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nSeok 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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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단상 - ‘직업’ 을 선택한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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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내 또래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앞으로 우리가 가질 ‘직업’ 이다. 이공계는 잘 모르지만, 인문사회 계열을 전공하는 친구들이 말하는 진로는 그 범위가 대체로 정해져 있다. 명문대를 나오지 못하면 하나같이 공무원을 말하거나, 아니면 늘 시류나 담론에 따른 유망직종이나 전문직 등을 말한다.
하지만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과 관련 없이 정말로 이 일을 내가 원하거나 좋아해서 하고 싶은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우는 목표달성을 위한 효율적 전략과 방법을 좇아 달려가지만 그건 머리(이성)가 외칠 뿐 가슴(마음)은 움직이지 않은 채 머리와 몸이 따로 움직인다. 특히나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정신과 감정의 부조화(不調和)상태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Baudrillard)는 <소비의 사회(1970)> 에서 사람들은 “현대사회에서 생산물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고 지적하였다. 공통의 시민적 가치가 부재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 자리에 사물의 실제적 가치가 아닌 세속적으로 소비되며 충족시키는 ‘이미지’를 추구한다. 예컨대 간호, 청소, 요양, 복지 등 사회를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사회적 노동은 그 처우나 대우 모두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는 이 직업들이 사회적으로 지니는 본질적 가치가 아닌 ‘시장’ 의 이름에 의거한 상징성과 이미지에 따라 평가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좋은’ 직장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대기업/공기업 입사시험 내지 수능/공무원 시험 그리고 각종 전문직 자격시험 등이 갖고 있는 상징과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다. 수능시험을 잘 보지 못한 학생들이 좌절하는 부분은 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남의 점수와 비교해 순위를 맺는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학의 이미지-지위를 얻는 축에 들지 못한 것에 있다.
맨얼굴의 실체적인 모습보다는 화장하고 아름답게 꾸민 세상 속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를 현실로 믿는 경향이 있다. 경쟁에 승리한 사람들은 스스로 본인은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즉, 상징과 이미지의 본질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나’ 로 다시 태어나게끔 해줌에 있다. 한국사회에서 시험은 이를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이자 제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 질 수는 없는 걸까? 스스로 내면적으로 느끼는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성취 내지 보람을 안겨주는 직업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일까?
과거의 근대 산업혁명 시기이후 인류는 그 간 자급자족해온 생산물의 생산방식이 달라졌다. 거대한 공장이 탄생하고 분업과 기계화로 인해 인류는 자신이 온전히 생산한 재화의 결과물로부터 유리되기 시작하며 그 관계가 소원해지기 이르렀다. 칼 맑스는 이같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기쁨과 보람이 유리되는 경향을 두고 ‘노동의 소외현상’ 이라 지칭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한 근본적인 인류와 생산물과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전제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떤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동시에 계급적 관계망 속 어느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고착화된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에서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의 삶만을 보장받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전과 꿈을 찾아가라는 말만큼 비열하고 위선적인 말은 없다고 말이다. 유일하게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임금’ 일뿐, 따라서 한국의 노동조합 역시 임금인상을 최우선의 투쟁-협상 목표로 내부자 중심의 노동운동을 조직해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본의 국지적 이동이 보장되는 자본제 사회에서는 노동보다 자본이 우위에 있는 만큼, 노동이 재생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이상으로 임금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과 내적보람의 성취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위선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의 본질은 타인의 시간과 노력을 이용한 부의 축적에 있다. 이를 성공한 자들은 자유가 주어질 것이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평생을 종속과 착취를 감내하며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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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배우고 똑똑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대부분은 비평가 출신들이다. 그들은 정제되고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며, 자신이 축적한 지식과 그릇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며 비판한다. 나는 정말 한국에 훌륭한 비평가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진보-보수 관계없이, 자신들이 견지한 시선에 대한 의심보다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향해 조언과 충언을 내뱉는 것이 우선이다. 예로부터 무릇 양반들의 나라답다. 한국은 ‘서생들의 천국’이다.
하지만 세계를 움직이고 인류에게 커다란 진보를 안겨준 사람들 중에 비평가는 없다. 기득권의 강고함에 반발하여 넓은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균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결코 비평가가 아니다. 인류역사 상 편리와 혁신을 가져다 준 사람들은 세상은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믿음과 열정을 가진 ‘설계자’(designer) 이자 ‘실행가'(activator) 들이었다. 매사에 정치가 우선이 되고 사회에 비평이 주류가 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건전한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나는 비평가들이나 지식인들의 역할을 결코 폄하하지는 않는다. 더 좋은 세상을 향한 그들의 애정 어린 충고와 고언은 더욱이 중앙 정치권력과 대중 추수주의가 강한 한국에서는 더욱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세상의 진보에 중심에 서 있는 자들은 스스로 내 삶을 디자인하고자 하는 개개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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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기업 애플의 창립자인 스티브 잡스는 기업이 존재하는 본질로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바꾸자하는 열정”을 강조하였다. 자신이 만든 제품을 선택하는 것은 소비자들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나의 필요”에 의해 판단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여주기 전까지는 그들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20세기 자동차에 대한 시선을 바꾼 헨리 포드 역시 그랬고 전기차의 미래를 앞당긴 일론 머스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망직종, 트렌드 등에 휩쓸리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방향을 찾아 그에 걸맞게 구체적인 비전과 계획을 디자인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현대사회의 부속물로 전락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삶에 목적이 없으면 오직 공허함의 바람만이 나를 휩쓸어간다. 이를 채우기 위해 하나의 수단으로 2030세대들은 암호 화폐 등의 투기성 자산에 주목하는 듯하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이란 결국 우리 스스로 절대적으로 치부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하는 정신, 혁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편견을 깨기 위해 인문학이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끊임없이 사색을 추구하며 설계한 비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실행으로 옮긴다면 그 순간의 성취와 희열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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