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8

1708 조선인 수백 명 군함도 탈출? 시도조차 못 했을 것 -징용 연구 정혜경 박사가 풀어주는 500만 관객 영화 '군함도' 궁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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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경 박사님의 페친님들, 이글에 대하여 꼭 알려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저는 친구신청했지만 안되었습니다.
한 페친을 통해 11년간 일본의 조선인 노무동원을 조사, 연구한 정혜경 박사(공개적이니 존칭은 생략)가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정박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나는 내 중요한 관심사에 대해, 또 내가 아는 문제에 한해서 이야기하고 반론, 질문하겠다. 다음이 해당 내용이다.
"기자: 조선인 징용자들은 임금 착취에도 시달렸다?"
"정박사: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인적·물적·자금의 삼중(三重) 착취 구조를 만들었다. 강제 동원 과정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은 기차 삯과 뱃삯, 밥값까지 빚을 짊어졌다. 작업장에 도착한 뒤에도 일본 기업들은 숙박비와 식비는 물론, 신발과 곡괭이, 이불에도 사용료를 매겼다. 이 빚은 1년 이상 일을 해야만 갚을 수 있었다. 쥐꼬리만 한 임금은 우편 저금이나 연금이라는 명목으로 또다시 착취당했다. 미수금은 조선인들의 탈출을 막는 수단이기도 했다. 사실상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었다."
정박사에게 질문.
1. 일본 사업장까지 가는 기차 삯, 뱃삯, 식비, 하물며 기차안에서 조선인들에게 나눠준 과자까지도, 또 도착 이후의 숙박비(기숙사는 무료, 단 가족이 있어 사택에 사는 경우는 일본인과 같은 임대비용을 납입해야), 곡괭이... 이는 모두 일본 회사가 부담하였다. 따라서 "1년 이상 일을 해야만 갚을" 수 있는 빚, 애당초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동원되는 과정에서 그런 빛을 지게 되었던 사례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혹시 "증언"을 근거로 하고 있다면, 그것을 알려주셔도 좋다. 내가 '위원회'의 출간물을 읽은 기억과 내 채록에는 그런 내용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2. "쥐꼬리만한 임금"도 증언 외에 다른 근거가 있는가? 이는 사실과 다르다. 내가 직접 자료를 보고 논문에서 이용한 것들, 예를 들어 박경식이나 하야시 에이다이 등 "강제연행`강제노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펴낸, 그들 자신들이 편찬, 공간한 많은 분량의 자료로부터 해당 내용을 찾아 계산해보았다. 역시 대단히 많은 금액이 조선인 노무자의 손에 쥐어졌다(박경식 등, 그들은 자신들이 편찬한 자료 속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연구자로 게을렀거나, 알면서도 거짓을 말하였거나, 그중 하나일 것이다).
3. "미수금은 조선인들의 탈출을 막는 수단"이라고 말했는데, 알다시피 대부분의 도주자들은 큰 금액을 남겨둔 채 도망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고, 도착후 짧게는 2-3일 길게는 한두달 내에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미수금(개념이 분명치 않지만, 저축, 연금저축 등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힌다)은 도주를 막을 수 있는 금액, 수단이 결코 되지 못했다. 그것은 상상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저축 등이 조선인의 도주를 막을 만한 것이었다는 증거가 있는가? 대부분의 도주자들이 사업장 도착 이후에 "신속하게" 도주했으므로 그 "미수금"은 미미했다고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에 반하는 자료가 있다면 공개해 주기 바란다.
4. 상기 정박사의 결론,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었다" 관련, 나는 정박사의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증언"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 증언이라는 것이 당시에그들을 고용하였던 많은 회사, 그 기업단체, 그를 관할하는 일본 정부의 문서 등(이들 문서들은 그 내용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일관성을 갖고 있기에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과 크게 배치디는 내용들이다. 연구자로서 이른 바 "사료 비판"을 한다면, 일관성 있는 문서자료가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정박사의 생각은 어떠한가?
5. "사실상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었다"는 결론은 우리 선조들이 '노예, 또는 그와 다를 바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20세기 전반, 우리의 선조들이 그와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수 백년동안 발전해온 소농(peasant)ㅇ,로서 자신의 독자적인 경리를 가진 경제생활의 주체였다. 그들이 1939-45년간 "노예"로 사역당하면서도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반인간적 학대'에도 불구하고 전혀 저항할 수 없었던(쟁의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쟁의" 자체가 정치`사회적으로 예속된 존재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저항"이란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한 사람들이 봉기하는, 그런 의미의 저항을 말한다) 무기력하고 비굴한 존재였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주관적인 질문이니 답하지 않아도 좋다.
이상에 대해 정혜경 박사님의 답변을 기대합니다.
조선인 수백 명 군함도 탈출? 시도조차 못 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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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수백 명 군함도 탈출? 시도조차 못 했을 것
개봉 8일 만에 관객 510만명을 돌파한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는 일제 말기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징용을 당했던 일본 나가사키 남서쪽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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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신매매와 다를바 없다는 중언에 대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위증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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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대에 수풍호발전소나 흥남비료공장등에서도 보여지는 바와 같이 당시의 일본기술이 상당히 앞서 있었슴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자료를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부분이죠.
    그 시대 탄광에서도 여러 사고...매몰 가스누출등...이런걸 방지하고 예방하기 위하여 법률이 제정되고 예방시험소등을 설치하여 운영했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앞서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 사고로 인하여 사망자 부상자등을 어떻게 보상하고 위로했는지 알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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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에 대해서는 더 공부하고 논문에 포함하는 것을 생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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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겠습니다. 만약 논문에 넣지 않는다면 이곳에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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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험소 등, 자료 대단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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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인 수백 명 군함도 탈출? 시도조차 못 했을 것
      조선일보 정리=김성현 기자

      입력 2017.08.04 03:01
      징용 연구 정혜경 박사가 풀어주는 500만 관객 영화 '군함도' 궁금증

      정혜경 박사
      개봉 8일 만에 관객 510만명을 돌파한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는 일제 말기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징용을 당했던 일본 나가사키 남서쪽의 섬 하시마(端島)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45년 당시 조선인 500~800명이 이 섬의 지하 탄광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군함도'는 일본의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화는 조선인 강제징용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탈출극이라는 허구를 뒤섞었다. 이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상상력 사이의 정확한 경계에도 관심이 쏠린다. '일본제국과 조선인 노무자 공출'을 펴낸 강제 동원 연구자 정혜경〈사진〉 박사를 통해 궁금증을 정리했다. 정 박사는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11년간 조사과장으로 일했다.

      ①영화처럼 수백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집단 탈출했다?

      [X] "징용자들은 혹사와 굶주림, 질병에 시달렸고 탈출 시도가 빈번했다. 2차 대전 기간에는 도망자를 감시하기 위해 재향군인회원들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섰다. 인근 섬으로 헤엄쳐 도망가다 익사한 경우도 많았고, 붙잡히면 가혹 행위가 뒤따랐다. 하지만 영화처럼 집단 탈출을 시도하거나 일본군과 무력 충돌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영화 후반부는 상상력의 산물에 가깝다."

      영화 ‘군함도’에서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숙소를 배정받기 위해 내려가는 장면.
      영화 ‘군함도’에서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숙소를 배정받기 위해 내려가는 장면. /CJ엔터테인먼트
      ②군함도에는 조선인 강제징용자만 있었다?

      [X] "강제징용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보면, 영화 '군함도'의 배경인 하시마 탄광에는 조선인 500~800명 외에도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들이 있었다. 1944년 6월 중국인 노동자 205명이 하시마 탄광에 들어왔고, 이듬해 8월까지 15명이 숨졌다는 현지 광업소 기록도 있다. 조선인 생존자들은 '하시마 탄광에 중국인뿐 아니라 미군 포로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③'군함도'는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X] "하시마에서 석탄이 발견된 건 1810년쯤이다. 1870년대부터 본격적인 채굴이 시작됐다. 1916년에는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지만 해저 1000m의 석탄을 캐내는 '심해(深海) 탄광'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노동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도 악명 높았다. 이 때문에 1920년대부터 하시마는 '군함도'와 '감옥섬'으로 불렸다."

      ④조선인 징용자들은 임금 착취에도 시달렸다?

      [O] "1938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인적·물적·자금의 삼중(三重) 착취 구조를 만들었다. 강제 동원 과정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은 기차 삯과 뱃삯, 밥값까지 빚을 짊어졌다. 작업장에 도착한 뒤에도 일본 기업들은 숙박비와 식비는 물론, 신발과 곡괭이, 이불에도 사용료를 매겼다. 이 빚은 1년 이상 일을 해야만 갚을 수 있었다. 쥐꼬리만 한 임금은 우편 저금이나 연금이라는 명목으로 또다시 착취당했다. 미수금은 조선인들의 탈출을 막는 수단이기도 했다. 사실상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04/20170804000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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