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의 근육을 길러주는 『공부론』 : 책 ‘공부란 무엇인가’ 소개>
Ⅰ. 우리가 그간 생각했던 공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사람들마다 제 나름의 목적의식과 지향하는 가치가 다양한 만큼, 각자의 삶의 경로도 세대별, 계층별로 동질적으로 보일지라도 결코 균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사회인으로 거듭나기 이전, 모두가 공통의 관문으로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의 ‘공부’ 일 것이다. 내 스스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만 어떠한 방향성이나 목적을 지향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확신이 없다. 군에서 짧은 2년의 시간 동안에도, 반강제적으로 사회와 격리되는 와중에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제어하거나 통제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는 한편, 내가 그간 했던 공부가 앞으로는 부정당할 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내 스스로 많이 초조하면서 적성에 맞지도 않은 분야를 붙들고 끙끙거리기도 하였다.
현실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공부는 일종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공부 ‘그 자체’ 가 즐거워서, 좋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미 충분한 경제력과 신분이 보장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불과하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당장 먹고살기 바쁜 한국사회에서 공부한다는 의미는 학력과 전문직 등의 문화적·상징적 자본을 얻기 위한 제로섬 게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소름끼칠 정도로 엄청난 분량의 객관식 문제를 우리는 학창 시절에 풀어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출제자의 의도로부터 잠깐 한 발짝 떨어져 다른 시선으로 마주하고 문제를 처리하는 등의 사치와 여유는 금물이다. 오로지 누구보다 빠르게 암기가 요구되는 지식을 바탕으로 출제자의 의도를 좇아 정답에 다가가느냐 마느냐의 싸움이다. 이를 넘기지 못하고 실패 혹은 회피한다면 그 다음 과정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둘러싼 전략 싸움이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경제력과 인적 네트워크가 영향력을 발휘된다는 사실은 이미 보수, 진보 다를 바 없이 여러 엘리트 부잣집 자제를 둘러싼 의혹에서 드러났다. 혹자는 이 같은 공부에 흥미가 없다고 혹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칫 영원히 노비의 굴레에 빠지게 됨을 모르지 않기에 스스로 불나방과 같이 뛰어든다. 우리가 현재 사소히 느끼거나 푸념하는 불평, 불만, 일탈 따위는 현실에서 얼마나 큰 허영이자 사치인지 절실히 느끼고 있지 않은가.
어떤 공부가 필요하다는 개념보다는 먼저 공부 ‘그 자체’에 대한 개념어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지위나 문화 자본이 아닌, 내생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공부는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생 배움과 공부의 길을 걷고자 마음먹은 사람으로서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발견한 책을 소개하고 싶었다. 평생 자발적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면서도 소통의 끈을 놓지 않는, 적지 않는 양질의 작문으로 ‘칼럼계의 아이돌’ 이라고 불리는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의 <공부란 무엇인가>는 나에게 있어 유용한 ‘공부 지침서’ 가 되어주었다.
최근에는 저자가 방대한 동아시아 속 중국의 정치 사상사를 집대성했던 영어판 학술서를 한글판으로도 완역했다는 소식을 듣고 들뜬 마음에 찾아 나섰다. 그러나 뜨-악.. 내 가벼운 지갑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가격.. 나의 기억력과 정보처리능력을 압도하는 엄청난 두께..에 올 한 해는 포기했다. 기약 없는 책과의 약속을 대체할, 이번에는 나 같은 공부초짜를 상대로 말랑말랑하게 에세이 형식으로 친절하게 써진 이 책은 어떠할까.
Ⅱ. 공부란 지적성숙의 과정 - 모순 없는 글쓰기를 향하여
우리 인간의 삶은 보기보다 모순과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경제학이 가정한 완전 경쟁 시장모형이 존재하지 않듯이, 이론으로 일관되고 완벽하게 잘 구성된 삶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 혹은 긴장 등의 결함으로 가득 찬 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어른의 태도이며, 자신이 갖고 있는 모순덩어리를 빙자하여 타인을 공격하고 괴롭히지 않도록 하는 자제력이 시민의 덕성이다. 자신의 결심만으로 일관되고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실 순진하거나 유아적인 생각 다름 아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 이 모순과 긴장 또는 혼란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이러한 세계를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모순과 긴장, 혼란을 직시하되 가능한 모순 없는 문장을 사용하여 명료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좋은 글쓰기란 정교하게 정의한 개념과 분석적 논리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외부 세계에 대한 충분한 경험적 지식의 축적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모순 없이, 명료한 자기 문장이 만들어 진다.
우리가 점차 경험적 지식을 축적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말로만 들었던 세상의 모순이나 긴장과 혼란이 명확한 인식적 작용을 거쳐 자신에게 다가온다. 교과서 속의 역사가 아닌, 필터링을 거치지 않는 사료 등을 독해하다 보면, 현실의 역사에서 완전무결한 도덕적 혁명가나 인정사정없는 악덕한 자본가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가 어떠한 대상을 선과 악으로 단정해버릴 때 보이지 않던 모습이 사실은 그 대상이 양면적인 성격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모순된 현실을 단순화해 이해하는 것보다는 복잡 다면한 모순을 직시하면서 이를 모순 없는 문장으로 드러내야 사물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높일 수 있을 테다.
문장을 구성하기 이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어휘, 즉 단어의 선택이다. 우리는 세간에 자주 인용되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만 하나하나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쓰임새를 알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뜻이 오용, 남용되기 쉽거나 모호한 단어들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해당 단어의 무분별한 사용을 먼저 자제하고 그 단어가 가지는 정확한 기능은 살려 정의하도록 해야 한다. 의외로 많은 단어가 단지 특정현상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정치적 수사와 평가까지 동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평가어는 해당 사회의 의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적용 방식’ 을 바꾸는 것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한다.
예컨대, 역사적 조건의 변화로 우리 현대문명에 큰 획을 그은 것 중 하나로 자본주의의 발흥을 들 수 있겠다. 과거 세간에 통용되었던 상인들의 탐욕과 사치의 이미지, 고리대금업자들의 매정함과 부정직의 이미지는 변화의 흐름 속,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기반으로 한 자신들의 이윤 추구활동을 정당화하는 검소(frugality), 야심(ambition), 약삭빠름(shrewdness) 등의 평가어로 대체하였다. 이렇듯 시대의 선각자들은 변화의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당대의 평가어를 재정의 하기도 하였다. 현실 정치에 있어 당시 세간의 통념과 달리, 도덕에 대한 집착과 탈(脫)권위(권력)의 규범이 실은 악덕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 <군주론> 의 마키아벨리 역시 대표적인 전례이다.
간혹 글을 쓰는 것보다도 제목을 붙이는 것에 어려움을 종종 느끼곤 한다. 자신이 전달 혹은 대표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대로 복제나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내용을 압축해 함축적으로 문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쓴 글의 내용을 한 번 더 점검하고 전체와 부분 간의 관계, 대표의 개념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독자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독해의 방향성을 부여하는 조타수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는 제목 짓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Ⅲ. 무용해 보이는 공부가 가지는 기대효과
김영민 교수가 기대하는 공부의 출발점은 호기심에서 출발한 지식 탐구이다. 이를 통해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내 자신을 체험하는 것이야 말로 장기적 관점에서도 효용성 있는 공부를 유지할 수 있다.
나의 호기심과 유리된 채 오로지 돈만을 벌기위해 하는 공부, 남들보다 더 유식해보이기 위한 공부,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는 공부, 즉각적인 쓸모에 연연하는 공부는 그 수명가치가 일시적일뿐더러 장기적이지 못하다. 당장의 취업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현실의 구속 안에서 행하는 공부에서 열정과 재미, 감동을 느낀 다는 것은 사실 언감생심이다. 다만 현실적 제약조건 속, 상대평가에 의거한 점수에 일희일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과의 경쟁을 의식하기보다는 하루하루 행하는 꾸준함은 나를 단련시킬 것이라 믿는 자기 갱신의 믿음 속에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 감각을 익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삶에 덜 예속될 것이다.
그렇게 지식 탐구를 통해 하나하나 지식이 쌓이며 깊어지기 시작하면 사물을 인식하는 폭의 넓이가 달라질 것이며 보다 섬세해진다. 그간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과 동시에 더러움과 추잡함 역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에 합당한 언어를 사용하여 타인을 이해하고자 할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심화된다. 이는 시민적 덕성에 기초한 공동체의 구성을 위한 개인의 전제조건이기도 한다.
자신의 세계, 우주관을 확장시키고 싶으면 공부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타인과의 상호교류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라면 섬세하고 정교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날로 각박해져가는 세상에서 이 같은 공부의 기대효과가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유용성과 효율성이 지배하며 인간의 정초적 규범과 정신이 날로 피폐해져가는 21세기 사회에서 가지는 공부의 마지막 기대효과는 이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Ⅳ. 공부의 심화를 위한 지적 조건- 창의성 기르기, 독서와 서평의 목적과 요구되는 자세
늘 시중에 4차 산업혁명이니, 디지털 지식경제 시대이니 등등의 시대를 표시하는 선전구호가 습관적으로 유통된다면 이와 함께 개인에게 요구되는 자질 중 대표적으로 ‘창의성’이 거론된다. 흔히들 기업 혹은 사회에서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하다는 담론이 시중에 자주 유통된다. 단순히 주어진, 부여된 일들을 원만히 처리하는 능력을 뛰어넘어 기준의 관습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질을 창의성이라 정의한다면 대체 어떤 공부가 창의성을 기를 수 있는 것일까.
창의성은 기본적으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2가지 이상의 아이디어(생각)의 공통점을 찾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일한 하나의 생각이 아닌 복수의 생각이 전제된다는 점이다. 입시공부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멀리해야 하는 ‘잡념’ 이 되레 창의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하나의 전제 조건일 수 있다. 즉, 새로운 대상을 자주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이나 독서가 생각의 폭을 늘려줌과 동시에 창의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여기서 기인한다.
자기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기존의 권위와 지식에 갇히기 시작하면 단선적이고 편협한 사고를 하게 된다. 따라서 기존의 내 전문영역에서 일정부분 경험이 쌓이고 내공이 생겼다 싶으면 자신의 관심·경험 분야를 새롭게 조금씩 확장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리고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지식과 경험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용기’ 가 필요하다. 자신의 의도대로 글의 전개가 나아가지 않더라도 기존의 권위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으면 자기의식의 혁명적 전환과 변혁의 순간이 어느 순간 찾아올 줄 모른다.
Ⅴ. 독서와 글쓰기는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책은 사회와 개인의 자아의 중간 매개체 역할을 담당한다. 책을 통해 자아는 사회와의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보장받으며 소통을 위한 언어의 풍부함이 더해짐과 동시에 상상의 질적 수준 역시 올라가게 된다. 물론 그를 위한 전제조건은 다독과 정독이다.
김영민 교수가 추천하는 정독법 중 하나는 자기만의 질문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는 것이다. 내가 설정한 질문에 답하는 문장들이 바로 내가 정독해야 할 부분이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감식안을 통해 바른 독해습관을 기를 수 있다. 또한 정독을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침묵하는) 내용을 행간 내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하며, 책의 저자가 근저에서 배경상식으로 공유하고 있는 가정과 전제를 재구성 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책의 주장과는 결이 다른 경쟁하는 다른 주장 역시 접하면서 저자의 주장, 근거의 타당함을 점검할 수 있는 ‘비판적 독해’ 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런 방식의 다독과 정독은 좋은 서평쓰기를 위한 디딤돌이다.
서평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전체로서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기본적으로 책의 핵심내용과 주제에 대한 적절한 분량의 요약이 전제되어야 하며, 독자의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해서 사회적 맥락(Context)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바탕으로 어떠한 형식으로 전개방향을 잡을 것인지는 서평자의 역량에 달려있다. 같은 주제의 여러 책들과 동일한 맥락에서 비교분석하며 서평대상인 책을 위치시킬 수도 있고 세부 주제와 관련하여 동시기에 나온 여러 책들과 또는 저자의 또 다른 서적과의 관계 속에서 책을 논할 수도 있다.
깊이 있는 서평은 이런 식의 내용 소개에만 그치지 않으며 본격적인 비평이 담긴다. 서평대상의 책이 제공하는 정보나 근거의 결함을 지적할 수 도 있고, 저자가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전제들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단지 주례사 같은 서평과 같이 마찬가지로 여기서 건설적인 제안이나 대안 없이 자칫 공격적인 문구나 설득력 없는 비판만을 늘여놓으면 서평자의 역량미숙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혹은 단순한 비판 혹은 불필요한 비판을 뛰어넘어 창의적으로 보이는 질문을 던져 그 책의 새로운 면모를 조명하는 것도 좋은 비평방식이다. 단지 책 내용을 발판삼아 내 이야기 쓰는 서평은 지양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서평이란 결국 간결하고 명료한 내용요약과 더불어 내가 가진 학식을 이용해 행하는 심도 있는 분석, 마지막으로 건설적인 비판과 창의적 대안의 모색을 추구하는 비평이 어우러지는 복합물과 같다. 또한 이는 질적인 공부를 위한 하나의 중요 과정이자 ‘탁월함’을 성취하기 위해 행하는 대표적인 지적 훈련이다.
공부할 때 왜 탁월함을 목표로 하는 것일까? 우리가 잘 모르는 변화의 속도가 내 인지보다 항상 앞서서 나가있는 세상사를 알고자 할 때, 스스로 증거와 논리를 수집하여 대상의 타당성을 분석하며 더 나은 지점으로 이동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독립적인 자기 견해와 주장을 지니게 된다. 물론 이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미 수없이 반복한 공부 덕에 단련된 뇌의 말랑말랑함과 민감함이 내 사고의 유연함을 발휘해 줄 것이고 이는 ‘위기’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나를 지키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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