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죄악인가_권혁범
씨선 · 2019. 12. · 0
이 책은?
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읽기를 바란다. 치우쳐진 민족적 의식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이켜주어 세상을 좀 더 수평적인 잣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만큼 보편적으로 애국심에 대해 미망한 자세를 가진 국가가 있을까. 우리 세대의 가장 거대한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어서 자각하기를.
1장. ‘우리’, 민족, 민족주의
에네스트 르낭은, 이미 유명해진 발언이지만, 민족의 존재란, “개인의 존재가 삶에 대한 영속적인 긍정인 것처럼”. “매일 매일의 국민투표” 라고까지 주장한다. 물론 정의가 완전한 경우는 수학적이거나 엄밀한 통제하에 있는 물리적 대상뿐이므로 민족이나 민족주의의 정의가 애매모호한 것은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모든 언어 개념의 한계이다. 애매모호함은 정도의 문제이기 때문에 민족 개념이 어떤 본질적 결함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p14
한국인은 ‘단일민족’ (사실은 단일종족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만)이라는 게 긍정적인지도 불확실하지만 그것은 사실에 어긋난다. 사실 ‘단일’을 이룬 것은 근대 초엽부터 분단까지의 짧은 시간대에만 한정된다. 혈통을 따지더라도 일본, 중국, 거란, 여진, 말갈, 심지어 아랍계 등의 피가 섞여 있다. 몽고족과의 혼혈, ‘왜인’과의 혼혈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화교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중략) 이런 점들을 무시하는 것은 영토순결주의에 가까운 발상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에서 ‘이민족의 흔적’을 삭제하고 부정하려는 근대 민족주의의 결과다.
p17
‘일본’의 의미에 대해 실증적으로 천착한 아미노 요시히코에 의하면 기원전 3, 4세기경부터 야요이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주로 코리아 반도에서 “열도 서부, 북큐우슈, 세토나이카이 부근, 킹키 등으로 이주해”왔다. 이들은 북동아시아계 퉁구스의 후예로 보이며 7세기까지 약 1천 년 동안 무려 120만 명 이상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다. 오늘날의 민족주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에 한국의 ‘문화를 전수해주었다는 자부심’에 도움이 되는 현상이지만 사실은 이들에게는 ‘일본인’ 이라든가 ‘한국인’ 이라는 정체성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들은 바다를 중심으로 한 문화생활공동체에 속했던 집단, 즉 ‘해민’ 이었을 뿐이다.
p19
대체로 민족을 둘러싼 논의에 보이는 것은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 즉 종족적 민족론과 정치시민적 민족론이다. 전자는 집단적 공통성 즉, 혈연적 문화, 언어적 기원과 동질성을 강조한다. 대체로 민족의 기원이 고대사회에서 시작되었으며 친족의 확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시민적 민족론은 민족이 근대에 와서야 생긴 개념이고 그것은 구성원 간의 평등한 정치적 시민적 권리 및 동일성을 기초로 발생한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버나드 야크가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두 가지로 구분한 것도 이와 유사하다. 독일, 일본 그리고 대부분의 동유럽국가에 존재하는 것은 민족에 대해 에스닉(ethnic: 종족적)한 입장을 취한다. 반대로 참여자의 정치적 정체성과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는 시민적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는 프랑스, 캐나다 및 미국에 존재하는 유형이다. 그것은 ethnos 대 demos간의 차이다. 후자 즉 시민(혹은 공공) 민족은 평등하고 권리를 가진 시민들, 공유된 정치적 실천 및 가치에 대한 애국적 귀속에 부착된 시민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다라서 후자는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를 축으로 하는 게몽사상과 연동된다. 하지만 전자는 그러한 사상을 부정하고 개인의 가장 깊은 귀속감이 선택된 게 아니고 물려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개인을 규정하는 것은 민족·종족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즉 에스닉 민족의 신화는 민족정체성에서 개인의 선택은 전혀 없다고 이야기하는 반면에 시민민족론에 의하면 민족 정체성은 선택의 문제고 같은 생각을 가진 개인들과 공유하는 정치적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시민민족은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하는, ‘헌법적 애국주의’와 일맥상통한다.
p26
2장. 민족과 민족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공통된 특성 때문에 민족이 생긴 게 아니라 민족주의가 공통된 특성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집단과의 차이를 인식하고 형성하면서 자신을 동질적 집단으로 재구성하는 게 민족주의다. 고자카이가 말했듯,'여러 인간이 모여서 생긴 집합이 하나의 민족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집단이 고유의 문화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의 구성원이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만들고 범주화함으로써 복수의 집단으로 구별하고 그것을 민족이라는 단위로 파악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처음부터 동일성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운동이 먼저 있고, 그것이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p50
어네스트 겔너는 그것이 근대적 산업화에 필요한 대규모의 교육받은 계층을 만들어내려는 필요에 대응해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즉 산업화에 필요한 인구를 확보해야 하는데 마을의 규모는 너무 작고 인류공동체는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중간단계에 있는 민족공동체가 적정한 규모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산업화에 필요한 인적 자원으로 양성되는 데는 가족과 촌락뿐만 아니라 적정한 규모의 교육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촌락은 그것을 자생적으로 재생산하지 못한다. 따라서 근대사회의 시민권 자격의 요건이 글을 쓰고 읽는 능력 및 기술적 능력이라면 “민족 규모의 교육제도만이 그러한 완전한 시민들을 산출”할 수 있다. 또한 겔너는 민족주의란 산업화나 근대화 그 자체보다는 “그 고르지 못한 확신과 관련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즉 산업화는 날카로운 사회적 계층분화를 일으키고 그것은 전통사회에서와는 달리 오랜 관습에 의해 별다른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하고 사회적 혁명의 기회를 제공하며 그 결과 민족이 분리되거나 독립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균열이 즉, 선진적 집단과 낙후된 집단 간에 보이는 ‘유전적’ 및 문화적 특징들에 의해 쉽사리 식별이 된다면, 자신들을 ‘민족’으로 생각하고 독립을 추구할 강력한 유인과 그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p55
이 문제는 거꾸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자본-노동, 지배-피지배 간의 계급적 균열을 만든다. 이 균열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지향하는 모든 주권국가의 고민이었다. 그 해결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흘러내림 이론(trickle down theory)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회의 부가 일정 이상 상층부에 축적되면 하층부로 흘러내리게 된다는 근대화이론의 일종이다. 따라서 빈곤상태에 놓인 피지배집단은 미래의 불확실한 약속을 받아들여 혁명을 택하지 않고 현재 상태에 머물게 된다. 또 하나의 해결책은 민족주의가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현재의 고통은 ‘조국 근대화’ 및 ‘민족번영’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다. 즉 민족주의 신화가 게급 간 갈등을 은폐하고 계급적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박정희시대의 관제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산업화과정에서 맡은 이데올로기적 역할이 대표적 예다.
p57
가족노동에 대해서는 회사가 임금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특히 여성은 임금 없는 노동을 함으로써 노동재생산에 이바지한다. 그런데 가정구조는 ‘종족’이라고 불리는 공동체에 위치되어 있다. 따라서 한 국가 내의 경계 안에는 직업적 위계질서와 함께 노동력이 ‘종족화’되어 있다.
p58
우파민족주의자들은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단군은 매우 익숙한 개념이지만 조선시대 사람들 대다수가 단군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단군은 조선 말기에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애국계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민족적 구심점을 구축하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발견, 확대한 인물에 불과하다. 북조선에서는 단군왕릉이 세워졌다. 남북이 똑같이 단군을 시조로 수용하는 셈이다. 을지문덕도 마찬가지다. 조선 말기에도 을지문덕을 기억하는 사람은 극소수 지식인에 불과했다. 을지문덕은 순전히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에 의해서 발굴된 영웅이다. 실재 인물 이순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박정희시대의 군사주의적 필요, 즉 군부독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순신 장군’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민족의 영웅이 되었겠는가? 100년 후의 한국에서 누구를 영웅으로 만들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서 문화 및 전통에 대해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우리는 어떤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공유한다고 생각하지만 전통은 각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재구성되는 문화적 체계이며 그것은 항상 ‘현대적’이다. 따라서 일정한 “역사의 왜곡은 민족형성의 일부다.”
p61
민족은 이유를 막론하고 “조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가령 “빵이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 혈연적, 언어적, 종교적, 인종적, 문화적 차이 등과 관계없이 (물론 관련 있을 수도 있지만) 가능한 의식인 것이다. 즉 민족은 많은 논쟁에도 불과하고 객관적 기준이 없으며, 다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같은 민족’ 혹은 ‘우리 민족’ 이라고 생각할 때 정확히 그 의미가 드러난다. 민족은 대다수의 주관적 관념에 기초한 의식이고 국가에 의해서 지탱되는 범주다.
p62
3장. 민족의 ‘안’과 ‘밖’ -위험한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근대국가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근대국가는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정치경제적 해석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요구하는 일정한 단위의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민족의 생산’ 이 요구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종족적 집단은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 탄생하였다. 자본제로의 이행에서 필수적인 봉건적 신분제 폐지에서 민족주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회원’ 간의 적어도 형식적 평등과 동등한 권리를 내포하는 민족의 개념은 봉건적/중세적 신분제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임금노동자의 창출에 직결되었다. 동질적 집단적 귀속감은 강고한 신분적 위게질서에 의거해서는 형성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근대민족의 형성은 결국 적어도 형식적 평등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및 공화제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p75
민족주의가 강해지면 계급의식은 그만큼 약화된다. 출구를 찾는 계급적 분노가 ‘조국과 민족의 번영’ 이라는 명분으로 치환되고 만다. 그것을 통해서 지배집단의 헤게모니와 이익은 더욱 강화된다.
p80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2007년에 한국의 ‘단일민족’ 이데올로기가 다양한 인종들 간의 이해와 관용, 우호증진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비판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리버럴(liberal) 민족주의의 고민은 시민적 ‘회원자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다수의 정체성을 특권화하면서 소수집단을 불가피하게 ‘이등시민’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높다는 점이다. 한국의 순혈적 민족주의가 해외 입양인, 혼혈인 및 중국 조선족 동포에 대해 가하 정신적 상처를 생각해보라.
p82
신기욱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긍정적인 내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압력이 단순한 내집단 선호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내집단 구성원들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백인-남성-부자-비장애인-이성애자-발전주의자들이 민족이나 ‘바람직한’ 사람을 ‘대표’하게 되고 그들의 헤게모니는 소수종족-여성-가난한자-장애인-동성애자-생태주의자를 침묵케 한다. 후자는 ‘비민족’, ‘비국민’이 되고 만다.
p83
김상봉의 발언처럼, 민족주의가 폐기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 없이는 “개인을 국가의 부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으로 훈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강제성 여부를 떠나서 ‘우리’의 일원이 된다는 ‘자아확장의 감각’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이다. 사람에게는 개체적 실존을 초월하여 보편적 프로젝트에 헌신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이상은 그 욕망을 실현하기에 적합한 매개체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일을 행했다.
p86
물론 앤소니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민족은 “사회적 결속, 질서, 그리고 따뜻함”을 제공한다. 또한 그것은 “문화적 충족, 뿌리, 안전 및 우애에 대한 삶의 욕구를 충족” 시키며 반면에 전 지구적 문화는 “‘종교의 대용물’ 만이 제공해줄 수 있는 집단적 신앙, 위신, 희망의 자료를 제공할 수가” 없다. 개인은 민족에 대한 귀속감을 통하여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서고 개체적 불안감을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적인 것을 초월하여 공적인 것에 헌신할 때 느끼는 희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88
사회학자 신기욱은 ‘집단적 민족주의’ 때문에 자유주의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고 민주화운동조차도 “인종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이고 유기적인 한민족 개념”을 뿌리 뽑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의견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한다. 왜냐하면 정치사회적 자유를 박탈당한 중요한 이유는 반공주의, 국가주의, 권위주의 권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민족주의는 그 박탈감을 덮거나 위로하는 이데올로기였다.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민족주의로부터, 로날드 바이너의 표현을 빌면, “비자유주의적 벌침”을 빼려고 노력한다. 윤평중도 ‘벌침’을 제어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는 “민족주의는 우리의 운명” 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의 “장점을 극대화하되 부작용은 섬세히 제어하는 지혜와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원칙이나 부분적 긍정은 듣기에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위적 부분적 선택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이것은 자동차에서 타이어를 빼버리는 선택과 다름 없지 않을까?
p93
4장. 민족주의와 젠더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가 페미니즘과 충동할 수 있다는 입장이 나온 것은 최근의 현상이다. 1980년대까지는 민주화와 관련해서 민족 문제에 관심이 강했고 운동권에서도 민주화와 ‘민족해방’에 대한 관심이 여성문제를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젠더문제를 기껏해야 여러 부문 중의 하나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젠더는 민족이나 계급에 귀속되어 있었다. 대다수 민족주의 이론과 담론은 논의의 주제로서 여성을 배제했다. 민족은 공적 문제이기 때문에 공사구분과 남녀구분을 일치시키는 사고에서 사적 영역을 담당하는 여성은 배제되었다. 즉 남자는 ‘공(민족)’ 여성은 ‘사(가정)’라는 이분법에 따라 여성이 논의에서 배제되었다. “공적 남성, 사적 여성”이라는 이분법은 여성차별 및 억압에서 핵심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은 ‘자연’과 동일시되고 남자는 ‘문명’ㅏ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당연히 민족은 ‘문명’의 일부고 따라서 여성은 ‘문명’과 관련이 없는 젠더로 무시되었다.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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