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0

[제708호]진보를 유연하게 재구성하라고?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21

[제708호]진보를 유연하게 재구성하라고?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21


권혁범의 세상읽기
진보를 유연하게 재구성하라고?

제708호
등록 : 2008-05-01 00:00

최근 유행하는 비판에는 ‘우향우’하라는 암시가…진보정당은 뉴타운 공약에 들뜬 대중을 좇아야 하나

▣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언론홍보학 kwonhb@dju.ac.kr

요즘 진보는 동네북이다. 우파도 비난하고 좌파도 비판한다. 전자에서는 진보가 몰락한 것을, 안타까운 척하지만, ‘즐기는 게’ 역력하다. 정치권에서 통합민주당의 운동권 출신 일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을 진보라 부를 수 있다면 4·9 총선에서 진보가 패배한 것은 엄정한 사실이다(시민사회의 진보세력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진보를 외면하고 말았다. 물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얻은 표를 합산하면 2004년 총선 때 민주노동당이 얻은 표에 그리 뒤떨어지지 않으며 노회찬·심상정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는 사실(<한겨레> 4월11일치)과 권영길·강기갑 의원 당선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 수로 보면 저번에 비해 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중요하다.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의회에 진입 못하는 정당은 백수나 마찬가지다. ‘황금분할’이니 ‘절묘한 선택’이니 하는 얘기들이 있지만 이런 분석은 진보에 해당하는 게 아니다. 어쩌다가 이런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가?







진보가 이념적인 근본주의를 추구하고 있을까? 되레 이념의 얼개가 엉성해서 탈이다. 3월2일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국회 본청 앞에서 국민에게 석고대죄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단식 농성 말고 뭐가 있단 말인가



분열되기 전의 민노당 지도부 몇 사람과 저녁을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때 놀라웠던 것은 책임이 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현실사회주의 붕괴 전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들의 비전에는 현실사회주의 몰락에 대한 깊은 고민이 배어 있지 못했다. 또 한 가지 실망스러웠던 점은 이들의 북한관이 ‘나이브’한 점이었다.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종북주의’ 때문일까. 북한이라는 국가의 억압성과 폐쇄성에 대해 눈과 귀를 막고 있었던 게 아닌가 본다. 이렇듯 내 생각에는 진보의 패배는 진보가 자초한 점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권자 ‘국민’의 선택에도 문제가 적지 않다.

임혁백 교수에 따르면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이 진보세력에 던진 이중적 메시지는 “국민에게 왜 그들을 지지해야 하는지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동시에 “진보세력의 싹을 자르지 않고 4년 또는 5년 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조선일보> 4월17일치·임 교수의 진단은 통합민주당 전체를 ‘진보’에 포함시키는 것이어서 나의 정의와 다르기는 하다). 박명림 교수의 지적처럼 진보는 “내부에서 구체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추상적 원칙을 갖고” 싸우기 때문에 문제였다. 그는 진보정당이 추상성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정책으로 유권자에게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다(<한겨레> 4월11일치).

내가 보기에 진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여전히 분단체제의 정치문화적 지형과 성장제일주의 안에 갇혀 있는 한국 시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책임을 진보정당에만 물을 수는 없다. 여전히 냉전주의적 논리와 신자유주의적 발전주의를 설파하는 언론과 교육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유권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강남이 계급적으로 투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강북의 주변부나 울산 같은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계급적 투표가 별로 없었던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하지만 진보 자체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진보세력은 그동안 민족과 계급이라는 두 가지 범주에 지나치게 집착해 나머지 다양한 범주들을 주요 의제에서 배제하거나 주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 철폐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지만 젠더나 장애인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은 현실의 복잡성을 외면한 결과다(물론 요즘은 장애인이나 여성을 비례대표 후보 1순위에 놓는 게 유행이다). 뭐가 더 중요한지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고정적 우선순위를 두면 서열과 억압이 발생한다. 장애·비장애, 정규·비정규, 지역, 계층, 학력, 나이, 국적, 젠더, 섹슈얼리티, 환경 등 다양한 범주에 대한 고민과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비록 한 석의 의석도 건지지 못했지만 생태, 여성, 평화 문제 등을 계급에 연결시키려는 진보신당의 시도는 건강하게 보인다(하지만 우파 주류 신문 등과 인터뷰하며 민노당의 ‘종북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좋은 전술인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최근 유행하는 진보에 대한 비판과 주문에는 진보에서 ‘우향우’하라는 암시가 깔려 있다. 통합민주당의 유인태 의원은 총선 결과가 “우리가 보여준 오만과 독선 같은 잘못된 행태에 벌을 준 것”이라면서 “경직된 진보”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그러면서 “지금 시절에 FTA 반대한다고 단식 농성하는 그런 진보로는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조선일보> 4월24일치). 하지만 의회 내에서 소수자인 진보 정치인이 어떤 방식으로 FTA 반대운동을 풀어나갈 수 있을까? 단식 농성도 정치적으로 한 가지 선택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경직과 유연의 문제가 아니라 찬성과 반대의 문제다.

“조직노동계급 중심, 종북주의, 이념적 근본주의, 산술적 평등주의”(임혁백)에서 벗어나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첫 번째 것과 두 번째 것은 진보정당이 타파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과연 진보가 이념적인 근본주의를 추구하고 있을까? 특히 진보정당이 근본주의를 내세운 것은,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본 적이 없다. 이들이 ‘한국식 탈레반’은 아니지 않은가? 되레 이념의 얼개가 엉성해서 탈이다. ‘산술적 평균주의’라는 말에도 기존의 평등 개념을 이미 부정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의미가 깔려 있다. 이념과 평등을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념은 무조건 부정적인가



공교롭게도(?) 같은 신문에 실린 김형기 교수의 ‘진보가 사는 10가지 길’(<조선일보> 4월1일치)에도 비슷한 주문이 나타난다. 1) 이념보다는 실생활에서 출발하자. 2) 이상주의와 근본주의를 배격하자. 3) 국민의 평균적 정서에서 벗어나지 말자. 4) 반시장경제·반기업 이미지를 탈각하자. 5) 민주주의라는 단일 차원으로 사고하지 말자. 6) 민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자. 7) 국가안보를 중시하자. 8) 북한 인권문제를 요구하자. 9) 노동의 권리와 윤리를 함께 주장하자. 10) 사회적 대화와 사회적 타협을 지향하자.

일단 보기에는 큰 무리가 없는 요구처럼 보인다. <조선일보>가 아니라 <한겨레>에 실렸더라면 더 좋을 글이다. 특히 6), 8), 9), 10)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한다. 하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토를 달아봐야겠다.

1)과 2) 진보적 언행이 무작정 실생활에서 출발하기는 어렵다. 아무런 생각 없이 구체적 현실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미리 어느 정도 사고의 틀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이념에 연결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러한 이념이나 생각은 구체적인 실생활에서 다시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념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선입관은 버려야 한다. 이상주의와 근본주의를 이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념이 고착된 화석이 되면 곤란하겠지만 진보정당에 이념은 살이고 피다.




진보는 뉴타운 개발 공약에 들떠서 우파에게 표를 던진 대중을 좇아서는 안 된다. 서울 은평구에 조성 중인 뉴타운 지구. (사진/ 한겨레 이정용 기자)




3) ‘국민 정서’에서 동떨어지는 것은 현실의 정당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좌파나 민주적 사회주의는 한국의 ‘국민 정서’에서 이미 많이 벗어나 있는 길이 아닌가. ‘평균적’ 국민 정서에 부합하려면 한나라당처럼 하면 된다. 분단체제하에서 진보정당을 하기 위해서는 되레 ‘국민 정서’에서 당분간 멀어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다수의 중도를 누가 끌어오느냐가 선거에서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진보는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4) 진보정당이 반시장·반기업 이미지를 갖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물론 시장과 기업 없이는 보수도 진보도 존재할 수 없겠지만 진보정당은 시장에 대한 시민적·국가적 견제를 통해서만 사회적 약자의 대변인이 될 수 있다. 그것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진보임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선거전략상 반기업 이미지를 유포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정당에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중도나 보수 정당의 몫이고 ‘노동자 및 농민 프렌들리’는 진보정당의 근본적 자세가 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은 되레 시장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와 ‘회사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시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5) “민주주의와 혁신의 결합을 통한 기업과 경제의 성장 없이는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의 삶의 질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자”는 주장은 과거 성장주의 패러다임의 흘러내림 이론(trickle down theory)을 연상케 한다. 일단 부를 축적하는 게 중요하고 그 다음에 상층부로부터 민중에게로 부가 흘러내릴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박정희 시대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온 얘기 아닌가. 이것이 허구임은 지난 20여 년간 점점 확대돼온 빈부격차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더구나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부의 확대재생산은 환경파괴의 주요한 메커니즘이다. 진보정당이 환경문제를 끌어안아야 한다면 되레 이러한 성장주의에서 벗어나는 일이 긴요하다.

7) 안보가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국가안보 담론에 부정적이거나 무관심한 진보세력을 국민이 불안하게” 생각한다는 주장은 이데올로기적인 발언으로 보인다. 진보세력이라면 안보담론의 허구성과 신성성을 깨뜨리고 그것을 평화담론으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안보담론이 ‘튼튼한 국방’을 강조할 때 진보주의자라면 그것이 가져올 종국적 긴장 및 파국을 미리 예견하고 그것이 ‘국익’보다는 군·산·학 복합체의 이익에 더 잘 부합된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전파해야 하지 않을까?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안보를 강화하는 것이 되레 상대방의 안보를 강화함으로써 자국의 안보를 약화시키는 ‘안보 딜레마’에 있다. 안보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군축을 중심으로 한, 안보에 대한 대안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진보는 개인의 중요성 깨달아야



이렇게 살펴보았듯이 진보를 재구성하라는 여러 가지 요구는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 진보에 대한 새로운 주문이 <조선일보> 같은 우파 신문에서 계속 제기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요구들이 진보의 발전을 가져오기보다는 진보 자체를 무력화해 중도와 구분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대해 진보세력은 분별 있게 대처해야 한다. 외연을 확장하겠다면서 중도층 끌어안기를 최고의 목표로 삼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하는 진보의 전통적 가치를 버리는 것은 자살행위가 될 것이다.



물론 진보의 환골탈태를 통한 재구성은 당연히 필요하다. 특히 그동안 진보정당에서 부분적으로만 관심을 가져왔던 여성주의와 환경주의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형태의 차별과 억압에 민감해지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18대 총선에서 사상 최고로 많은 41명의 여성의원(전체 의석의 13.7%)이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진보는 구체적인 정책을 개발하는 것에 덧붙여 사람 하나하나가 존엄하고 그 자체가 목적이고 수단화돼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은 좌우를 막론하고 집단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집단주의적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진보의 패배는 ‘국민’의 선택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황금분할’이니 ‘국민의 절묘한 선택’이니 ‘균형감각이 높은 위대한 주권자’니 하는 담론을 접하면 뭔가 불편하다. ‘국민’에게 아부하는 것 같아서다. 정당은 시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읽어야 하고 그것을 집합적 의지로 모아 법과 정책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조직이다. 그래서 ‘국민 정서’에서 벗어나는 언행은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국민’은 항상 옳은가? 정당 특히 진보정당은 ‘국민’을 좇아서 따라가는 게 급선무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진보주의자라면 엘리트주의나 전위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어떤 미래지향적 비전을 갖고 대중을 그것으로 이끄는 힘과 사고를 가져야 한다. 뉴타운 개발공약에 들떠서 우파에 표를 던진 대중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 선택’은 과연 옳았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진보를 외면한 표심도 중요하지만 진보를 선택한 시민들의 생각 및 그날 ‘소풍 간’ 유권자의 마음도 동시에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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