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9

중국 지앙웬 감독-주연 '귀신이 온다' - 조선일보

중국 지앙웬 감독-주연 '귀신이 온다' - 조선일보

중국 지앙웬 감독-주연 '귀신이 온다'
 박선이기자
입력 2001.10.21 18:16
지앙웬의 ‘귀신이 온다 ’.마을사람들은 난데없이 떠맡게 된 일본군 포로 때문에 위태로운 나날을 보낸다.(위),한밤중 마다산에게 떠맡겨진 자루엔 일본군 하나야 고사부로가 들어있었다.
지앙웬의 ‘귀신이 온다 ’.마을사람들은 난데없이 떠맡게 된 일본군 포로 때문에 위태로운 나날을 보낸다.(위),한밤중 마다산에게 떠맡겨진 자루엔 일본군 하나야 고사부로가 들어있었다.
지난해 5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페스티벌 극장. 경쟁부문 출품작
'귀신이 온다' 공식 상영이 끝난 페스티벌 극장 안에는 잠깐 정적이
흘렀다. 흔히 터져나오는 박수 소리나 상투적인 휘파람 소리도 없는,
숨이 잠깐 멈춘 듯한 정적이었다. 그리고 금세 극장 안은 박수의
격랑으로 흔들렸다. 그같은 반응은 그랑프리 수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붉은수수밭' '부용진'의 배우로 먼저 알려진 지앙웬(강문ㆍ38)의
두번째 감독작 '귀신이 온다'(귀자래료ㆍ27일 개봉)는 힘이 넘치는
영화다. 북경에서 성장하는 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첫 감독 작품
'햇빛 쏟아지던 날들'이 섬세하게 짜내린 명주같았다면, 이 영화는
툭툭한 짜임이 올올이 느껴지는 무명베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를 무대로
한 이 영화에서 감독은 역사에 대한 발언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어깨에 힘주지 않고 역설적인 유머를 섞어 풀어낸다.

1945년 겨울. 대문도 없는 산골 오두막집에서 마다산(지앙웬)과 여자가
뜨거운 정을 나누는데, 밖에 기척이 있다. "나야,"란 말에 안방문을 연
마다산의 이마에 와닿는 건 차가운 총구. 섣달 그믐날 찾아갈 테니 "잘
보관해두라"던 보따리 2개엔 일본군 하나야 고사부로(가가와
테루유키)와 중국인 통역관 동한첸(유안 딩)이 들어있다.

웃지못할 코미디는 여기서부터 계속된다. 마을엔 일본군이 주둔해있다.
아침 저녁으로 군가를 연주하며 일본군이 행진하고, 동네 아이들은
사탕얻어먹는 맛에 군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런 상황에서 '나' 란
사람이 찾아올 때까지 일본군과 통역을 포로로 지켜야하는 것이다. 매일
매일은 위기의 연장이다. 일본군인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여달라고 하지만, 통역은 계속 딴 얘길하며 목숨을 부지한다. 거짓
통역에 속아 포로에게 만두 대접까지 하던 마을 사람들은 닭서리
하러왔던 일본군에게 거의 들킬 뻔하고, 이들의 목을 벨 휘갱이를
구해오지만, 그마저 자기 칼의 시대가 끝났다며 돌아가버린다.


감독은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다. 덕분에 일본군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제2차대전 기록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카메라는 마치 40, 50년대 영화같은 푸근한 감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일본군이 밝은 낮의 넓은 야외 공간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비해 마을 사람들이 움직이는 장면은 야심한 시각,
골방이거나 헛간이다. 마다산을 비롯, 마을 사람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제한된 조명 속에서 클로즈업 쇼트를 주로 사용하면서 이들이 처한
절대절명의 위기감을 강조한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신나는 군가와 마을
사람들의 위태로운 음모가 촘촘히 교직되면서 파국을 향해 치닫는 긴장은
탄탄한 기반을 쌓는다.

삶과 죽음이 아슬아슬하게 비켜지나가는 경계선은 선과 악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선이 꼭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정교하게 짜넣은
인물들과 사건을 통해, 전쟁의 광기란 것은 일상적인 선악의 문제가
확장된 것이라고 나지막하게 말한다.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던 긴장은
8월15일 주둔군과 마을 사람의 '화해의 파티'에서 디오니소스적 축제로
화려하게 폭발한다. 이미 정오에 쇼와 천황의 "무조건 항복" 방송이
있었지만, 이를 아는 것은 주둔군 최고위 장교 뿐이며, 이날 밤의 비극은
이같은 범죄적 역사의 한 예일 뿐이다.

정의와 순리를 지키려는 선한 개인이 역사의 죄인으로 치부되는, 그래서
선과 악의 자리가 뒤바뀌는 부조리를 이 영화는 강렬한 드라마를 통해
전달한다. 지앙웬은 '붉은 수수밭'처럼 화려하고 잔혹한 이미지로 갈
수 있었던 이야기를 일부러 택한 흑백 화면을 통해 간결하고 힘차게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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