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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진조차 몰래 봐야 했던 시인, 그렇게 아버지가 되다
등록 :2021-05-24
거대한 100년, 김수영 - ①가족
김수영 시인의 막내 여동생 송자(앞줄 맨 오른쪽)씨의 경기여고 졸업 기념 사진. 맨 뒤에 모자를 쓴 김수영 시인이 있고, 그 오른쪽이 차례로 부인 김현경 여사와 누이동생 김수명 선생이다. 앞줄 가운데가 어머니 안형순. 김수명 선생의 앨범에 있던 사진을 기자가 촬영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몰래 보는 아버지의 사진
1921년에 태어나 1968년에 세상을 뜬 시인 김수영. 올해는 김수영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파고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시인의 삶을 떠올려본다. 누구보다 뜨겁게 자유를 갈망했지만 누구보다 먼저 혁명의 실패를 예감했고 그럼에도 누구보다 치열하게 혁명 이후에 대해 사유했던 시인. 이것만으로도 김수영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오랫동안 자유와 혁명의 시인으로 호명되었던 김수영의 시에는 가족이 자주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아버지는 단연코 높은 출현 빈도를 보인다. 특히 해방기 김수영의 시에서는 아버지를 바로 보지 못하는 ‘나’가 눈에 띈다. 1947년에 쓰인 시 ‘이’(虱)에서 아버지는 “도립(倒立)한 나의 아버지의/ 얼굴”로 등장한다. 아버지의 얼굴은 왜 거꾸로 서 있으며 “나는” 왜 “한 번도 아버지의/ 수염을 바로는 보지/ 못하였”을까? 바로 앞에 “나는 한 번도 이(虱)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문장이 나란히 놓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와 ‘아버지의 수염’은 시의 화자가 보지 못하거나 바로 보지 못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고, ‘나’를 괴롭히는 대상이라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김태욱과 안형순 사이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수영은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한 아이였다. 폐렴, 백일해 등을 앓으며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겼다고 하니 집안 어른들이 얼마나 그를 애지중지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병약하지만 총명한 아이였던 김수영은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고 이후 가세가 기울면서는 집안을 일으킬 거라는 기대까지 받았던 듯하다. 김수영이 상업학교를 나온 것은 부친의 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뜻대로 살지는 못했다.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차 도쿄로 건너간 김수영은 그곳에서 미즈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에 들어가 연출 수업을 받으며 연극에 경도되었고 해방 후에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연극도 시도 부친이 그린 장남의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을 테니 부친의 얼굴을 바로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병세가 악화되어 모친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으니 그가 느꼈을 압박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쓴 시 ‘아버지의 사진’(1949)에서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바로 보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숨어”서 보는 화자가 등장한다. 아버지의 사진조차 정면으로 마주 보지 못하는 화자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비참과 조바심을 느낀다. 장남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던 김수영은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김수영의 초기 시들에서 ‘아버지’는 보는 행위를 동반하며 성찰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등장한다.
김수영 시인의 젊은 시절 사진. 잘 알려진 시인의 사진들과 달리 단정한 머리 모양이 인상적이다. 누이동생 김수명 선생이 보관하고 있는 사진을 기자가 촬영했다. 언론에는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봉규 선임기자
김수영 시인의 아버지 김태욱(김수명 제공). 김봉규 선임기자
누이의 방, 자신을 비추는 거울
누이가 등장하는 김수영의 시로는 ‘누이야 장하고나!’와 ‘누이의 방’을 눈여겨볼 만하다. 둘 다 ‘신귀거래’ 연작시의 하나다. ‘신귀거래’ 연작시는 1961년 6월3일부터 8월25일까지 쓰인 시로 5·16 군사정변 이후 김수영의 내면을 짐작하게 한다. 4·19 혁명을 향한 기대가 컸던 만큼 이 혁명이 변질되어가고 있고 실패할 것임을 누구보다 일찍 예감한 김수영이었지만 5·16 군사정변과 같은 방식으로 귀결될 것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거나 잠꼬대 같은 말을 늘어놓는 ‘신귀거래’ 연작시들을 통해서 당시 그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연작시들 중에서도 누이가 등장하는 시들은 결이 좀 다르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너는 이 말의 뜻을 아느냐
너의 방에 걸어 놓은 오빠의 사진
나에게는 ‘동생의 사진’을 보고도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진혼가를 피해 왔다
그전에 돌아간 아버지의 진혼가가 우스꽝스러웠던 것을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그 사진을 십 년 만에 곰곰이 정시(正視)하면서
이내 거북해서 너의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십 년이란 한 사람이 준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세월이다
- ‘누이야 장하고나!-신귀거래7’ 부분
누이를 호명하며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쓰인 이 시에는 가슴 아픈 가족사가 숨어 있다. 의용군에 동원된 오빠의 사진을 10년이 넘도록 방에 걸어 놓은 누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김수영은 “몇 번이고 그의 진혼가를 피해 왔”던 자신을 돌아본다. 어떻게 가게 되었든 북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협이 되던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진혼가를 부를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애도의 시간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이별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죽음’인지 ‘실종’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들이 견뎌야 하는 시간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누이의 방에서 ‘동생의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을 십 년 만에 곰곰이 정시(正視)하”다가 “이내 거북해서 너의 방을 뛰쳐나오”면서도 시인은 “돌풍처럼” “당돌하고 시원하게” 누이에게 장하다고 말한다.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라는 선택지밖에 없던 시절, 막막하고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김수영은 누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침잠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누이의 방-신귀거래8’에서도 “언제나/ 너무도 정돈되어 있”는 누이의 방을 보며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라고 의문을 품음으로써 5·16 이후의 세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성찰의 태도는 ‘누이’가 등장하는 ‘신귀거래’ 연작시에서 두드러진다.
‘나의 가족’ 육필원고(김현경 제공). 김봉규 선임기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가족’이라는 보통명사로 가족 구성원 전체를 통틀어서 호명하는 시 ‘나의 가족’(1954)은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부산에 머물다 서울로 올라온 김수영이 신당동에서 다른 가족과 함께 살던 시기에 썼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모여 사는 것으로 보아 성북동으로 분가해 나가기 전에 쓴 시로 읽힌다.
김수영은 ‘나의 가족’에게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에 주목한다. 그것은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바람이자 주체의 인식에 변화를 가져오는 바람이다. “나의 눈을 밝게” 하고 가족들이 떠드는 소리조차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고 느낄 정도의 인식의 변화가 이 시기의 김수영에게 찾아온 듯하다.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도 소중하고,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조화와 통일을 이룰 줄 아는 것도 뿌듯하다. 위대함은 “고대 조각의 사진” 같은 특별함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함 속에 위대함이 있고 거칢 속에서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이 일기도 함을 이 무렵의 김수영은 깨달았던 것 같다. 그것을 그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이라는 혹독한 체험,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간과 그로 인해 들여다보게 되었을 자신의 내면, 그런 성찰의 시간이 가족과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좋았겠다거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 보고 짚어 보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일말의 후회,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는 말에서 감지되는 자조적 긍정의 어조는 가족이 일궈내는 일상의 풍경에 김수영이 평화롭게 머물지 못할 것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경수 교수.
작년 12월 국립극단에서 김수영의 시를 바탕으로 한 연극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를 무대에 올렸다. 김수영을 읽으며 20대를 보냈던 아버지 세대와 오늘의 아들 세대의 갈등과 공감을 그린 따뜻한 연극이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되어야 했다. 이 연극에서 마지막으로 낭송된 시가 ‘사랑의 변주곡’이었다. 긴 절망의 시간을 지나 아버지가 된 김수영이 자식 세대에게 전하는 사랑의 예언이다. 김수영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아직도 우리가 넘어야 할 것이 많음을 일러준다. 그토록 싫어했던 기성세대의 모습을 닮아버린 우리를 향해 그는 아프게 묻는다.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뜨거운 이 시인을 보라. 현재의 시인으로 펄펄 살아 숨 쉬는 김수영을 다시 읽어야겠다.
이경수 중앙대 교수·문학평론가
나의 가족
- 김수영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 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 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 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대로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 안에서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 보고 짚어 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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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96339.html#csidx041713bbce84276a8affbe53d485b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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