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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해 한평생 투쟁…이금주 회장 별세
등록 :2021-12-13 08:47수정 :2021-12-13 09:03
김용희 기자
12일 지병으로 세상 떠나…향년 101살
광주유족회 이끌며 일본정부 상대 투쟁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일제가 일으킨 전쟁 피해자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이 12일 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1.
1920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이 전 회장은 1940년 10월 김도민씨와 결혼했지만, 3년 만에 태평양전쟁으로 남편을 잃으며 일제와 평생 싸웠다. 남편 김씨는 1942년 11월 일본 해군 군무원으로 남태평양으로 끌려가 1943년 11월25일 남태평양 타라와섬에서 미군의 대규모 상륙작전 때 숨졌다.
1948년 광주로 이전한 고인은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인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초대 회장을 맡아 일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에 힘썼다. 그의 나이 69살 때였다.
1990년대부터는 피해자들을 결집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본격적인 소송에 나섰다. 1992년 2월 원고 1273명이 참여한 ‘광주천인’ 소송을 시작으로, 같은 해 8월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소송, 12월 일본군 ‘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등이 원고로 참여한 ‘관부재판’ 소송, 1995년 비·시(B‧C)급 포로감시원 소송, 1999년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2006년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한 한일회담 문서공개 소송 등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상대로 지금까지 7건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일본 사법부에 제기했다.
2019년 12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고 웃고 있는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이 회장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일본어로 꼼꼼하게 정리하며 재판을 지원했다. 당시 이 회장은 증인출석, 시민단체와의 연대 활동 등으로 일본을 오간 것만 80여 차례가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법정에서 17번의 기각을 당하는 등 소송은 번번이 패소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한일회담 문서 공개’ 소송에도 직접 원고로 나서는 등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다. 2003년 12월19일에는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법사위 위원들에게 집적 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을 제정한 데 이어 40년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한일회담’ 문서를 공개했다. 이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해 정부 최초로 피해자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나서기까지 광주유족회를 이끌어 오며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은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지만 양금덕 할머니 등 일본 소송 원고들이 2012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2018년 11월29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하는 결과를 얻었다. 이 회장은 2011년 외아들과 며느리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광주 생활을 청산하고 손녀가 있는 전남 순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해왔다.
정부는 2019년 12월 일제 피해자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해 이 회장에게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빈소는 광주 천지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5일 오전이다. 장지는 순천시립공원묘지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1990년 대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광주유족회장이 광주 자택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23033.html#csidx7308347ea62d4a59d8b8c75f5f857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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