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을 실천한 기업인 남호 이종만 선생-신일섭-전 호남대 교수·녹색연합 대표
2021년 12월 01일(수) 07:00가가
신일섭-전 호남대 교수·녹색연합 대표
돈이란 무엇인가. 모으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인가 아니면 쓰기 위해 모으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쓰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누어 주기 위해 돈을 벌었던 사람이 있다. 바로 경남 울산군(현 울산광역시) 대현면 출신 사업가 남호 이종만(1886~1977)이다. 그가 활동했던 때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과 지배로 매우 어려운 시대였다.
남호 이종만은 일제 시기 1930년대 광산업으로 큰 돈을 벌어 기업가이자 경제인으로 성장했고 상해 임시정부 독립 활동 자금을 지원했다. 해방 후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는 김구 선생과 함께 북행했다가 그곳에 남아 1·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국전선 의장 등을 역임했다. 남한 출신 기업인으로 북한에 남아 중추적으로 활동하다 일생을 마쳤다는 것이 언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일제 시기 그의 활동을 보면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가라고 해서 모두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를 예리하게 비판했던 마르크스는 당시 계급적 모순의 심각함 속에서도 이윤과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년 시절 영특했던 이종만은 고향 서당에서 책 보는 것을 좋아해 동양 고전은 물론 문학, 철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인들의 간난신고한 삶을 보면서 그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총독부의 금광산업 정책을 파악하고 광산업에 뛰어들었다. 이종만은 함경남도 소재 사금(砂金) 광산이었던 영평광산을 매입하면서 1930년대 조선 최대의 광구 소유자로 성장했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금광업에 개가를 올린 사람은 조선 최대의 갑부였던 최창학이나 방응모, 이종만 등이었는데 남호 이종만은 이들과 달리 독특한 경영 철학의 소유자였다.
이종만은 일제의 착취와 지주들의 수탈에 허덕이는 농민들을 위해 1937년 7월 대동농촌사(大同農村社)를 설립했다. 농촌사 설립은 원래 꿈꾸어 왔던 숙원사업이었으며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또한 교육과 계몽을 위해 대동출판사를 운영하고 대동광산조합 결성과 함께 대동학원을 세웠으며, 광업기술자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인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것들은 이종만의 이상적인 대동 콘체른(기업 결합) 실현을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는데 대동농촌사의 운영에서 그 진수를 볼 수 있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식민지 침탈이 가중되자 농촌의 고리대와 고율 소작료 수탈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종만은 ‘작인(作人)에게 전지(田地)를’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간한 땅을 경작하는 빈농에게 나누어주고 소작인들은 계속해서 그 땅을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소작료는 3분의 1만 내게 하고 30년의 소작 연한을 채우고 나면 수확물을 경작자가 모두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소작 농민의 자력갱생과 더불어 가난한 농촌의 자립경제를 도모하기 위한 조처였다. 대동농촌사가 설립된 지역의 모든 농민은 농촌사 조직원이었으며 개인 간의 토지 거래를 막고 경작자의 영구 자작 농지가 되도록 했다. 그는 대동농촌사를 통해 자신의 이상촌을 건설했던 것이다.
이종만의 대동농촌사 조직은 첫째 합리적인 토지 분배를 통해 지주의 토지 독점을 막고, 둘째 소작제도의 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영구 소작권을 보장하며, 셋째 농촌의 집단화·협동화, 효과적인 농업 기술 및 영농 지도를 통해 생활 개선과 소득 증대를 이루어 ‘누구나 잘 사는’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식민 지배 체제에서 실행하기 힘들었던 평등사회 구현과 민족 독립을 이종만은 1930년대부터 조선 땅에서 몸소 실현하고자 했다.
1930년대 식자층의 인기 잡지였던 ‘삼천리’ 인터뷰 기사에서 기자는 이종만을 “조선의 로스 차일드요, 카네기,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종만은 백만장자임에도 때로는 각반을 차고 탄광에 들어가 괭이를 잡고,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아낌없이 농촌 계몽과 농민,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를 위해 흔쾌히 기부했던 경제인이자 사회사업가였다. 평양 교외의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는 남호 이종만 선생이 남·북한의 급변하는 사회를 볼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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