두 정의연을 통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었다. 정의연이 곧 피해자이자 한국 입장을 대변하게 된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정의연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를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강 연구원은 “운동과 연구가 서로 교감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면이 있었다. 연구 주제의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는 다양하게 바라볼 부분이 많다. 하지만 운동 영역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다소 단순화된 면이 있었다”고 했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불거진 정의연과 피해자의 괴리·배제 문제는 2004년 김정란 박사 논문에서 지적됐지만 실제 운동 방식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연구자들 스스로 위안부 운동·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까 위축되는 경향도 있었다.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한 번은 꼭 연구해야 하는 여성문제로서 위안부 문제에 책임감·부채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위안부 연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 정치적 부담을 갖는다”고 했다.
정의연에 우호적인 몇몇 특정 연구자가 국내 위안부 담론을 주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역시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지 못한 요인으로 꼽힌다. ‘일본군위안부연구회’는 2015년 한·일 합의 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2016년 1월 발족한 연구자 모임이다. 연구회는 위안부 운동을 성찰·비판하기보다는 운동의 민족주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는 지적이 있었다. 윤 박사는 “연구회 태생 자체가 한·일 합의 반동으로 생긴 것이라 운동 측 입장에 쏠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이 주로 연구회 소속 밖에 없어 독점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반론도 제기됐다. 연구회 내부에서도 정의연 사태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위안부 연구에 대한 정부와 정치권의 무관심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정춘숙 의원 등이 ‘여성인권평화재단’ 설립 등을 골자로 하는 위안부피해자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20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위안부 연구는 대다수가 단기 용역 사업으로 진행되는 수준으로 지원됐다. 2018년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설치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역시 별도 기관이 아니라 1년 단위 사업에 불과했다. 강 연구원은 “정부 지원은 1차적으로는 위안부 피해자, 2차적으로 운동 단체, 마지막으로 연구자에게 주어져왔다. 피해자 지원이 우선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실규명을 위한 조사연구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고 했다.
이 같은 연구 지원 방식이 연구 풍토를 바꿔놓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프로젝트식 연구가 단기간에 언론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에 위안부 피해를 입증할 만한 영상 등 사료를 발굴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자는 “식민지 사회의 통치 방식이나 당시 경찰 제도 등 위안부 문제를 다양한 틀로 이해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지만 성과 중심 연구 풍토가 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 연구와 운동, 함께 가야
연구와 운동의 이상적인 관계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연구와 운동이 유기성을 갖고 비판과 성찰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간 위안부 연구는 제한이 있었고, 위안부 운동에도 영향을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결국 운동이 깊어지거나 위안부 문제의 복잡한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 이젠 공론장에서 도전적인 연구와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연구의 다양화·활성화를 위한 안정적인 연구 환경도 강조됐다. 강 연구원은 “위안부 문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할 만한 연구기관과 지원이 필요하다. 연구소와 재단과 같은 안정적인 기구를 만들어 연구자들이 연구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위안부 논의에 대한 다양한 공론장이 형성돼야 한다. 윤 박사는 말했다.
“위안부 문제는 가부장제, 여성혐오를 비롯해 디지털 성폭력 사건, 성매매 등 현재의 여성인권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김학순 위안부 피해 생존자 증언이 한국 내 ‘미투’ 1호라는 구호는 이런 맥락으로 이어져야 한다. 위안부 문제가 갖는 다양성·중층성에 주목해 한국 사회의 성찰과 변화로 이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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