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대사관 땅은 실은 대한조선공사회장이었던 남궁련씨가 기증한 땅이었다. 1916년생인데다 일본에 유학까지 했으니 당연히 뼛속까지 일본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긴 했겠지만, 그렇게 쾌척하게 된 건 1965년 한일협정을 맺은 후에도 대사관을 지을 땅을 팔아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더구나 남궁련 회장 자신이 살았던 곳이었다니, 그곳이 경복궁을 굳이 ’흘겨보는’ 위치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역사를 잊은‘ 탓에 생긴 망상일 수 밖에 없다.
그나저나 남궁련회장의 부인도 일본인이었다니, 조선인징용자등과 결혼한 탓에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이들과 달리 조선의 엘리트와 결혼해 해방후 한국의 최상부에서 유복하게 살았던 여성들도 적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에도 썼지만 이방자여사는 물론이고 김종필의 형수들도 그런 이들이었는데, 남궁련의 부인은 일본식으로 성까지 바꿨는지 남궁영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고. ’제국의 흔적’은 우리생각 이상으로 깊고 넓다.
우리의 일본인식이 과거 이상으로 적대적 편견으로 가득해진 건, ‘음흉한 의도’찾기에 휘둘리느라 정작 이런 역사를 보지 못하거나, 적극적으로 은폐/망각했기 때문이다. 편견이 극에 달해 증오심으로 써내려간 듯한 박경리의 일본론도 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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