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4

김수영] ④ 패배하듯 쫓겨간 만주, 배반을 끌어안고 ‘바로 보다’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패배하듯 쫓겨간 만주, 배반을 끌어안고 ‘바로 보다’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패배하듯 쫓겨간 만주, 배반을 끌어안고 ‘바로 보다’

등록 :2021-06-14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④ 만주 이주

자발적 일본 유학
떠밀려 갔던 만주
바라던 걸 버려둬야 했던
배반의 공간
‘바로 봄’의 성찰 배경으로

망각하려 했던 연극
길림공회당서 첫 무대
‘연극적 가공’ 시 언어로
삶의 배반 극적 폭로

가톨릭신부를 연기하며
송화강변을 걸었던
연극과도 같았던 만주 삶은
일본 패망과 함께 끝났다

만주 시절인 1945년 6월 길림시 조선인들의 단체인 ‘길림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연극 <춘수와 같이>에서 가톨릭 신부 역을 맡아 연기하는 김수영. 박수연 제공


김수영은 1944년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이행하던 계절에 길림으로 건너갔다. 길림에는 요식업으로 성공한 이모가 살고 있었고, 그의 가족들도 이미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어머니는 서울에 남아 경기중학교 입시 준비를 하던 아들 김수경을 돌보고 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길림과 경성을 오가며 돈벌이를 했다. 누이 김수명의 기억에 따르면 오빠는 그 어머니를 따라 차가운 겨울 저녁에 길림의 집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당시 서울에는 김수명의 바로 위 오빠 김수경만이 중학 입시를 위해 남아 있었다. 그 위 오빠인 김수강은 그들의 집이 학교 담장에 연결되어 있는 길림제6고에 다니고 있었다. 김수영의 바로 아래 동생인 김수성은 징병 중이었으며, 김수명은 조선 학생이 대부분이었던 동영국민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김수영은 일본에서 돌아와 고모 집에서 기숙하다가 어머니와 함께 길림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1947년에 쓰이고 1948년에 처음 발표된 시 ‘아메리카 타임지’는 김수영의 삶의 경험과 세계 인식을 환기하는 몇 개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뜬금없이 사용된 시구 “지나인의 의복”과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은 그의 만주 이주의 경험과 미국에 대한 태도를 알려주고, 그 의미가 아직도 명쾌하지 않은 “와사의 정치가”에는 외적인 화려함과 내적인 부박함에 휩싸인 당대 정치인들에 대해 그가 택한 어떤 거리감이 있다. 이제 막 해방을 맞은 사람들이 자유 의식에 도취되어 보여준 과잉된 감정과는 다른 정서가 이 시에는 있는 셈이다. 이런, 서정적 정서마저 객관화하는 태도야말로 현실의 이면을 들춰내고 진실을 환기하려는 김수영의 시정신에 핵심적으로 연결될 터이다.





구 길림공회당 출입문 현재 모습.


이 시정신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김수영의 천품 이외에도 그의 격렬한 현실 경험이 작용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그의 일본 유학과 만주 이주는 결정적이다. 일본 유학은 그의 자발적 선택이었고, 만주 이주는 패배하듯이 쫓겨간 삶이었다. 상반된 이주 경험이었지만, 두 개의 지역은 그에게 모두 배반의 경험과 함께하는 곳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 배반의 경험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면, 김수영의 삶의 전체는 바로 이 배반의 상처와 돋아난 새살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그가 이 현실을 사랑했다면 그것은 “번개처럼 금이 간 사랑”(‘사랑’)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랑 속에서 그는 배반을 끌어안았고 배반을 긍정할 수 있었다. “시인은 촌초의 배반자”(‘시인의 정신은 미지’)라는 유명한 진술은 아무 대가 없이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일본 유학은 원래 목적이었던 대학을 포기하고 연극 공부에 주력하게 했던 패배와 기대의 장소였지만, 전쟁이 그것을 모두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귀국한 그가 가담했던 연극은 1944년 이른바 결전기 비상시국의 국민 연극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패배를 선언하고 연극을 포기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만주로 떠났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연극 무대에 올랐고 일본의 패망 후 귀국했으며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요컨대 그는 그가 살던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돌아오기보다는 바라던 것들을 버려두고 돌아와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우선 처리해야 할 것은 그가 도대체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 답변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는 그가 원했던 대로 전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극 <춘수와 같이> 기념사진첩 표지. 박수연 제공

그가 해방공간에서 발표한 시편들에는 시적 주체가 드러내는 공통적인 면모가 있는데, 그것은 대상을 정확히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박적 태도이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공자의 생활난’), “나는 이 책을 멀리 보고 있다”(‘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와 같은 진술에 드러나듯이, 이 시편들 이외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그는 삶과 세계의 원리 같은 것들을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봄’에 대한 이런 자기 다짐과도 같은 태도는 그 태도가 없었던 상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전제하는 것이다. 김수영에게는 일본, 만주뿐만 아니라 미국도 바로 보아야 할 대상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좌초를 경험하면서 캘리포니아 태생의 어떤 문화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라고 비유했다. 일본과 만주에서의 패배 경험을 그는 미국과 관련해서는 하고 싶지 않았겠다. 여기에는 그가 만주 이주 경험을 ‘어리석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던 저 만주국 오족협화 시대의 잊고 싶은 기억을 다시는 경험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다. 미국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에 비유하는 시인의 언어는 그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성찰의 지혜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김수영은 10여년 후 한국문학이 미국 국무성의 식민지문학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기록해두었다.)



연극 <춘수와 같이>가 공연된 만주국 시절 길림공회당 건물(왼쪽 둘째). 박수연 제공



김 수영 가족이 살았던 길림시 강장가에 위치한 송화강 입구. 박수연 제공

이 성찰적 태도가 원인 전부는 아니겠지만, 김수영의 시는 많은 경우 연극적으로 가공된 상황으로 전개된다. 페르소나가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야 한다는 근대 서정시의 어떤 원칙 같은 것을 그의 시는 간단히 넘어버리는데, 시의 극적 효과 요컨대 연극적 요인이 시 구성의 원리로 작용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애써 망각하려 했던 ‘연극’이 그의 내면과 몸에 이미 지울 수 없는 깊이로 새겨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시뿐만 아니라 그의 산문 중에도 어떤 글들은 허구적 상황을 만들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시 ‘아메리카 타임지’의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산문 ‘해운대에 핀 해바라기’의 실패한 연애담, ‘어머니를 찾아 북만으로’의 만주 이주 전 경성 생활의 정황 등이 그렇다. 상황을 창작하여 제시하는 이유는 삶의 경험을 합리화하고 극화하는 심리에 연결될 터이다. 그것들은 감추거나 위장하고 싶은 삶의 파편적 에피소드들일 텐데, 김수영의 시는 향후 그런 위장과 허구 지향의 심리를 감추지 않고 폭로하는 쪽으로 쓰인다. 이렇게 시인 자신이 자신의 삶을 사사건건 배반하고 폭로하여 극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를 다시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수영의 시는 그 언어들의 원천을 그의 연극 공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가 연극 마당에서 활동했던 사실을 직접 알려주는 자료는 만주 이주 시절의 연극 <춘수(春水)와 같이>이다. 종교적 삶과 청춘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는 독일극을 번역해서 당시의 길림시 조선인들의 단체인 ‘길림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이 연극에서 김수영은 가톨릭 신부로 분장해 연기했다. 이 연극은 결전기 태평양전쟁에 대응하려는 만주국 정신교육의 축제 마당에 출품된 협화극이었지만(연극 주도자 임헌태의 회고) 김수영에게는 연극 자체로서 이미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동경 학생예술좌 출신의 오해석이 연출을, 임헌태와 김수영이 주연을 맡아 공연된 이 연극은 김수영이 직접 연기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연극 <춘수와 같이> 공연 기념사진. 아랫줄 맨 오른쪽이 김수영이다. 뒷줄의 일본군 차림 배우들이 눈에 뜨인다. 박수연 제공

연극과도 같았던 만주의 짧은 삶이 일본의 패망과 함께 끝나고, 다시 중국인들에게 쫓기듯이 김수영은 귀국했다. 그의 가족들이 살던 집의 이웃이었던 중국인은 일본인들에 대한 테러로부터 보호해준다며 김수영 집안의 귀국을 만류했지만, 김수영의 어머니는 그 집의 대문을 잠그고 이웃 중국인에게 열쇠를 맡긴 후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만을 남긴 채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이 살던 길림시 강장가(康庄街)는 백두산에서 발원한 송화강이 남쪽 끝에 수직으로 흐르는 조선인 거주구역이었고, 지금도 조선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또 <춘수와 같이>가 공연된 길림공회당은 얼마 전까지 ‘길림시 활극단’ 사업장으로 활용되다가 최근에 건물 개보수를 위해 공사 중이다. 길림대가의 동쪽 이면도로인 중경가와 청년로가 교차하는 곳에 공회당이 있다. 김수영 가족의 집이 있었던 강장가에서 도보로 30분 정도의 거리다. 길림공회당 앞쪽으로 있는 남창로에는 중국 동북지역의 대표적 공자사당인 ‘문묘’가 있어서, 시 ‘공자의 생활난’의 소재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를 상상하게 한다. 김수영은 저 만주의 길림에서 공자의 삶을 상상하고 가톨릭 신부를 연기했으며 송화강변을 걷다가 문득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 운명이 그의 문학에 있다고 상상했다면 그것은 어떤 운명이었을 것인지 우리는 곧 길림 송화강에서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박수연 충남대 교수, 문학평론가






아메리카 타임지(誌)



흘러가는 물결처럼
지나인(支那人)의 의복
나는 또 하나의 해협을 찾았던 것이 어리석었다

기회와 유적(油滴) 그리고 능금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하여 응결한 물이 떨어진다
바위를 문다

와사(瓦斯)의 정치가여
너는 활자처럼 고웁다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또 활자를 본다
한없이 긴 활자의 연속을 보고
와사의 정치가들을 응시한다









김수영 시 ‘만주의 여자’ 초고. 김현경 제공



현대문학사 원고지에 김수영이 친필로 쓴 ‘만주의 여자’ 원고. 출처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민음사)



<자유신문>(1948.12.25)에 처음 발표되었다가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4)에 재수록된 김수영 시 ‘아메리카 타임지’. 맹문재 제공



길림공회당 건물의 현재 모습. 박수연 제공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후원하기 후원제 소개

연재한겨레 33살 프로젝트 : 김수영
패배하듯 쫓겨간 만주, 배반을 끌어안고 ‘바로 보다’
친일파라 욕해도 맘껏 부려썼다, 망령 씐 ‘식민지의 국어’
모더니즘 이전에, 이미 핏줄에 흐르고 있던 선비정신
아버지 사진조차 몰래 봐야 했던 시인, 그렇게 아버지가 되다
김수영이 묻는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가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99210.html#csidxc2690b859ad2c1c96a6dc37726a3516


twitter 대표계정 입니다.Jin Han Yun2시간 전
하느님의 종교인 수천년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의 정체성을 확실히하고, 하느님과 별개의 철학인 도교,불교를 이해하는것도 어느정도 필요합니다.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天生蒸民), 하느님이 선택하신 공자님의 天命.天德등과, 하늘에 죄지으면 빌곳이 없다는 공자님의 인의예지신, 공맹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삼강오륜과, 하느님(天).공자님을 숭배하는 모든 인간이 노력하면서, 군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수천년동안 동아시아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온 세계종교입니다.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조선성명 복구령 전국민이 조선 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 의무등록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도. 학교교육도 한문,윤리등을 통해 유교교육이 주류. 세계사로는 한나라때 공자님을 추가로 제사하며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성립. 한국사로는 유교의 始原유교의 제천의식인 삼한 단오절(수릿날).시월제, 부여 영고,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 교육. 조상제사의 고인돌. 유교 교육기관 교육으로 보면 고구려 태학.백제 오경박사, 신라 국학, 고려 국자감,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유교 최고대학 교육. 은주시대 성립한 始原유교의 하느님,오제[上帝, 조상신계열로 승천, 하느님(天) 하위신으로 계절주관], 지신,산천신,부엌신등 숭배. 은나라 왕족후손인 기자의 한국 기자조선(고려,조선시대 인정, 일제강점기 영향탓 기자조선이 부정되나 한국사의 고조선중 正史영역 기자조선임)의 마지막왕인 기준왕(분명한 正史인물 위만에 멸망)은 중국 始原유교 특징인 한문성씨(서씨,한씨) 성립의 시조로 삼한(三韓)의 조상이 됨. 삼한은 始原유교 특징인 제천의식(단오절,상달제,시월제) 거행. 삼한의 마한유교는 백제영토로, 변한 유교는 가야로, 진한 유교는 신라로 이어짐. 한나라때 공자님의 유가사상이 국교로 채택되며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로 성립되고 공자님도 제사. 한사군의 낙랑은 부여.고구려(고주몽).백제(주몽임금 후손 온조왕, 백제는 마한영토의 始原유교도 승계)에 영향.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현재는 5,000만이 유교성명 복구하여 문중별.가족별 조상제사 행하며, 설날.추석.대보름.한식.단오의 주요 명절과 중양절(국화철)을 가지고, 유교문화 24절기의 입춘, 소서.대서의 삼계탕.피서, 상강(단풍철), 입동.소설의 김장철, 동지의 팥죽등 세시풍속을 가짐.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 성균관대임.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세계종교 유교가 위기에 있지만, 유교의 세계종교 자격이 있는 세계사를 반영해야 하기때문에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된 예수회(귀족출신 이나시오 사제가 설립한 예수회는 교황청의 실세로 세계적으로 교황윤허대학은 별로 없음)의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국사 성균관 자격가진 성균관대[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다음의 Royal대로 성균관대 출신인 필자(윤진한, 문필가.유학자.사상가)의 사상이며, 유교와 세계종교 가톨릭의 역사적 자격을 바탕으로 공존하고자 함. 세계사의 오랜전통의 대학들인 중국 태학(세계 최초의 대학).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로 승계됨), 그리고 서양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파리대학의 세계사 자격은 베이징대와 성균관대에 아주 중요함. 세계사의 중국 황하문명, 세계종교 유교, 세계 4대 발명품으로 교육되는 중국의 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도 중요함. 학교교육 전분야에 걸쳐 근대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 학자들의 이론으로 이루어진 학교교육(신학.법학.의학및 역사.철학과 고교때의 수학, 세계사, 사회문화, 국토지리.세계지리,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음악.미술등)은 유교경전이나 가톨릭 경전과 함께 세계인의 만국공통어임. 성균관대는 일본이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한 후, 미군정당시 성균관을 복구시키기로 법을 발효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고문:이승만.김구선생, 위원장:김창숙 선생)과 남북유림들이 모여 성균관에 대자를 더 붙여 성균관대를 설립(복구설립형식임)키로 결의하여, 성균관장이 성균관대신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등록하여 국사로 가르치는성균관의 유일무이 최고대학자격으로 이어지고 있음. 성균관대로 정통을 승계하기로 하자, 미군정이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대 재정에 기여토록 하는 법을 추가로 만들어 주어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때 대통령령으로 시작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발행으로 행정법상 조선 성균관 승계를 성균관대가 승계하였다고 행정법상 추가로 법제화함.성대 6백주년 행사때는 대통령.국무총리.교육부 장관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3127


http://blog.daum.net/macmaca/733

naver 대표계정 입니다.Zolathan Young4시간 전
이 기사를 매국보수세력과 친일파가 싫어합니다.

답글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