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의 삶과 신앙 - 복음과 상황
김교신의 삶과 신앙
[293호 특별기획: 김교신 서거 70주년]
[293호] 2015년 03월 30일 (월) 14:40:27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goscon@goscon.co.kr
▲ 사진: 위키미디어코먼스
김교신(金敎臣, 1901~1945) 선생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에 걸쳐 신앙의 동지들(송두용·양인성·유석동·정상훈·함석헌)과 함께 ‘성서연구회’ 및 <성서조선>을 통해 ‘성서를 조선에’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려 한 ‘무교회주의’ 신앙인이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의미의 ‘조선적 기독교’ 혹은 ‘조선산(朝鮮産) 기독교’ 운동을 펴기 위해 한국교회가 ‘미국식의 천박한 기독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성경연구를 통해 형해화되어가던 당시의 기성교회를 비판, 개혁함으로 그 틀과 제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의미에서 ‘무교회주의자’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교회사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그는,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자기 신학과 신앙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올 때마다, 그런 비판에 대응할 만한 가장 주목되는 선각자이기도 하다. 그의 ‘조선적 기독교’가 최근에 더욱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서거 7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게 되는 이유다.
선생의 삶
선생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이 유가적인 전통을 지닌 집안이어서 그는 어릴 때부터 유교적 교육을 받으며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소년기에 한국은 일제 강점하에 들어갔다(1910). 일제 강점 초기에 선생은 공립보통학교에서 배웠고 12세 때에 네 살 위의 한매와 결혼, 16세에 장녀 진술을 안는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한 3월에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다. 선생은 이 해 봄에 어머니와 아내 큰딸 세 식구를 남겨둔 채 “조선 사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철심을 품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데, 이를 두고 “적국의 심장부에 침입하는 척후병의 심경이었음에 틀림없다”고도 했다.
도쿄정칙(東京正則)학교에 입학, 영어를 공부하면서 선생은 도일 1년 후 1920년 4월 18일 주일, 그의 생일이기도 한 그날부터 우시고미 아라이마치 홀리네스(성결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때껏 유교적인 교훈을 받아 왔던 선생은 산상수훈(山上垂訓)을 통해 기독교의 새로운 가치관에 감복하게 된다. 교회에 출석한 지 두 달이 채 안된 6월 16일, 그는 그 교회의 시미즈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분규로 인해 그 해 11월 그 교회를 떠났다.
선생은 교회를 떠나기 전부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1)의 《구안록》(求安錄)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교회를 떠난 11월 초순 우치무라의 댁을 방문했고, 이어서 1921년 1월 16일부터 시작된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의를 그 이듬해 가을의 마지막회까지 청강하게 된다. 강의 장소는 위생회관. 선생은 700명 이상의 청중 가운데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만큼 우치무라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매료된 이유는, “나는 우치무라 선생으로부터 애국과 복음을 배웠다”는 선생의 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
우치무라의 애국심은 그 때까지 내연(內燃, 마음 속에서 불타오름)되고 있던 김교신의 애국심을 격발 고양시켰고, 우치무라가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라야만 진정한 민족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2J(Jesus for Japan)로 표현된 우치무라의 복음과 애국심은, 이제 선생에게서는 2C(Christ for Chosen)로 발현되고 있었다. 이 점에서 선생과 우치무라는 모두 철저한 ‘기독교적 민족주의자’였고 자기 민족을 행복하게 하는 진리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한 그의 민족 사랑은 자신의 학문과 진로를 변화시켰다. 1922년 4월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던 그가 이듬해 동식물학과 광물지질학 및 지리학을 망라하는 지리박물과로 전과한 것이다. 조선의 지리와 박물을 공부하는 것이 조국을 더 사랑하는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선생이 뒷날 지리박물학 교사로서 조선의 대형지도를 걸어놓고 각별하게 지리수업을 진행한 것이나, “서울 근교의 북한산 기슭을 산책하며 계곡이나 백합화를 볼 때조차 흐느껴 울”었던 것, 또 조선의 금수강산과 함께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을 소개하며 후진들에게 조국 사랑과 민족애를 성숙시켜 갔던 것을 보면, “애국심 때문에 전과했다”는 지적은 정확한 듯하다.
1924년 이후 우치무라의 집회에는 송두용, 류석동,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도 같이 참석하게 되었다. 개인의 진로와 민족 문제로 고민하던 그들은 우치무라의 집회를 통해 믿음(복음)과 애국의 상관성을 확신하면서, 1926년 도쿄에서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매주 성서연구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어·영어·독일어·희랍어·히브리어 성서를 참고하면서 조선어성서를 연구했고, 특히 선생과 함석헌은 희랍어 학습에 열중했다. 함석헌에게는 엿새 동안의 학교 공부보다 이들 그룹의 공부가 차차 더 관심사가 되었다.
김교신이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27년 3월로, 도일한 지 8년만이었다. 선생은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함석헌은 정주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이 해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간행하고 조선의 무교회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28년 선생은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겨 그로부터 12년간 근속하게 된다. 처음에 신학을 공부한 정상훈이 편집책임을 맡았던 <성서조선>은, 16호(1930년 5월)부터는 선생이 주필로서 집필·교정·인쇄·우송 등 사무 일체를 전담하여 “조와”(弔蛙) 필화사건으로 폐간되는 158호(1942월 3월)까지 계속 이어졌다. <성서조선>이 추구하는 바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고 ‘조선을 성서화하자’는 것으로 이는 곧 성서입국(聖書立國)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젊은 시절 손양원과 장기려도 <성서조선>의 애독자였다.
귀국한 6인의 동지들은 처음부터 무교회주의운동의 깃발을 올릴 의도는 없었다. 함석헌도 “처음부터 교회에 가지 말잔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에 갔다가는 늘 실망했다고 한다. 하나님과의 문제에서 “항상 교회란 우상이 그 중간에 선다”고 하소연하면, ‘독선’이니 ‘고답’이니 하면서 ‘교회를 부인한다’는 비난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성 제도권 교회가 형해화되어간다고 보고 자기들끼리 모이기 시작했다. 선생과 류석동, 송두용, 정상훈은 주일마다 서울에서 공개집회를 갖게 되었다. ‘무교회 성서집회’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인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이유로 민족 정신이 없는 무리라 규정당하여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에게 집회장소를 빌려주지 말라는 전달문이 나돌 정도여서 집회 장소 찾기도 힘들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김인서 목사와 선생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선생은 양정학교에 부임한 이래 공덕리에서 거주하다가 1936년 여름께 정릉으로 이사했다. 공덕리에 거주하는 동안 근처 장로교회에서는 그를 초청, 설교도 맡기고 성경공부를 가르치도록 했으며 심지어는 주일학교 책임을 맡아달라는 제의도 했다. 정릉으로 옮긴 뒤에는 매일 새벽 일어나 냉수마찰을 한 후 근처 산에 올라가 오랜 시간 기도하고 때때로 찬송을 통해 영성을 북돋아갔다. 선생의 새벽기도는 20세기 초 한국교회에 정착한 새벽기도의 모형을 예배당이 아닌 산천에서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뒷날 송도로 옮긴 뒤에도 산천 새벽기도는 계속되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새벽기도 전통을 이렇게 계승 발전시켰다. 선생과 동지들은 원어를 통한 성경공부에서나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을 무교회주의자로 낙인찍기 전에 말씀과 기도 생활에 철저했던 선생의 영성을 먼저 헤아려봐야 할 것이다.
1940년 3월말, 선생은 12년간 교편을 잡았던 양정학교를 사임하게 된다.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순응하지 않은 소신 때문이었다. 양정에서는 박물교사 못지 않게 체육 단련을 위해 노력했고, 손기정 같은 선수를 키웠다. 그 해 9월 선생은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 교장 이와무라(岩村)의 호의로 그 학교에 부임했으나 일제의 동화정책에 순응할 수 없어 곧 사직했다.
이듬해 7월,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만월대 뒤편 송악산 폭포 아래 웅덩이 가에 새벽기도 처소를 정하고 매일 4-5시경에 기도하러 갔다. 그 해 겨울에도 그곳에서 냉수마찰을 하고 폭포소리에 대항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 그 혹한에도 폭포 밑 웅덩이에 살아남은 몇 마리의 개구리를 보고, “아! 전멸은 면했구나!”라는 ‘조와’의 글귀를 민족의 부활과 관련하여 구상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엄동설한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개구리를, 혹한 같은 일제의 탄압을 인고(忍苦)한 조선 민족에 비유했던 것일까. ‘조와’는 이렇게 쓰여졌고, 그 글은 탄압의 기회만 노리던 일제에 호기를 안겨주었다. ‘성서조선사건’은 이렇게 얽혀졌다.
성서조선사건으로 처음 400여 명이나 수배되었지만, 그 날로 귀가시키기도 하고 혹은 수 일, 수십 일 유치시키기도 했는데 오랜 동안 옥고를 치른 사람은 13명이다. 선생은 1942년 3월 30일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으나, 결과는 기소거리가 되지 않아 이듬해 3월 29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했다. 옥중에 있는 동안 선생은 기도에 더욱 힘썼고 매일 주기도문을 300번 씩 외웠다고 한다. 취조한 형사는 선생과 동지들을 두고, “네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아온 조선놈들 중에서 가장 악질분자다. … 네놈들은 종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조선 민족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 년 후, 아니 오백 년 후에라도 독립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닦으려는 악질분자다”라고 했다. 선생의 중심을 꿰뚫어 본 말이었다. 어떤 담당관은 “김(교신)에게는 정말 하나님이 계셔서 도와주고 계시는 것 같다”라고도 했다. 이것이 선생의 옥중생활에 관한 진면모다.
출옥한 선생은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입사, “징용으로 각지에 흩어지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수 천 동포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곳에서도 선생은 스승으로서의 신념을 살려 조선인의 긍지를 살리기 위한 교육과 훈련에 힘쓰는 한편 동포 노무자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힘썼다. 선생의 이런 헌신적 모습이 일본인 상사들을 감복시켰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급성 전염병인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환자를 간호하다가 선생 자신이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그토록 갈망했던 조국 해방을 넉 달 남겨둔 채 타계했다.
선생의 ‘무교회주의’와 ‘조선산’ 기독교
선생은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왜 그럴까? 이를 알려면, 먼저 신앙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제도와 형식만 남은 교회를 두고, 당시 신앙인들이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래야만 당시 선생과 동지들이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를 알게 된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처럼, 그 때도 성경이 제시하는 본질을 떠나 제도와 관행에 얽매여 교회가 형해화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선생과 동지들이 ‘무교회’라는 화두로 조선 교회에 물음을 던지고 도전했던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유교회인’들의 물음이 당시에는 ‘무교회주의자’들에 의해 던져진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유추해 본다면, 당시 성경연구를 계속해 오던 선생과 동지들은 이미 역동성을 잃은 한국교회에 교회개혁이라는 차원에서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고 행동화하려 했던 것이다.
선생과 동지들은 일본에서 무교회운동을 전개하던 우치무라의 지도를 받았다. 이 때문에 비판자들은 이를 악용하여 조선의 무교회운동을 우치무라 및 일본의 아류로 얽으려 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선생과 그 동지들이 무교회운동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주장과 연결시켰음에 유의해야 한다. 어느 시대에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는 불가피하게 개혁을 의미했던 것이다. 한 때 ‘무교회주의’가 한국교회의 대표적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또 이단을 정죄할 때 간혹 ‘무교회주의’라는 딱지를 붙였던 게 사실이라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상을 보면서 이제는 기성교회의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무교회주의’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선생이나 동지들, 소위 ‘무교회주의자들’이 꿈꾼 조선교회상은 성경에 입각한 더 ‘순수한’ 교회였다. 구미를 통해 유입된 기독교나 교회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교회였다. 이는 “‘서구적’ 기독교가 아닌, 성경을 통해 직접 한국에 유입된 기독교, 그렇게 해서 한국적인 문화 토양에서 자라 열매를 맺는 ‘조선산’ 기독교를 꿈”꾼 것이었다. 선생이나 동지들이 성경을 읽되 일본어·영어·독일어·희랍어·히브리어 성경을 참고했던 것은 바로 이런 시도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특히 선생과 동지들이 사도시대의 성경 언어인 헬라어를 직접 읽고 성경 원어에 주력했던 것은 조선 교회의 원류를 구미 교회의 ‘천박성’에 두려는 흐름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선생의 이같은 시도가 ‘조선산’ 기독교를 배태하기 위한 꿈이었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복음을 수용한 지 130년을 넘겼는데도 아직도 한국교회는 자기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은 여전히 자기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육화시킨 그런 신학이 아니다. 아직도 정체성이 모호한 번역 신학, 수입 신학, 외주 신학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신학도 하나의 학문이라면 의당 자기 상황을 문제시하여 거기서 진액을 짜면서 신학화 작업을 해야 한다. 수입 신학·번역 신학에다, 심지어는 구미식의 시장화한 교회행태까지 보이면서 바알과 아세라의 전당으로 변모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교회는 선생과 동지들이 꿈꾸었던 조선산 기독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생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개혁의 큰 울림을 다시 던지고 있다.
오늘날 구미에 유학하는 이들이 그쪽 학계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한국적인’ 것을 소개해 달라는 것이다. 그 때 내세우는 인물이 김교신, 함석헌이요, 그 자료는 <성서조선>이다. 이를 감안하면 선생은 이제 우리 신학계, 신앙계에 재등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선생을 재조명하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치무라의 제자인 야나이하라(矢內原忠雄)는 1937년 전시체제를 반대하다가 교수직에서 쫓겨난 인물로, 1940년 김교신의 초청으로 조선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그가 해방 후 <가신>(嘉信) 1945년 9월호에 게재한 김교신 선생에 대한 애도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사람’으로 불리운 것처럼 김교신 씨는 참 조선인이었다. 씨는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민족을 사랑하고 조선말을 사랑했다. 그러나 씨의 민족애는 고루한 배타적인 민족주의와는 달랐다. 씨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신생(新生)한 조선인이었다. 온유, 근면 등 조선인으로서의 생래(生來)의 도덕이 씨에게는 믿음에 의해 한층 순화되어 있었다. 씨는 그리스도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애국을 삼았다. 미국식의 천박한 기독교가 아니고, 불신앙의 소련 공산주의도 아니고, 더욱 세속적인 민족운동도 아니고, 권력자에 대한 영합, 협조도 아니고 순수한 무교회의 복음신앙에 의해 조선인의 영혼을 신생시키고 이를 자유와 평화와 정의의 백성 되게 하기 위해 씨는 그 귀한 일생을 바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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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4년 11월 28일,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서 행한 강연을 개고한 것이다.-필자
이만열
1938년 경남 함안 출생으로, 서울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합동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로 숙명여대에서 오랫동안 가르쳤으며, 전두환 군부 정권 하에서 해직당한 기간에는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에 힘을 쏟아 한국교회사 연구 수준을 격상시켰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 <복음과상황> 공동발행인 등을 지냈다. 최근 산문집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을 펴냈고, 지금까지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이만열 교수의 민족 통일 여행일기》 《한국기독교사특강》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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